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46화 (46/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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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만족할 만한 대답을 찾고 있었는데, 요즘 그는 평생 찾아 헤맨다고 해도 답은 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저 용은 자신보다 열 배, 그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살아왔고, 그러니 훨씬 더 오랫동안 그 질문과 씨름했을 터였다. 저 용을 지식으로 압도할 수는 없을 터, 명국영은 솔직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의지가 만물의 근본이오.”

“의지?”

코웃음을 쳤으나, 호기심이 깃든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생물은 물론 무생물까지 포함하여 모든 존재는…… 두 종류의 의지를 갖고 있소. 첫 번째는 자극, 즉 주위 환경에 대한 반응이오. 두 번째는 동기인데, 그건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기운 혹은 힘이라고 할 수 있소. 태산은 그 스스로 그 자리에 머무르는 동기를 가지고 있기에 절대 흔들림이 없을 뿐 아니라, 주위 환경에 대한 자극을 넉넉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에 다른 것들은 바뀌어도 변함이 없을 수 있는 것이오. 사람도, 용도 마찬가지여. 외부의 자극과 내부의 동기, 이 두 가지를 통하여 모든 것이 존재하고, 변화하고, 때로는 사라지오. 그러니 바로 자극과 동기, 즉 의지가 만물의 근본이 아니겠소?”

명국영은 호기롭게 외쳤으나 이 대답이 용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는 자신할 수 없었다. 세상에는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한 수백, 수천 가지의 대답이 존재할 수 있는 법이다. 어찌 보면 사람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제각기 다를 터였다.

“인간, 너의 의지는 무엇인가? 용혈로 들어온 너의 의지는 자극인가? 아니면 동기인가?”

용의 질문은 예리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소. 위험에 처한 친구와 제자 때문이니 자극이오. 그와 동시에 나 스스로 이곳에 들어오기로 결정했으니 또한 동기라고 할 수 있소.”

“자극이자 동기라, 재미있군. 허나, 내가 원하는 답은 아니다.”

“…….”

명국영은 다리 힘이 빠져서 주저앉았다.

눈이 다가오자 뜨거운 콧김이 느껴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곳에 주황색 눈동자가 명국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명국영은 위아래로 긴 타원형 눈동자 너머에 자리 잡은 광기와 폭력의 분위기를 읽 어냈다. 어떻게 죽을까? 찢겨서? 통째로 삼켜서 저 거대한 위에서 녹아내릴까? 입안에 넣고 뼈까지 씹어서 부러뜨릴까?

“만물의 근본은 용이다.”

“그게 무슨…….”

오만한 주장에 말도 안 된다고 따지려는 명국영의 반론을 묵직한 진동이 잘라 버렸다.

“만물의 근본은 인간이다.”

명국영은 당황했다.

“만물의 근본은 나 암탄주다. 또한 너 인간이다.”

“……무슨 뜻입니까?”

“모르겠느냐? 너라면 알 수도 있을 텐데.”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다는 뜻이오?”

“그렇다.”

“오만방자한 주장이라고 생각하오만.”

명국영은 저 대형 수레바퀴보다도 더 큰 주황색 눈을 노려보았다. 두려움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지만, 논리와 이론으로 단련된 머리는 이미 공포를 이기고 용과 논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없으면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미친 황제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 아닌가.

“무무는 내가 곧 세상이라고 하지 않았나? 인간은 무무를 지혜의 아버지라고 생각한다지? 그러면 무무의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나?”

“그, 그건 다른 뜻이오. 무무는 만물의 근본이 자신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소. 만물을 자신처럼 여겨야 더 아끼고 보호할 수 있다는 게 그 말의 핵심이오.”

명국영은 용의 오류를 지적했다는 사실에 뿌듯하기까지 했다.

“인간이 모조리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그 세상은 인간에게 의미가 있을 수 있겠나?”

“…….”

명국영은 할 말을 잃었다. 지성과 능력을 갖춘 최후의 용이 던진 질문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이론으로만 답하기엔 용족의 운명이라는 무게가 실린 질문이었다.

“대답해라, 인간.”

분노마저 느껴지는 목소리.

“……내겐 대답할 자격이 없소.”

“그래도 나는 대답을 요구한다. 이곳에 들어온 이상, 대답하지 않는다면 난 그대의 목숨을 빼앗을 수밖에.”

용은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더 다가왔다.

이제 명국영은 용의 체취까지 맡을 수 있었다. 비릿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향긋한 그 냄새에 기분이 이상했다. 고개를 흔든 그는 자신을 노려보는 용의 두 눈을 응시했다. 대답을 원한다면 해 주는 수밖에.

그러나 자신에겐 멸망 직전의 용이 원하는 답을 줄 능력도, 자격도 없었다. 치명적인 병에 걸려 죽어 가는 병자에게 위로 외에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것처럼.

순간, 용의 눈에서 명국영은 강렬한 의지를 느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멸망을 받아들인 눈이 아니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포기를 모르는, 무엇이든 해내려는 눈이었다. 이 어두운 공간에 들어앉아 죽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용은 죽어 가는 병자지만 죽고 싶지 않아서 발악하지도, 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평온하게 죽을 때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용은 그 이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국영은 진실을 깨달았다.

‘아! 이 용은 유언을 미끼로 사람들을, 특히 마법사들을 이곳으로 끌어모았어. 계획적으로! 대체 그 목적이 뭐지? 목적은 단 하나야. 용족의 파멸을 막는 것. 어떻게 막으려는 거지? 저 용뿐 아니라 그동안 죽어 간 많은 용들도 결국 풀지 못한 저주가 아닌가. 그렇다면 방법을 찾아낸 것일까?’

“용족 전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용에게 세상은 더 이상 의미가 없소. 허나…….”

명국영이 말했다.

“허나?”

“의지를 가진다면 용은 세상과 함께 계속 존재할 수 있을 게 아니겠소?”

“통찰력이 뛰어난 인간이군.”

“내 비록 부족한 지식과 지혜를 지니고 있으나, 당신이 원한다면 그 의지에 손을 보태고 싶소.”

명국영은 바깥에서 고초를 겪고 있을 륜사와 단태를 잠시 잊고 이 용의 속내에 관심을 쏟았다. 그는 어찌할 수 없는 학자였고, 본질적인 질문에 빠져드는 사람이었다.

“한낱 책 좀 읽은 인간 하나가 위대한 용을 돕겠다? 재미있군. 한 명의 인간의 도움으로 바뀔 운명이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바뀌었다.”

“탕무 신국 이래로 용과 인간의 역사는 투쟁으로 점철되어 왔소. 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무게 추는 인간 쪽으로 기울었소. 그 이유를 당신은 아시오?”

“…….”

용이 처음으로 침묵을 지켰다.

“인간과 달리 용은 협력을 모르오. 용은 단 한 번 죽어 갈 때 유언이라는 방식으로 협력을 할 뿐이오. 그 유언조차 없었다면 용은 오래전에 인간에게 제압당했을 것이오. 나는 인간 한 사람이 아니오. 나는 이 땅에서 고민하며 문제를 해결하고, 때로는 획기적인 질문을 만들어 낸 위대한 인간들 위에 서 있소. 그 거인의 어깨 위에 서서 먼 곳을,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오. 그러니…… 나를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족의 대표라고 여겨도 좋소. 물론 내가 인간족의 대표가 될 만큼 똑똑하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지만 말이오.”

명국영은 자신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뱉고 나서야 자기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에 놀랐을 정도였다. 이보다 더 오만한 말이 있을까?

“인상적이군. 좋아. 그대를 인간족의 대표라고 받아들이지. 나는 그대가 눈치챈 것처럼 의도적으로 마법사를 이곳으로 끌어 모았다. 그들에게 한 가지 선물을 주기 위해서지. 바로 멸망이다. 종족의 멸망을 맛보게 해 주려는 거다. 난 용의 쇠퇴와 멸망을 지켜보는 인간의 태도를 잊지 못한다. 용이 약해서, 그대가 언급한 것처럼 협력을 못해서 멸망한다고 말하는데, 인간이 똑같은 현실에 부딪힌다면 어떨지 보고 싶거든. 인간은 그 잘난 협력을 통하여 그 재앙을 이겨 내는지, 아니면 서로 살기 위해 싸우다가 용보다 더 빨리 멸망하는지 알고 싶다는 뜻이다. 자, 그대가 원하는 나의 뜻을 들었는데, 기분이 어떤가?”

“…….”

명국영은 말문이 막혔다. 용은…… 운명을 바꾸려는 게 아니라, 그 가혹한 운명에 인간까지 끌어들이려는 것이었다. 광기에 차서 함께 죽자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당장 나가서 알려야 한다.

몸을 돌린 순간, 명국영은 그 자리에 붙어 버렸다. 돌이 된 것처럼. 손가락도 까딱할 수가 없었다.

“책만 읽은 그대가 마법사조차 꺼리는 이곳으로 나를 찾아온 이유, 나는 알고 있다. 그대가 아끼는 사람들 때문이지. 인간 특유의 그 협력, 혹은 우정에서 우러난 용기겠지. 난 용기 있는 자를 높게 평가한다. 그래서 그대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그대를 위해 그들을 구해 주겠다. 허나, 그대는 용기를 내어 이곳에 들어온 것을 후회할 것이다. 왜냐하면 난 그대가 구하려는 자에게 인간족의 운명이라는 가혹한 짐을 지울 생각이니까. 그대 덕분에 그들은 인간족 전체의 운명이라는 책임을 짊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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