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44화 (44/293)

<-- 44 회: 2-3 -->

천막 내부는 안전하다고 판단한 단태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또 한 번 굉음이 머리 위에서 울렸다.

콰쾅!

이전보다 더 큰 소리에 천막은 요동쳤고, 모닥불에서 불티가 위로 올라왔다.

굉음은 이어졌고, 그럴 때마다 천막에 갇힌 사람들 대부분이 움찔 몸을 떨었다. 점점 더 커지는 요동으로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도 덩달아 커졌다. 단태는 귀를 막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진동은 몸을 타고 마음까지 흔들고 있었다. 하인들도 고함을 지르며 바르르 떨었고, 하녀들은 아예 치마에 얼굴을 박고 울고 있었다.

굉음은 그칠 줄 몰랐다.

잠자코 앉아 있던 누천파가 일어섰다.

“여기서 탈출한다.”

그 말에 다들 누천파를 쳐다봤다. 미친 사람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천막이 무너질 정도로 강력한 마법 공격이 이어지는데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단태도 같은 눈빛으로 누천파를 바라봤는데, 약간은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탑의 계승자라면 무언가 특별한 능력이 있지 않을까?

누천파는 중앙으로 오더니 아직 타고 있는 모닥불을 주먹으로 쳤다. 그러자 모닥불의 중심이 아래로 푹 꺼지더니 두 사람이 동시에 내려갈 만한 구멍이 생겼다. 피어오른 먼지가 가라앉자 그 구멍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래쪽은 깜깜했다.

“거기로 내려가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나요?”

반우현이 비꼬듯 말했다.

“버틸 수는 있지요.”

차분하게 대답하는 누천파.

하인들이 미리 준비한 횃대에 불을 붙이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 구멍은 지하로 뻗어 있는 통로의 일부와 연결되어 있었다. 줄사다리가 내려졌다. 누천파는 반우현을 쳐다보며 정중한 태도로 구멍을 가리켰다. 내려가라는 뜻이었다.

“믿어요, 마둔수탑의 계승자.”

반우현은 하녀들과 함께 구멍 아래로 내려갔다.

누천파는 이제 여화를 쳐다봤다.

“……사부님을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같이 가야지.”

“……알겠습니다.”

여화가 눈짓하자 단태는 주머니에서 녹색 알약을 꺼내어 먹고는 륜사를 업었다. 줄사다리는 성인 남자를 업고 내려가기엔 너무 어렵고, 위험했다. 그러나 여화의 도움으로 겨우 아래쪽 통로로 내려선 단태는 의외로 통로가 넓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누군가 만든 이 통로는…… 꽤 오래된 것 같았다.

“이런 통로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나도.”

여화는 누천파가 어떻게 이 사실을 알았을까 궁금했다.

위에서는 계속 쾅쾅 소리가 나며 천막을 흔들고 있었다.

모두 다 내려오자 누천파를 선두로 이동이 시작되었다. 단태는 륜사를 업고는 횃불로 그림자 지는 통로를 걸었다. 여화가 도와주었지만 통로가 좁아지자 오롯이 륜사를 업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근육의 힘이 강해져도 곧 땀으로 범벅이 되고 말았다.

여화는 곧 누천파의 속셈을 깨달았다. 이 지하 통로는…… 미로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숨어 버린다면 하루나 이틀 정도로는 도저히 찾아낼 수 없을 터였다. 그러면 륜사가 깨어날 테고, 당고와 마법사들이 도착할 것이다.

누천파는 처음부터 이 지하에서 버티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결단력은 대단해. 역시 계승자인가?’

여화는 이제 갓 성인이 된 누천파의 행동에 감탄했다.

어둠 속을 말없이 걷는 사람들에게 들리는 소리는 헐떡이는 숨소리뿐이었다. 그리고 땀 냄새까지. 사람들은 묵묵히 걷고 있었지만 어디에서도 희망은 느껴지지 않았다. 천막을 때리는 마법 공격의 굉음은 이제 흐릿하게 들렸지만, 공포는 줄어들지 않았던 것이다.

단태는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 륜사를 꽉 잡은 손이…… 풀리고 있었다. 잘못하면 사부님을 놓칠 것 같았다. 죽어도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한 단태는 이를 꽉 물고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했다.

갑자기 멀리서 들리는 굉음이 뚝 끊겼다.

“멈춰!”

누천파가 외쳤다.

다들 꼼짝 않고 앞을 쳐다봤다. 무슨 일일까? 이동하지 않으니 숨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다른 사람들이 품은 공포의 냄새도 더욱 짙어졌다. 단태는 이 어두운 지하 통로에서 영영 빠져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자기 생각인지…… 앞에 있는 하인의 생각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힘들었던 것이다.

1분이 지난 것 같았다.

어쩌면 10분, 아니면 1시간이 흘렀을지도.

“앞으로.”

누천파가 명령을 내린 순간, 위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곧 뾰족한 것이 천장을 뚫고 내려왔는데, 나무뿌리였다. 그 뿌리가 몸에 박힌 하인 한 사람이 비명을 질러 댔다. 뿌리는 어깨를 뚫고 몸 안으로 들어갔다가 등으로 나왔고, 그 하인은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그 날카로운 뿌리 수십 개가 천장을 뚫고 내려왔는데, 앞쪽은 물론 뒤쪽에도 뿌리가 땅을 뚫고 내려왔다.

“녹근추! 다들 입 닫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라! 그래야 살 수 있다!”

누천파가 말했다.

숨을 헐떡이던 단태가 여화 옆으로 가서 속삭였다.

“……녹근추가 뭐예요?”

“진매록탑의 마법. 저 뿌리 말이야.”

단태는 뿌리에 꿰어 죽은 하인을 쳐다봤다. 마법으로 만든 나무뿌리에 죽은 것이다. 그 마법의 이름이 녹근추였다! 이 아래의 통로도 그런 마법 때문에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잠시 후, 뿌리는 꿈틀거리더니 위로 올라갔다.

“자, 다시 움직인다. 서둘러.”

누천파가 명령했다.

사람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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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국영은 시꺼먼 동굴을 응시했다.

“이런…….”

마치 어둠이 살아 있어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린 그는 불덩이가 폭발하며 내는 빛과 소리를 쳐다봤다. 이미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무런 준비 없이 용혈로 날아온 마둔수탑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터였다. 그동안 쌓아 둔 지식을 뒤져서 찾아낸 것을 누천파에게 알려 줬지만 지하로 숨는다고 해서 도망치거나 버틸 수는 없으리라.

아는 사람들을 죄다 만났지만 누구 하나 선뜻 도와준다고 말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안면이 있는 사람도 못 본 척했다. 다들 분위기로 마둔수탑의 위기를 알아차린 것이다. 마둔수탑을 도왔다가는 염종화탑, 진매록탑, 도위신탑 그리고 후령사탑의 분노를 살 수밖에 없었다. 명국영은 염종화탑, 진매록탑, 도위신탑은 그렇다고 쳐도 팔마탑 중 하나인 후령사탑까지 가세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다.

팔마탑은 국가가, 황제가 지정하는 여덟 개의 탑을 뜻했다. 황제가 바뀌면 팔마탑에 속하는 탑도 달라지는데, 현재 팔마탑은 현 황제 연문혁이 즉위 초기에 지정한 것이었다.

백방으로 돌아다녔으나 도움의 손길은 찾을 수 없었다.

낙담한 명국영은 결국 최후의 방법을 택했다. 그게 바로 용혈이었다. 최후의 고룡 암탄주가 머무는 장소, 바로 저 어둠 너머였다.

관리 등용 시험인 용문거를 볼 때보다 훨씬 더 떨렸다. 그때는 나라와 백성을 헌신하겠다는 결의로 시험을 봤지만 떨어진다고 해서 크게 피해 볼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저 어둠으로 걸어 들어갔다가 시험에 떨어진다면 그 대가는 죽음이었다.

고룡 암탄주는 누구든 찾아오는 이를 막지는 않았다. 그러나 찾아온 이가 자신의 질문에 적절한 답을 내놓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죽였다. 자격 있는 손님만 받겠다는 뜻인데, 한때는 스스로 지혜를 자부하던 수많은 학자들이 이곳으로 직접 찾아왔다가 후회 속에 죽어 갔었다. 마법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암탄주에게 인정을 받아 명성을 높이겠다는 대담한 사람들도 찾아왔는데, 대부분 죽음으로 끝이 났다.

물론 암탄주를 만난 사람도 있었다. 마법칠현이라고 이름이 난 그들은 암탄주에게 인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선물까지 두둑이 챙겨 밖으로 나왔는데, 그들 모두 사람들은 물론 당시의 지배자에게 존경을 받았다. 역사적으로 알려진 일곱 명 모두 마법사였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마법칠현이라고 불렀다.

“……내가 성공한다면, 마법팔현인가? 아니, 난 마법사가 아니니 학사일현이 될지도 모르겠군.”

명국영은 극단적인 결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대쪽 같은 결정을 내리지만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날뛰는 과는 아니었다. 그런 그가 저 어둠 너머 무시무시한 고룡을 만나러 목숨을 건 이유는 최근에 얻은 친구 때문이었다. 평생 단 하나의 친구만 얻어도 충분한 삶이 바로 사내의 일생이 아닌가. 명국영은 뜻이 맞고 말이 통하며 평생 그 교분을 나누고 싶은 륜사를 죽도록 내버려 둔다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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