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43화 (43/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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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내용이 궁금한 단태가 홀로 그 천막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천막 밖으로 나와 흩어졌다. 회의가 끝난 모양이었다. 누진파와 반우현이 가장 늦게 걸어 나왔다. 단태는 큼지막한 수레 옆으로 붙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어쩌지?”

반우현이 물었다.

“최대한 버텨야지. 오늘 밤만 잘 넘기면…… 륜사 님이 깨어날 거야. 그리고 또 하루만 버티면 당고 님이 도착할 거고.”

“버티지 못하면?”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을 쳐다보던 누천파는 시선을 옮겨 반우현을 노려봤다.

“……버텨 낼 거다.”

의지가 깃든 대답이었다.

“좋아. 한데, 한 가지 얘기할 게 있어. 네가 꼭 들었으면 하는 내용이야.”

“그래? 해 봐.”

“염종화탑의 하쿠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더라구. 염종화탑이 물의 도시로 들어오고 싶은 모양인지, 나더러 진지하게 유타루체에 또 다른 탑이 있으면 어떨지 생각해 보라고 했어.”

“……그래서?”

누천파의 눈에서 불이 났다.

“안 된다고 했지.”

“당연히 그래야지.”

“당연히?”

반우현은 웃으며 물었다.

“……그야 유타루체와 마둔수탑은 하나니까.”

“능력 없는 탑에는 관심 없어. 그러니까 오늘 잘 버텨 내야 할 거야. 무슨 뜻인지 알지?”

“…….”

“착륙장에 있던 용은 다 기침을 해서 비행은 불가능해. 달아날 수도 없다는 거지. 이제, 남은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전적으로 네게 달렸어. 좋든 싫든 말이야. 그러니까 난 이번 일의 결과에 따라서 널 그리고 마둔수탑을 판단할 생각이야. 우리가 소꿉친구지만 공과 사는 분명해야지. 안 그래? 그럼 무사히 내일 아침에 보자.”

반우현은 손을 흔들며 붉은 천막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반우현을 죽일 듯 노려보던 누천파는 몸을 홱 돌려 천막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대화 내용에 긴장한 나머지 숨까지 막혔던 단태는 수레바퀴 옆으로 나오며 헐떡거렸다. 상상도 못 한 이야기가 두 사람 사이에 오갔다. 어떻게 이런 순간에 소꿉친구라는 사람에게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염종화탑은 사부님을 다치게 한 하쿠의 탑이 아닌가? 단태는 반우현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고, 바로 그 때문에 혼자 이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 누천파가 불쌍했다.

‘내가 누군가를 동정할 입장은 아니지만…….’

륜사의 천막으로 돌아온 단태는 여화에게 저녁 식사를 갖다 주고는 천막 입구에 서서 주위를 살폈다. 어떤 식으로든 염종화탑, 진매록탑, 도위신탑 그리고 후령사탑의 마법사들이 공격을 해 올 것이다. 철저하게 준비한 그들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텐데. 이대로 가만히 그런 꼴을 지켜봐야 할까?

할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하고 싶었다.

사부님을 안전하게 지킬 수만 있다면!

그때, 누천파의 하인이 다가왔다.

“계승자님께서 전부 모이라고 하네. 명령이니 짐을 다 가지고 푸른색 천막으로 오게.”

“……알겠습니다.”

단태는 그 소식을 여화에게 전했다.

“명령이라구? 사부님은 지금 움직일 수 없는데, 거기로 오라니!”

분개하는 여화.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한곳에 모여야 방어가 쉽다는 점은 여화도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업을게요.”

단태가 나섰다. 가녀린 여화보다는 낫겠다 싶어서였다.

“네가?”

“저도 힘 좋은 편이에요.”

“음, 알았다. 잠깐만 기다려.”

여화는 가방에서 약병 몇 개를 꺼내더니 그 자리에서 재빨리 환을 만들었다. 마력이 주입된 세 개의 환은 암녹색으로 반짝거렸다. 그 알약을 단태에게 내민 여화가 설명했다.

“이건 힘을 강화시켜 주는 ‘체웅환단’이야. 먹어 봐. 그러면 힘이 세질 거야.”

의심 없이 녹색 알약 하나를 삼킨 단태는 배 속에서 퍼지는 뜨거운 기운에 깜짝 놀랐다.

잠시 후, 단태는 여화의 도움을 받았지만 너무나 쉽게 륜사를 업었다. 륜사가 헤어진 여동생 설희처럼 가볍다니!

“……대단해요, 여화 누나!”

“두 시간마다 한 번 먹어야 돼. 자주 먹으면 위험하니까 조심하고.”

“알았어요.”

단태는 알약 두 개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여화가 대충 짐을 챙기자 단태는 륜사를 업고 누천파의 천막으로 향했다. 아직 어둠이 내리지 않아 가는 길은 비교적 안전했다. 천막으로 들어서니 반우현이 푹신한 양털이 깔린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입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단태는 저 웃는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지만 꾹 참고 여화가 이동식 침대를 조립하는 동안 기다렸다. 륜사를 그 침대에 눕히자 단태는 또 한 번 도시의 계승자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봤다. 환자가 있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다니!

누천파가 다가왔다.

“마력석은 얼마나 있지?”

“……40율 정도입니다.”

여화가 대답했다.

“내 하인들보단 준비성이 좋아. 그거, 내게 넘겨.”

“제게 10율은 남겨 주십시오.”

“그쪽에게?”

누천파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화는 대답 대신 손을 뻗었고, 손바닥 위에 조그만 물방울이 생겨났다. 승급 시험을 거쳐 타마의 경지에 오른 마법사만이 가능한 기술에 누천파의 눈빛이 달라졌다.

“5율만 주지.”

“……알겠습니다.”

여화는 더 이상 욕심내지 않았다. 더 바랐다가는 5율도 건지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탑 내부에서 수련사에 대한 마법사의 시선이 어떤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저 계승자는 승급 시험을 거치지 않았지만 특별한 교육을 받아 웬만한 타마, 어쩌면 부마보다 실력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조심하는 게 이로울 터였다.

누천파의 하인들이 마력석을 가져가자, 단태가 옆으로 다가왔다. 여화는 호기심 많은 단태가 무엇을 물을지 알고 있었다.

“율은 마력석의 단위야. 너, 보주 만져 본 적 있지? 색깔이 있는 구슬 말이야.”

“아, 있어요.”

단태는 가짜 할아버지 엄포윤이 건넨 구슬을 떠올렸다.

“그 구슬을 마력석에 올렸을 때, 반딧불처럼 빛나면 그걸 율이라고 해. 그렇게 정한 거지.”

“아하.”

단태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화는 마력석을 이용하여 륜사의 침대 주위에 방어 마법진을 그렸다. 5율밖에 없어서 위력이 부족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단태는 그 옆에서 마법진을 유심히 살폈다. 아직 마법을 본격적으로 배우지도 않았고, 마법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단태는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에게 앎은 곧 힘이며, 절대로 속지 않을 수 있는 지혜였다.

바깥은 빠르게 어두워졌다.

두런두런 하인들이 나누던 이야기도 끊어지자 천막 안은 조용해졌다. 탁탁 소리 내며 타는 모닥불 사이로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단태는 사람들을 살폈는데, 그 하얀 양털 가죽이 깔린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 포도를 한 알씩 먹고 있는 반우현만 여유 만만한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반우현과 함께 온 하인, 하녀 들도 비교적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누천파의 하인들은 주인처럼 잔뜩 긴장해서 천막 입구를 노려보고 있었다.

“스승님은 아직 안 오셨죠?”

단태가 속삭였다.

“곧 오시겠지.”

여화는 명국영이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단태에게는 숨겼다. 힘없는 학자가 이런 곳에 남는다고 해서 도움이 되지는 않으니 차라리 그 선택이 나을지도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단태에게도 이곳을 떠나라고 하고 싶지만, 그런 말을 들을 아이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 말이 상처가 될 수 있을 만큼 단태는 성실하고 믿을 만한 아이였다.

다시 침묵이 천막을 덮었다.

족히 두세 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천막 중앙에 피워 놓은 모닥불의 장작이 ‘탁’ 소리를 내는 순간, 굉음이 천막 위에서 터졌다.

쾅!

천막은 흔들렸으나 붕괴되지는 않았다.

단태는 바닥에 선명하게 그려진 푸른색 선을 볼 수 있었다. 복잡한 문양은 마법진이었는데, 여화가 륜사의 침대에 그려 놓은 문양과 굉장히 비슷했다.

‘계승자님이 천막을 보호하려고 그려 놓은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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