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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장명이 명령하자 하인으로 위장하여 이곳에 와 있던 황실 마법사들이 마둔수탑의 사람들을 에워쌌다. 누구도 그들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황금색 지팡이를 바깥쪽으로 가리키며 주위를 날카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든 공격을 한다면 죽이겠다는 의미였다.
강력한 돌풍에 휘말려 통로 저 멀리까지 뒹굴다가 이제야 지상으로 올라온 염종화탑의 계승자 하쿠가 엉망진창이 된 모습 그대로 황명거사 앞으로 다가섰다.
“……저들을 넘겨주십시오.”
“어명일세.”
“하지만…….”
“염종화탑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군. 어명조차 우습게 여기니 말이야.”
“그, 그건 아닙니다만, 황명거사께서도 우리의 계획을 인정하셨잖습니까?”
“용의 유언을 받지 않았다면 난 개입하지 않았을 걸세. 허나, 상황이 달라졌네. 저들은 폐하의 어명에 의해 보호받게 될 테고, 누구든 저들의 몸에 손을 대는 자는 나 석장명의 손이 때로는 잔인해질 수 있음을 몸으로 경험하게 될 걸세.”
“…….”
인상을 구긴 하쿠는 물러서서 옷과 머리가 흙먼지로 엉망인 녹윤, 왕은설 등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책을 강구하려는 것이다. 마둔수탑의 계승자 누천파와 유타루체의 계승자 반우현을 사로잡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는데, 그다음이 문제였다. 벌집을 건드렸으나 꿀은 하나도 꺼내지 못한 셈이 아닌가.
단태는 누워 있었다. 편안했다. 감각이 돌아왔는데, 전혀 아프지 않았다. 발가락이 마음대로 움직였고, 손도 마찬가지였다. 사부님의 경고를 어기고 돌풍을 일으켰는데도 몸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아침처럼 가뿐했다. 그 추락하는 느낌은 사라지고 없었다.
“……단태.”
여화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태는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 누워 있어.”
“안 아파요.”
일어난 단태는 팔을 돌려 몸 상태를 보여 줬다.
“아까 그 바람, 네가 한 거지?”
여화가 속삭였다.
“……어쩔 수 없었어요.”
“몸은 어때?”
“아까는 마비가 와서 움직일 없었는데…… 아! 여기 상처가 사라졌어요! 아까 뿌리가 여기 어깨를 뚫었거든요.”
“내 몸도 그래. 고룡 암타주가 우리를 회복시킨 모양이야.”
여화는 몸의 잠재력까지 끌어 올려 수방천막을 펼치는 바람에 적잖은 내상을 입었는데, 올라와 보니 깨끗이 나아 있었다. 륜사가 깨어난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최고의 치료 마법이었다. 암탄주의 마법이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천마, 아니 그 이상일 거야.’
그런 생각을 하던 여화는 눈빛이 예리한 황실 마법사를 쳐다보다가 단태 앞에 섰다.
“……암탄주가 네게 용의 유언을 남긴 거야?”
“안타깝지만, 전 아니에요.”
단태는 고개를 저었다.
“왜?”
“유언을 받은 사람은 저 계승자 두 분이에요.”
단태는 손가락으로 누천파와 반우현을 가리켰다.
얼굴에 희열이 가득한 두 명의 계승자를 쳐다본 여화는 단태의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암탄주는 분명 ‘그대들’이라고 했고, 그대들에는 단태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왜 단태는 누천파, 반우현만 용의 유언을 받았다고 말할까?
그 의문을 풀고 싶은데,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생겼다.
륜사가 깨어난 것이다.
“아, 잘 잤다! 여어, 무슨 일 있는 거냐?”
하품을 늘어지게 한 륜사는 아이처럼 순진한 얼굴로 일어나며 여화에게 물었다.
여화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황제 알현
5층 건축물 높이로 치솟은 담장을 통과하자 대로가 나타났다. 수레 스무 대가 한꺼번에 굴러가도 될 만큼 넓은 길이 도시의 입구에서부터 중앙에 자리 잡은 황금으로 쭉 뻗어 있었다. 코끼리 열 마리가 이끄는 거대한 금마차 안에 탄 반우현은 창밖으로 펼쳐진 수도의 전경을 쳐다보며 희열과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용혈에서 얻은 보물로 인해 기뻤고, 곧 만날 황제의 반응으로 인해 불안했다.
용혈에서의 위기는 끔찍할 정도로 위험했다. 모여 있던 천막은 염종화탑의 불마법에 두들겨 맞아 폐허로 변했고, 달아난 지하에서는 진매록탑의 녹근추 때문에 죽을 뻔했으며, 도위신탑의 계승자와 장로가 추적하는 바람에 진퇴가 끊겨 꼼짝없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정체불명의 돌풍이 불어 적들을 날리지 않았다면…… 바로 그때, 고룡 암탄주가 마지막 순간을 불태우며 마법을 펼쳐 자신들을 위로 올리지 않았다면…… 죽거나 사로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반우현은 두 가지 의문에 사로잡혔다. 용혈에서 이곳 용금탄으로 오는 동안 그 의문을 풀려고 애를 썼지만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왜 거기서 돌풍이 불었을까?
왜 암탄주가 와서 마둔수탑 일행을 구해 주고, 왜 자신과 누천파를 상속자로 선택했을까?
사실, 한 가지 의문이 더 있었다.
반우현은 맞은편 륜사 오른쪽 창가에 앉아 용금탄을 보느라 정신이 없는 종자를 쳐다봤다. 어떻게 그 순간에 용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지 그녀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암탄주의 마법에 이끌려 허공으로 떠오르는 순간, 반우현은 이미 유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암탄주가 유언을 전할 상속자, 아니 상속녀로 자신을 택할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서 암탄주의 예리하고 거친 시선에도 의연하게 대처했고, 조금도 기죽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결국 세 사람이 선택되었고, 반우현은 그 셋 중 하나로 결정되었다. 내심 기뻐하는데, 머릿속에서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폭포수의 굉음 같기도 하고, 저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 같기도 했다.
‘그대들은 나의 유언을 받을 것이다. 그대들이 나와 약속을 한다면 나 고룡 암탄주의 유산을 받을 것이다. 나의 유산은 곧 용족 전체의 유산임을 그대들은 잊지 말라. 나와 약속을 하겠느냐?’
반우현은 무조건 하겠다고 대답하려 했으나 누천파가 앞서서 초를 쳤다.
‘그 약속이 무엇입니까?’
누천파의 목소리도 머릿속에서 울렸다.
‘용족의 부활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이다.’
그 내용을 듣자 반우현은 순간적으로 곧 죽을 암탄주의 신세를 동정했다. 마지막 용이 아닌가? 그 강하고 지혜로운 용족도 해결 못한 문제를 아직 경험도 부족한 인간, 게다가 종자까지 포함된 세 명의 인간에게 맡길 생각을 하다니. 짠하기 짝이 없었다.
‘약속합니다.’
이번에는 반우현이 빨랐다.
‘저도 약속드립니다.’
누천파였다.
그러나 왜 세 명 중에 하나로 선택되었는지 알 수가 없는 륜사의 종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암탄주가 물었다.
‘그대는 왜 대답하지 않지?’
‘……그 약속, 지킬 수 없어서요.’
그 종자였다.
반우현은 자신도 모르게 깔깔 웃을 뻔했다. 저 어리석은 종자는 용족의 유산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았던 용들은 마법을 추구하고, 기회가 닿는 대로 보물을 챙겨서 어디엔가 숨겼다. 용들이 숨긴 보물을 찾으려고 평생 오지를 뒤지는 보물사냥꾼도 꽤 많았다. 개인이 갖기엔 너무나 거대한 부를 상속받는 상황인데, 그까짓 죽어 가는 용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한다니.
‘약속하지 않는다면, 그대에게는 나의 유산을 줄 수 없다. 아니, 주지 않겠다. 그래도 고집을 내세우겠느냐?’
‘전, 할 수 없어요.’
종자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좋다. 나와 약속을 한 두 사람에게 나는 유산을 주노라.’
용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리는 순간, 반우현은 기이한 경험을 했다. 보이지 않는 기운이 머리 안쪽으로 파고들어 마치 하얀 종이에 글을 쓰는 것처럼 무언가 중요한 내용을 적고 있었다. 순식간에 책 한 권의 내용이 기록되자, 그 기운은 또 다른 책을 써내려갔다. 워낙 빨라서 책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수십 권, 수백 권의 책들이 머릿속에 새겨졌다.
그 기운이 빠져나가자 반우현은 헐떡거렸다. 그녀는 자신처럼 누천파도 숨을 몰아쉬며 멍한 표정으로 용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