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47화 (47/293)

<-- 47 회: 2-6 -->

“……말도 안 되오!”

“그대는 그들이 운명의 굴레를 뚫고 나올 때까지는 망각의 늪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허나 마음 깊숙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책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들이 그대를 여전히 신뢰한다면 그대에겐 기회가 주어지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대의 삶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늙어서 죽을 것이다. 어쩌면 그대의 운명은 그들의 운명보다는 낫다. 아무것도 모르면 고통도, 번민도, 절망도 없을 테니까. 그대는 이곳에 잘 들어왔노라.”

용이 마음껏 비웃었다.

갑자기 공간이 밝아졌다.

명국영은 거대한 용의 머리를 볼 수 있었다. 주황색의 눈, 돌기가 난 새까만 피부, 거대한 몸집, 몸에 붙어 있는 거대한 날개 그리고 근육질의 가슴과 다리까지. 수백 배 커진 도마뱀 형상이지만, 저 눈을 보면 얼마나 교활한지 알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곧 용이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는데 명국영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이 힘이 되어 명국영을 옭아매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생생하고 충격적인 기억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명국영은 입술을 깨물며 그 힘에 저항했으나…… 용이 가진 능력은 해일처럼 명국영의 정신을 덮쳤다.

곧 명국영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자, 마지막 비행을 시작해 볼까?”

암탄주는 위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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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 울음소리가 지하 통로를 채우고 울려 퍼졌고, 저쪽에서는 불덩이가 벽에 부딪혀 폭발하는 소리가 진동했다.

단태는 륜사를 통로에 눕힌 후에 날뛰는 백곰을 상대하는 누천파와 그 하인들을 쳐다봤다. 왼손으로는 검을 휘두르고, 오른손으로는 마법을 펼치는 누천파는 눈이 시뻘건 백곰의 발톱에 휘청거렸지만 단련된 하인들의 공격에 백곰이 물러나자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뱀 떼가 다가오자 누천파는 쉬지도 못하고 검을 휘둘러야 했다. 반대쪽은 여화가 ‘수방천막’을 펼쳐 불로부터 일행을 보호하고 있었다.

‘마력석은 다 써 버렸을 텐데.’

단태는 그동안의 공부로 마법사가 마력석 없이 마법을 펼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마법은 옛이야기처럼 대가 없이 저절로 펼쳐지지 않는다. 마력석 혹은 약초 등의 재료, 혹은 그 마법사 자신의 몸이라는 대가 없이는 마법도 없다.

“사부님…….”

단태는 기대를 품고 륜사를 흔들었지만 미동도 없었다. 하루는 더 지나야 깨어날 것 같았다.

일행은 지하 통로에 갇힌 형국이었다. 앞에는 백곰과 뱀 떼가, 뒤에는 불덩이가 그들을 가둬 놓고 있었다.

그때, 뿌리가 벽과 천장을 뚫고 내려왔다. 이미 몇 차례 녹근추의 공격을 당한 터라, 예상했는데도 뿌리가 너무 빨라 몇 명의 하인이 거기에 꿰여 죽거나 크게 다쳤다.

뿌리 하나가 륜사의 가슴으로 향하자, 단태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렸다. 어깨를 파고든 그 뿌리는 단태의 쇄골을 부수고 등쪽으로 튀어 나왔다. 피와 함께 뼛조각이 뿌리의 끝에 매달려 있었다.

“윽!”

단태는 극심한 고통에도 여화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염종화탑의 마법사들에게 틈을 보일까 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고통은 끝도 없이 커지며 단태를 뒤흔들었다. 정신이 아득해져 륜사의 얼굴마저 가물가물했다.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단태는 손을 뻗어 그 뿌리를 꽉 쥐고 뽑았다. 고통에 무엇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그 상황에서 단태는 이 뿌리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전율에 깜짝 놀랐다. 륜사에게 인정받기 위해 엄포윤의 숨겨진 서랍에서 찾아낸 그 푸르스름한 약초 류천초를 쥐었을 때보다 백배는 더 강렬한 기운이었다.

륜사가 그런 식으로 마법을 펼치면 쫓아내겠다고 협박 같은 경고를 몇 번이나 강조했지만, 이대로 두면 마법을 펼친 대가로 죽어 버릴 여화와 여기서 뱀이나 곰에게 물려 죽거나 불타서 죽을 륜사를 생각한다면 그런 경고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단태는 판단했다. 무엇보다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하고 싶었다.

‘……해 보자.’

단태는 반쯤 정신이 빠진 상태로 그 뿌리를 양손으로 꽉 쥐었다. 그런 다음, 집중하여 바람을 일으켰다.

돌풍이 그 뿌리에서 흘러나와 통로 양쪽으로 뻗어 나갔다. 그 돌풍은 신기하리만치 누천파 일행은 건드리지 않고 통로를 막고 있는 곰으로 변신한 도위천탑의 장로 웅령산과 뱀을 부리는 왕은설, 맞은편을 맡은 염종화탑의 하쿠와 보천추를 날려 버렸다. 그들은 이미 사라진 풍계 마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또한 왕은설 뒤쪽에서 녹근추로 노천파 일행을 공격하던 녹윤은 갑작스레 마력이 한꺼번에 빨려나가자 화들짝 놀라며 마력석을 더 가져왔는데도 부족한 바람에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 단태가 더 집중하여 돌풍을 일으켰다면 그는 회복될 수 없는 내상을 입을 뻔했다.

단태는 숨을 헐떡이며 바람 때문에 놀란 사람들을 쳐다봤다. 부작용으로 하반신은 마비되어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머리카락이 불에 그슬려 엉망인 여화가 다가왔다.

“……너였니?”

“…….”

단태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는데, 마냥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는 느낌인데…… 그게 싫지 않았다. 심연으로 가라앉는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영원히 이런 상태였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때,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천장이 갈라졌다. 쩍쩍 갈라진 천장은……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위로 솟구쳤다. 산사태를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그 어마어마한 양의 흙덩이가 위로 올라가 버리자,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나타났고 신선한 공기가 통로를 채웠다.

단태는…… 자기가 죽었다고, 그래서 있을 수 없는 일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놀라지도 않았다.

별로 그득한 까만 하늘의 일부가 무언가로 가려져 있었다. 거대한 무언가가 공중에 떠 있었다. 달처럼 커다란 주황색 구체 두 개가 보였는데, 단태는 허공에 매달아 놓은 호박 두 개를 따다가 삶아서 꿀에 찍어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생각했다.

대기가 특정한 방식으로 흔들리자, 피와 땀 그리고 먼지로 범벅인 사람들이 위로 떠올랐다. 단태도, 륜사도 그리고 여화도 마찬가지였다. 단태는 이제 틀림없이 자신은 죽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깊은 지하 통로를 빠져나와 건물 3, 4층 높이만큼 떠오르자 하늘에 떠 있는 그 형체가 빛을 발했다.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뿜었는데, 그제야 단태는 그 정체를 깨달았다. 용이었다. 천마룡이 아이처럼 보이는 거대한 용이 하늘에 떠 있었다.

사람들은 한둘씩 아래로 내려갔다. 옥석 고르듯 용의 시선이 닿으면 당사자는 대부분 용의 날갯짓에 저 멀리 쓸려 간 천막들의 원래 자리로 내려갔는데, 사뿐히 내려져 전혀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누천파와 반우현, 륜사와 여화 그리고 단태만은 허공에 떠 있었다. 용은 그들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곧 여화가 땅으로 내려갔다.

다음은…… 여전히 잠든 륜사였다.

세 사람은 빛나는 용 앞에 떠 있었고, 용은 그 세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대들, 나의 상속자들에게 나의 유언을 남기노라.”

그렇게 말한 용은 섬광을 터트리며 공중에서 흩어졌다. 용의 몸은 순도 높은 마력석이 되어 조각조각 깨졌는데, 마치 눈이 내리듯 그 가벼운 마력석은 하늘에서 내려 땅을 덮었다.

그 순간, 깡마른 마법사가 튀어나와 세 사람에게 접근했다. 손이 새까맣게 변한 그는 후령사탑의 장로 막천무였다. 염종화탑의 요청을 받고 이곳에 왔지만 막천무는 실상 탑주의 비밀 지령을 수행하기 위해 이곳에 온 터였다. 그 명령은 바로 누구든 용의 유언을 받은 자를 죽여서 후령사탑으로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잠자코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린 그는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어리둥절 서 있는 세 사람에게 달려든 것이다.

깡!

막천무의 시꺼먼 손을 막은 사람은 황명거사 석장명이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손이 막천무의 검은 손목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폐하께서 직접 용의 유언을 받은 자들을 보호하라고 어명을 내리셨소.”

막천무는 어명과 탑주의 명령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다.

“어명을 거역할 작정이시오?”

“……몰랐소이다.”

사람들의 눈이 많았다. 이곳에서 어명을 어겼다가는 후령사탑의 미래가 흔들릴지도 몰랐다. 곰곰이 생각한 막천무는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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