소설리스트

단태신곡-41화 (41/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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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몰랐지만 여화를 통해서 배망식을 때린 그 사건이 얼마나 큰 사건으로 번질 뻔했는지 뒤늦게 들었다. 륜사와 당고가 한바탕 싸운다면 마둔수탑 전체가 휘청거릴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다행히 위기는 모면했지만, 또다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 때문에 사부님이 다치셨어.’

단태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천막에 들어섰더니, 명국영이 누워서 자는 륜사 옆에 앉아 있었다. 사정을 다 들었는지 단태를 쳐다보는 명국영의 눈빛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여화는 필요한 물건을 사 온다면서 밖으로 나갔다.

“모든 행동은 선행과 악행으로 나누어진다. 선행도 둘로 나눌 수 있지. 의도한 선행, 의도하지 않은 선행. 마찬가지로 악행도 의도한 악행, 의도하지 않은 악행이 있단다.”

“제 행동은 의도하지 않은 악행이라는 건가요?”

“아직 다 말하지 않았단다. 거기에 한 가지 요소가 더 필요한데, 그게 바로 시간이란다. 처음엔 의도한 선행이었지만 나중엔 의도하지 않은 악행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의도한 악행이지만 결국 의도하지 않은 선행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지금 이 순간만 본다면, 네 행동은 분명히 의도하지 않은 악행이다. 넌 륜사를 위해 그 일을 했지. 누구도 그걸 비난할 수는 없단다. 하쿠라는 작자가 그런 속셈을 가지고 있을지 누가 알았겠느냐? 그러나 내가 하고픈 말은 단순히 네게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난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네 행동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알려 주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자책만 하다가 시간이 흘러도 의도하지 않은 악행으로 남겨둘 것인지, 아니면 의도하지 않은 악행을 의도한 선행으로 바꿀지는 전적으로 네 선택이라는 말이다.”

어렵지만 마음에 와 닿는 말이었다.

“……제가 뭘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나와 같이 생각해 보자꾸나.”

명국영이 빙긋 웃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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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천파는 륜사를 살폈다. 몸에 이상은 없지만 사흘은 내리 잠만 자게 될 터였다. 아이처럼 옹알거리며 자는 륜사는 더 이상 인솔자로서의 책무를 다할 수 없고, 그러니 누군가 그 임무를 대신해야 할 상황이었다. 누천파는 슬며시 웃었다. 하쿠의 행동은 비열하지만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기회가 찾아올 줄이야.

돌아선 누천파는 이 좁은 천막에 모인 사람들을 쳐다봤다. 대학사이자 누천파의 스승이지만 마법에는 문외한인 명국영, 물의 도시 사투라체의 계승자지만 역시 마법에는 초보 수준인 반우현이 시야에 들어왔다. 누천파는 자신만이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상황이 심각합니다. 염종화탑이 발톱을 내밀었으니, 이쪽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탑에 연락은 했나요?”

반우현이 물었다. 그녀와 누천파는 소꿉친구였으나 공식적인 자리에서까지 허물없이 지내지는 않았다.

“용마 당고를 주축으로 스무 명의 마법사가 용을 타고 출발했다지만, 이곳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나흘은 걸립니다. 그때까지는 우리 스스로 버텨야 합니다.”

“문제는 염종화탑의 의도겠지.”

명국영이었다.

“스승님은 마치 다 아시는 것 같습니다.”

누천파는 비꼬아 말했다. ≪무무비경≫을 비롯해서 소위 고전이라 불리는 낡은 책들과 케케묵은 역사나 철학 따위에는 저 작자가 전문가일지 모르나, 이번 일은 전적으로 마법사의 소관이었다.

“어떻게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알 수 있겠나? 허나, 일부는 알 수도 있지. 륜사 님이 사흘이면 깨어날 테고, 당고와 마법사들이 나흘 안에 도착할 테니, 염종화탑으로서는 내일 밤을 놓치지 않을 걸세.”

“내일 밤이라구요?”

반우현이 관심을 보였다.

명국영은 반우현을 쳐다보며 설명했다.

“내가 염종화탑을 이끈다면, 내일이 적기라고 판단할 겁니다. 오늘은 잔뜩 긴장하고 있으니 조심스러워할 테고, 긴장이 어느 정도 느슨해질 내일 밤이 가장 좋을 테니까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누천파가 반박했다.

“왜죠?”

반우현이었다.

“이곳에는 염종화탑 외에도 많은 탑에서 마법사들이 나와 있습니다. 고룡 암탄주의 유언을 받기 위해서죠. 그 탑들 중에서 평소 마둔수탑과 관계가 좋은 몇 개의 탑에서 우리를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염종화탑은 감히 우리를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누천파는 명국영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런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라는 눈빛이었다.

“만약 그 탑들도 우리와 비슷한 처지라면?”

“…….”

명국영의 질문에 누천파는 할 말을 잃었다.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반우현이었다.

“저는 륜사 님의 종자인 단태의 도움을 받아 이곳의 분위기를 살폈습니다. 원래 종자들은 어디에 있든 말이 많아서 정보를 수집하기 좋지요. 그랬더니 마둔수탑과 관계가 좋은 편인 탑들은 하나같이 기이한 변고가 생겼더군요. 흑혼지주를 받은 건 마둔수탑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양천구탑, 수공천탑, 갈문비탑 등도 흑혼지주로 피해를 본 모양입니다.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인데, 가만히 있다가는 넋 놓고 당할지도 모릅니다.”

“그, 그게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장 천마룡에 올라타고 이곳을 떠나면 됩니다.”

“그건 안 됩니다!”

누천파가 격렬하게 반응했다.

“용의 유언 때문에 이곳에서 죽어도 좋다는 뜻인가? 불확실한 목표에 모든 것을 던지는 도박만큼 어리석은 선택도 없다고 가르치지 않았나?”

“당신은 개인적으로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지만, 지금 저는 마둔수탑의 계승자이자 이번 임무의 책임자로 여기 서 있습니다. 그러니 내 말에 따라 주셔야 합니다.”

“……알겠네.”

명국영은 어깨를 올리며 자신에겐 방법이 없음을 드러냈다. 이제 선택은 반우현의 몫이었다.

반우현은 명국영과 누천파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도 용의 유언 때문이었다. 누천파가 암탄주에게서 마법의 유산을 얻고 싶어 한다면 반우현은 용족이 오랫동안 모아 놓은 보물에 관심이 많았다. 도시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재물이 필수적인데, 현재 물의 도시는 노예 매매로 재정을 충당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안전을 생각한다면 당장 떠나야 한다는 명국영의 손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도시의 미래를 고려한다면 누천파에게 힘을 실어야 하리라.

“일단은 사태를 지켜봅시다. 다른 탑에서 나온 책임자들과도 이야기를 나눠 보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 말에 만족한 누천파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명국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막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던 여화, 단태 앞에 선 명국영은 고개를 저었다.

“예상대로야. 두 명의 계승자는 욕심에 눈이 멀었어.”

“이제 어쩌죠?”

여화였다.

“아무래도 불길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쳤다가는 탑들 사이에 대규모 충돌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데, 그런 위험을 감수했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는단 말이야. 과거에도 이런 충돌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관련된 탑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고, 그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걸었지. 저들이 그 역사적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

명국영은 뒷짐을 진 채 쏟아질 듯한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경우라면 저 탑들이 평소의 한계를 뛰어넘어 이런 식으로 공세적인 행동을 취할 수도 있으리라. 그게 사실이라면 용의 유언을 받기 위해 모인 이 자리는 거대한 함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숨을 내쉰 명국영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쳐다보는 수련사와 종자를 쳐다봤다. 이 두 사람과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마차를 빌려 륜사를 태우고 달아날까? 그래 봐야 멀리 가지 못할 테고, 용을 탄 자들에게 금세 발각되어 당하고 말 텐데.

‘지금이야말로 무무가 그토록 강조했던 금덩이 같은 지혜를 발휘할 때인가? 목숨을 걸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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