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회: 2-11 -->
석장명은 짧게 말했는데, 륜사는 그 목소리에서 진심을 읽어냈다. 이 남자는 어떻게 황실 마법사가 되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아, 제 부탁은 어떻게 됐습니까?”
“찾았네. 지금쯤 숙소에 와 있을 거야.”
“대체 어디 있었답니까?”
“놀라지 말게. 그 학사는 암탄주의 용혈 안에서 발견되었네.”
“……정말입니까?”
“왜 거기 있었는지는 직접 알아보게. 그럼, 난 황궁으로 돌아가겠네. 폐하의 옆을 오래 비울 수가 없어서 말이야.”
석장명은 달리는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명 선생님 말씀이죠?”
여화였다.
“다행이야. 다치지 않아서.”
“……명 선생님은 그 위기의 순간, 우리를 버렸어요.”
여화가 새침하게 말했다.
“사정이 있을 거야.”
륜사는 부드럽지만 힘 있게 말했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여화는 단태를 쳐다봤다.
“스승님은 우릴 버리실 분이 아니에요.”
단태는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무무비경≫의 핵심을 가르친 스승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암, 그렇고말고.”
“흥, 난 못 믿겠어요. 우릴 버릴 사람이 아니라면 왜 용혈 안에서 발견됐겠어요. 암탄주가 섬광과 함께 죽은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진지는 사부님도 아시잖아요. 흑심을 품고 거기 모인 마법사들이 떼를 지어 텅 빈 용혈로 달려갔어요. 보물이든 마법서든 뭐든지 건지기 위해서죠. 명 선생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을 거예요.”
여화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가서 확인해 보면 돼.”
륜사는 결론을 유보했다.
@
엄포윤은 귀족의 별장처럼 으리으리한 장원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뒷짐을 지고 커다란 정문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그는 후회에 후회를 거듭하고 있었다. 왜 용금탄에 남기로 했을까? 왜 용혈에 따라가지 않았을까? 생각할수록 아까워서 미칠 것 같았다.
용혈에 변고가 생겼다는 이야기는 이틀 전에 들었다. 가짜 손자인 단태를 걱정하긴 했다. 어디론가 사라지지는 않았을까, 다쳐서 쓸모없는 몸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였다. 그래도 단태가 부상을 입거나 죽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았다.
그러나 용금탄을 진동한 소문, 즉 용의 유산을 받은 상속자 중 하나가 단태라는 이야기에 엄포윤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일단 고룡 암탄주가 용의 유언을 남긴다는 소문이 있다고 해도 그게 인간에게 전해질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제국의 모든 마법사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용혈로 달려가지 않은 이유는 이제까지 그 어떤 용도 인간에게 유산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제 갓 종자가 된 단태가 어떻게 용의 상속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 충격이 가시자, 엄포윤은 경우의 수를 확인해 봤다. 단태가 용의 상속자가 된다면 단태의 공식적인 할아버지인 자신은 어떻게 될까? 단태가 스스로 진실을 말하지 않는 이상, 어쩌면 계속 할아버지 역할을 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용의 상속자를 손자로 둔 할아버지가 된다!
그 달콤한 상상은 곧 박살 났다.
단태는 용에게 선택을 받았으나, 스스로 용의 유산을 거절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용의 유산을 나눠서 받은 반우현, 누천파는 이미 유명인사가 되었다. 귀족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도 여기저기 모여 물의 도시 출신의 계승자 두 명이 천하에 다시없을 행운을 거머쥐었다면서 부러워했던 것이다.
비용을 아끼려고 좁고 더러운 곳에 숙소를 잡았던 엄포윤은 륜사 일행이 용금탄으로 오기를 눈이 빠져라 기다렸는데, 황제의 병사들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결국 수소문하여 륜사의 숙소를 알아내어 정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 갔다면…… 내가 상속자가 될 가능성도 있었을 텐데.’
엄포윤은 입맛을 다셨다.
그때, 낯익은 얼굴이 길을 건너서 다가왔다. 그 뒤에는 망토를 쓴 마법사들이 따라왔다.
“자네는?”
“……타마 엄포윤입니다.”
엄포윤은 당고 앞에 고개를 숙였다. 당고는 규율을 중시하는 사람이라 나이가 많아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자칫 잘못 행동하면 찍혀서 불이익을 보고 말 터였다.
“륜사는 안에 있나?”
“……아직 황궁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 한데, 왜 안에서 기다리지 않고 여기 있나?”
“그게……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저 장원은 황실에 속한 터라, 륜사가 오지 않으면 들여보내 줄 수가 없답니다.”
당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 역시 저 장원에 들어갈 수 없어서 꼼짝없이 엄포윤처럼 정문 앞에서 기다리게 생겼다.
“그 소문, 사실인가?”
돈덕실이 앞으로 나와 엄포윤에게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누천파 님과 반우현 님이 용의 상속자가 된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그 종자라는 아이는?”
당고가 물었다.
“용의 유산을 거절한 것 또한 사실인 듯싶습니다.”
“멍청하군.”
그렇게 말한 당고는 륜사를 기다리기 싫어 왔던 길로 돌아갔고, 돈덕실을 비롯한 마법사들이 뒤를 쫓았다.
그때, 장원의 정문 안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단태의 할아버지시죠?”
“그렇습니다만…… 아, 명국영 선생이군요. 거기 계셨습니까?”
“들어오시죠.”
명국영이 정문을 지키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자 엄포윤은 쉽게 장원 안쪽의 정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연못과 절벽, 숲이 어우러진 정원은 꽤 넓었다. 사슴 두 마리가 이쪽을 살피다가 통통 뛰어 숲 너머로 사라졌다. 성질 급한 나무 몇 그루는 벌써 단풍이 들고 있었다.
“왜 륜사 일행과는 함께 있지 않습니까?”
엄포윤이 물었다.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신을 차리니 용혈 안에 누워 있더군요. 왜 거기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
엄포윤은 그 이유를 즉시 깨달았다.
재물이 탐이 나서 거기 들어갔다가 몰려든 사람들에게 치여 기절한 모양이었다. 고상한 척하더니, 실상은 재물에 꼬이는 파리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도 평생 재물을 돌 보듯 하면서 살아온 그는 명국영과 대화도 나누기 싫었지만, 이곳에는 명국영밖에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 가운데, 두 사람은 풍경을 보며 서로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엄포윤이 황궁에서 황제를 알현하고 돌아올 륜사 일행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반면, 명국영은 왜 자신이 용혈에서 발견되었는지 고심하고 있었다. 그 전의 상황은 기억이 났다. 륜사와 그 일행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돌아다녔다. 아는 사람은 모두 찾아내어 만났는데, 결국 도움을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 최후의 방법을 선택했다.
문제는 그 최후의 방법이 무엇인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바깥이 시끌시끌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힐끔 쳐다본 다음, 정문으로 향했다. 정지한 마차에서 륜사와 여화 그리고 단태가 내려 장원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단태야!”
엄포윤이 달려가 단태를 안았다. 할아버지가 오랜만에 만난 손자를 반가워하는 것처럼.
놀란 단태도 억지웃음을 지었다.
“괜찮으냐? 다친 덴 없고?”
“……전 괜찮아요.”
어색해하는 단태.
엄포윤은 이제 단태를 놓아주고 륜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손자를 지켜 줘서 고맙다는 인사인데, 륜사는 자기가 한 일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겸손이라 판단한 엄포윤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지만 륜사가 단태의 마법사여서 든든하다고 생각했다.
‘륜사에게 단태가 풍혈지체라는 사실을 슬쩍 흘려야겠어. 그러면 륜사는 어떻게든 단태를 위해 단명의 위기를 넘길 방법을 찾겠지? 내가 나서는 것보다는 그게 나아.’
엄포윤은 기회를 엿봐서 적당한 때에 그 이야기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륜사는 명국영 앞에 섰다.
“몸은 좀 어때?”
“……나야 괜찮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