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42화 (42/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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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입니다.”

하쿠가 말하자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미묘하게 출렁였다. 그 말이 돌멩이가 되어 잔잔한 호수에 떨어진 것처럼. 하쿠는 용암이 압력을 받아 열기를 뿜으며 흘러가는 모습을 떠올렸다. 곧 폭발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오랫동안 무시와 경멸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경험해 왔다. 그러니 이번 임무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터였다.

“마둔수탑의 륜사는 무력화시켰나요?”

머리카락은 짧으나 매력적인 여인이 물었다.

“물론입니다. 확인까지 마쳤으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도위신탑의 계승자여.”

하쿠가 답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왕은설의 태도에 하쿠는 뿌듯함을 느꼈다. 저 여자가 왜 륜사에 대해 신경 쓰는지 하쿠는 잘 알고 있었다. 륜사가 명성을 떨친 계기가 된 마법 ‘수룡천’은 도위신탑이 자랑하는 마법 ‘지림무’의 천적이었다. 숲을 그 뿌리까지 뽑아 버리는 수룡천 때문에 도위신탑은 은근히 륜사의 행보에 신경을 써 왔던 것이다. 왕은설은 아예 륜사를 죽이자는 의견을 내비쳤으나 그랬다가는 탑 사이의 전면전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진매록탑의 계승자 녹윤의 지적 때문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하쿠는 이제 녹윤을 쳐다봤다.

“안후철탑은 어떻습니까?”

“병손단은 흑혼지주에 마력이 빨려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계승자인 원도유는 멀쩡하지만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잘됐군요.”

하쿠는 성질이 불처럼 급한 병손단이 죽지 않은 것만도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안후철탑의 칠장로 중 하나인 병손단이 죽는다면 일이 필요 이상으로 커질 수도 있는데, 과연 흑혼지주는 다혈질의 마법사에게 효과가 좋은 무기였다.

“청한신탑도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칠장로 중 하나인 교현우는 흑혼지주에게 물린 계승자 학위청을 구하기 위해 마력을 소진했으니까요. 움직인다고 해도 위력적인 마법은 펼치기 어려울 거예요.”

왕은설이었다.

하쿠는 톱니바퀴처럼 착착 맞아떨어지는 계획의 진행 상황에 만족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불안해졌다. 너무 완벽하면 엉뚱한 곳에서 이상한 일이 터지곤 했기 때문에. 그래서 잠자코 뒤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이번 일을 염종화탑, 진매록탑, 도위신탑이 주도했다면 저 두 사람은 배후에서 중심을 잡아 주는 역할을 맡았다. 나머지 군소마탑 사람들은 들러리에 불과했다.

“막천무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하쿠는 공손하게 물었다.

“잘 진행되는 것 같군요. 한데, 저보다는 황명거사께서 상황을 더 잘 아실 것 같습니다만.”

후령사탑의 장로인 막천무는 옆에 앉아 있는 백발의 석장명을 쳐다봤다. 황명거사로 불리는 저 노인을 겉모습만으로 깔봤다가는 큰코다친다는 사실을 막천무는 잘 알았다. 제국에 단 일곱 명 존재하는 천마 중 하나이자 황실의 수석마법사가 바로 저 노인이었다. 처음 봤을 때 추레한 외모에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던 막천무는 은연중 강인함을 드러내는 노인의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가까스로 위기의 순간을 넘겼던 것이다.

“폐하의 명령을 받고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만, 제 임무는 고룡 암탄주의 유언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석장명은 명확히 선을 그었다. 용의 유언 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가 진행 중인 이 천막을 나가지는 않았다. 황실이 비공식적인 지지를 보낸다는 의미에 하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용을 타고 도망치면 어쩌죠?”

왕은설이었다.

“암흥초를 먹였으니, 곧 용들은 기침을 시작할 겁니다.”

진매록탑의 녹윤이 말했다.

하쿠는 녹윤이 미리 손을 써 놓았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다들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다는 뜻이다. 암흥초는 용에게 기침을 유발하는 약초로 유명한데, 비행 중인 용이 기침을 하면 아무리 쇠사슬에 천막과 사람을 고정해도 쇠사슬까지 끊어져 다들 추락하고 말 터였다. 일단 용이 기침을 하면 비행은 불가능했다.

세부적인 논의가 이어졌다. 이미 큰 틀의 합의는 이루어졌기에 사소한 의견 차이만 있었는데 조율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계획이 성공한 이후의 일정에 대해서는 각 탑의 입장이 달라서 의견을 하나로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고성이 오가는 가운데, 하쿠가 일어나서 성공한 이후에 다시 모여서 의논하자고 제안했고, 결국 그렇게 결론이 났다. 하쿠는 일이 잘 진행될 경우 각 탑이 딴생각을 품을 가능성이 꽤 높다고 판단했다. 목표 지점이 코앞에 와 있으면 누구든 딴마음을 품기 마련이었다.

천막으로 돌아온 하쿠는 손님이 있다는 하인의 말에 이미 누가 와서 기다리고 있는지 깨달았다.

“아, 유타루체의 계승자를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비열한 짓이었어요.”

반우현은 하쿠를 노려봤다.

“제가요?”

“당신에게 호의를 베푼 날 바보로 만들다니, 실망입니다.”

“호의를 베풀다니요?”

하쿠는 시치미를 잡아뗐다.

“당신은 유독 륜사 님과 그 아래에 있는 수련사, 종자에 대해 물었고, 난 의심 없이 알려 줬어요. 지난번에 일어난 마둔수탑 내부의 일에 대해서요. 그런데 당신은 그 관계를 이용해서 륜사 님을 위험에 빠뜨렸어요.”

“그게 사실이라면 누군가 절 사칭한 게 분명합니다. 즉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러니 계승자께서는 저를 믿으시…….”

“사람을 바보로 생각하는군요.”

반우현은 차가운 시선으로 하쿠를 응시했다. 생각 같아서는 다가가서 뺨이라고 한 대 후려치고 싶었지만, 상대는 염종화탑의 계승자였다. 불의 도시에 자리 잡은 탑의 계승자를 가까이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준 자신의 잘못이 컸다. 그러니 바보 취급을 당해도 할 말은 없었다.

“조언 하나 해 드려도 될까요?”

“해 보세요.”

“염종화탑은 불의 도시 방염루체를 장악한 지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확장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뜻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물의 도시에 관심이 있습니다. 비록 물과 불은 상극 관계지만, 때로는 상극이기에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마둔수탑에 대한 고정관념을 깰 수만 있다면 계승자께서는 더 광활한 세계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렇군요.”

반우현은 속으로 긴장했지만 느긋한 척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알았어요.”

천막 밖으로 나온 반우현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염종화탑이 불의 도시를 좌지우지할 만큼 세력을 키웠다는 이야기를 얼핏 듣긴 했지만, 또 다른 도시까지 넘볼 만큼 야망을 가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천막들 사이로 난 길로 천천히 걷던 그녀는 우뚝 멈춰 서서 현재 상황을 고민했다. 따지고 보면 이 다툼은 탑들 사이의 충돌이지, 도시와는 관계가 적었다. 물의 도시라고 해서 마둔수탑에 의지해야 할 필요는 없다. 염종화탑이 들어온다면 마둔수탑 역시 긴장할 테고, 때로는 경쟁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일 터였다.

‘나 혼자서는 결정할 수 없는 문제야. 아버지와 의논해야겠어.’

천막으로 가는 반우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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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태는 쟁반을 들고 천막 안으로 들어가서 심각한 표정을 지은 사람들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안후철탑, 청한신탑 그리고 유명하다는 천광탑 출신 마법사들도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쉬는 누천파를 힐끔 살핀 단태는 재빨리 천막 밖으로 나왔다.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네.’

그런 단태를 여화가 불러 안쪽이 어떤지 물었다.

“……큰일 났어요.”

“왜?”

“방법이 없는 모양이에요.”

“그래?”

눈에 띄게 실망하는 여화였다.

단태는 여화와 함께 륜사를 보러 갔다. 이틀째 자고 있는데,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사부님이 일어나면 문제가 해결될 텐데. 단태는 자신에게 그 구슬을 건넨 남자를 기억해 냈다. 기회가 온다면 그 잘난 얼굴을 밟아 버리고 말리라.

하쿠라는 사람과 그 패거리는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 단태는 안후철탑, 청한신탑 그리고 천광탑까지 흑혼지주나 그 비슷한 것 때문에 당했다는 사실을 어젯밤 여화로부터 전해 들었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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