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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화가 신중한 말투로 물었다.
“두 사람은 어제 폐하를 뵈었네.”
“……결과는요?”
“그건 내가 입에 올릴 내용이 아니라네.”
석장명은 선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곧 황제가 환관들을 대동하고 알현실로 돌아왔다. 금관에 황룡이 그려진 옷, 주황색 보석이 박힌 허리띠, 붉은 용이 수놓인 신발 등 품위가 흘러넘치는 복장이었다.
황제는 옥좌에 앉으며 손짓했다.
환관들의 안내를 받아 옥좌 앞으로 간 석장명과 륜사 일행은 엎드렸다.
“이미 그대들의 탑은 좋은 소식을 받았을 거야. 궁금하지?”
“궁금할 것이옵니다.”
황궁에 익숙하지 않은 륜사가 말이 없자, 석장명이 답했다.
“마둔수탑은 어제 부로 팔마탑의 일원이 되었어.”
“그, 그게 정말이옵니까?”
황제의 말이 륜사가 교육받은 예법을 어기고 고개를 든 채 물었다. 황제에게 그런 식으로 질문을 하자, 환관들이 륜사를 노려봤으나 륜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침 빈자리가 하나 있었거든. 계승자가 용의 유언을 받았는데, 그 정도는 해 줘야지.”
황제는 웃고 있었다.
정신이 반쯤 빠진 륜사는 여화더러 자신의 뺨을 치라고 했지만 여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결국 강요 끝에 단태가 륜사의 뺨을 때렸다. 정말 아픈지 륜사는 황제 앞에서도 껄껄 웃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사형 누마탄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폐하, 마저 말씀하시옵소서.”
이번에도 석장명이었다.
“아, 그렇지. 마둔수탑은 이제 수도 용금탄의 제팔마탑에 자리를 잡을 거야. 하지만 물의 도시에 있는 탑을 비울 수는 없지. 그러니 한동안은 두 집 살림을 하게 될 거야. 참고로 알아 둬.”
“……알겠사옵니다.”
륜사가 답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황제는 다음 일정을 위해 재촉하는 환관들에게 짜증을 내며 알현실을 빠져나갔는데, 다시 달려와 단태 앞에 섰다.
“아, 깜빡 잊었다. 여기, 용의 유언을 거절한 그대의 용기가 가상하여 주는 거다.”
“……성은이 망극하……셔야…… 할…… 겁니다.”
“크, 크크, 크하하하!”
단태가 놀라서 더듬거리며 한 말에 황제는 배를 잡고 웃어 댔다.
환관들이 다가와 황제를 알현실 밖으로 데려가자, 륜사와 여화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 과묵한 석장명조차 웃느라 기침을 했다. 시녀들까지 눈물을 흘리며 웃어댔다.
“성은이 망극하……셔야 할…… 겁니다?”
륜사가 다가와 놀렸다.
“……사부님.”
“넌, 참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다. 용의 유산을 거절하지 않나, 겁도 없이 폐하께 그런 실수를 하지 않나?”
륜사는 고개를 흔들었지만, 이 엉뚱함이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사부님, 그러면 우리는 수도에 있어야 하나요? 아니면 물의 도시로 가야 하나요?”
여화가 륜사에게 물었다.
“음, 당고가 이곳으로 올 테니…… 우리는 물의 도시로 가게 되겠지.”
씁쓸한 말투였다.
단태는 황제가 건넨 금색 주머니를 벌려 안을 들여다봤다. 놀라서 입을 벌린 그는 힘이 빠져 주머니를 놓쳤는데, 바닥에 떨어진 주머니에서 금덩이 세 개가 굴러 나왔다.
그 금덩이를 본 석장명이 주머니에 담아서 단태에게 건넸다.
“폐하의 마음이니 받아 두게.”
“고, 고맙습니다.”
“한턱 제대로 내야겠다, 너.”
륜사였다.
일행은 황제를 만나기 위해 알현실로 올 때와는 달리 빠르게 황궁을 벗어났다.
감촉이 좋지만 통풍이 잘 안 되는 비단옷을 벗고 평범한 차림으로 갈아입자 륜사 일행은 겨우 긴장을 풀 수가 있었다. 특히 륜사는 속이 탔는지 물을 벌컥벌컥 몇 잔이나 마신 후에야 길게 숨을 토해 냈다. 평범한 마차에 올라타자 륜사는 참았던 불평을 쏟아냈다. 황궁이 너무 비효율적이라느니, 알현이 너무 짧았다느니 온갖 것을 트집 잡았다.
“그래도 고맙구먼. 황제 폐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보면.”
석장명이었다.
그 말에 륜사는 속마음 중 일부를 꺼냈다. 여화와 단태가 옆에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둘 다 위기를 경험했으니 진실을 들을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다.
“폐하께서 염종화탑, 진매록탑, 도위신탑 그리고 후령사탑의 협잡을 승인했습니까?”
싸늘한 말투에 여화, 단태는 깜짝 놀랐다.
“……명불허전이군. 마둔수탑의 인물이라더니.”
“말씀해 보시죠.”
“폐하는 저 견고하고 광활한 황궁의 규모와 달리 고립무원 상태시네. 주위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거든. 그래서 어떻게든 세력을 키우기 위해 때로는 지름길을 택할 필요도 있네. 난 폐하의 밀명을 받고 그들이 하는 행동을 지켜봤네. 자네들을 공격하는 그 계획을 저지하지 않았으니, 날 어떻게 생각할지는 자네들 판단이지만, 폐하께서 직접 자네들을 그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으셨네. 그 점은 믿어도 좋네.”
“고립무원이라니요?”
여화가 물었다.
“승상 동예, 어사대부 패환, 대사마 좌영윤 그리고 환관장 평용구가 폐하를 가운데 두고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네. 폐하께서 즉위하신 지 벌써 6년인데, 아직도 병권은 좌영윤이 쥐고 있다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가? 동예, 패환, 좌영윤 등이 힘을 합치면 언제든지 폐하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황제를 즉위시킬 수도 있다는 걸세.”
단태와 여화는 물론 륜사까지 할 말을 잃었다. 제국의 주인이라는 황제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하다니. 특히 륜사는 황제가 아직 어려서 황궁에 문제가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석장명이 가감 없이 진실을 말하자 한 대 맞은 것처럼 충격이 컸다.
“폐하께서는 마둔수탑에 기대를 걸고 계시네.”
“……그렇군요.”
륜사는 그제야 사정을 이해했다. 황제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황제는 믿을 만한 도구로 마둔수탑을 선택한 것이다. 염종화탑, 진매록탑, 도위신탑 등 팔마탑의 일원이 될 만한 탑들을 살핀 끝에 마둔수탑을 낙점한 셈이다. 이제 마둔수탑은 황제에 의해 팔마탑 중 하나가 되었으니, 황제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터였다.
그러면 기존의 팔마탑과 갈등 관계가 될 테고, 충돌을 일으킬지도 몰랐다. 황제는 그 과정을 통하여 국가 운영의 주도권을 가져오려는 것이다.
어린 황제지만 심계가 놀랍도록 깊었다.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여화와 단태는 그런 부분까지는 깨닫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를 제게 하는 이유가 뭡니까? 전 이 녀석들을 데리고 물의 도시로 갈 사람입니다만.”
“내게도 나름대로의 조직이 있고, 그 조직을 통해서 조사를 했네. 마둔수탑엔 세 명의 용마가 존재하지. 그중 한 명은 탑주 누마탄이고, 다른 한 명은 자네, 마지막은 당고라는 마법사더군. 당고는 자네와 달리 세력 확충에 힘을 썼고, 물의 도시를 움직이는 실력자의 동생이더군. 그러니 자연스럽게 탑에 대한 영향력도 크겠지. 나도 자네가 아니라, 당고라는 마법사가 용금탄으로 와서 팔마탑의 일원으로서 황궁 출입을 하게 될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네. 허나, 난 개인적으로 자네에게 기대를 품고 있다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전 누군가의 기대를 품게 만들 만한 그릇이 못 되니까요.”
륜사가 차갑게 말했다.
그때, 단태와 여화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가 륜사의 귓속에서 울렸다. 원하는 사람에게만 목소리를 전달하는 마법 ‘전성’이었다.
[전음]-난 오래 버틸 수가 없네. 기껏해야 2, 3년일세. 난 자네가 날 대신해서 폐하의 곁을 지켜주기를 바라네. 자네가 약속해 준다면 내가 평생 모았던 지혜와 재물을 자네에게 주겠네. 우스꽝스럽지만 천마의 유산을 자네에게 준다는 거야. 물론 자네가 그런 유산에 흔들릴 리는 없다고 생각하네. 난 자네가 폐하를 지킴으로써 이 나라의 백성이 평안하도록, 전쟁의 참상을 겪지 않도록 애를 써 달라는 걸세. 그래도 안 되겠는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륜사가 말했다. 전성이 아니었다. 전성은 천마만 가능한 마법이었다.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