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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들어가지.”
륜사는 명국영과 함께 정원을 가로질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화가 쫓아가자 단태도 걸어갔는데, 엄포윤이 단태의 손목을 잡았다.
“손자와 잠시 얘기를 해도 되겠지?”
“그럼요.”
여화는 고개를 숙이고는 안으로 가 버렸다.
단태는 이 가짜 할아버지와는 말도 섞기 싫지만,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보일 수는 없었다. 눈치 빠른 륜사와 여화가 곁에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그런 분위기를 만들면 두 사람은 당장 진실을 알아낼 것 같았다. 그래서 단태는 웃으며 엄포윤 앞에 서 있었다.
“용의 유산을 거절했다면서?”
여화가 안쪽으로 사라지자, 엄포윤의 목소리가 돌변했다. 차갑고 무뚝뚝한 말투였다.
“……네.”
“왜 그랬지?”
엄포윤은 자신도 모르게 추궁하고 있었다. 단태의 어리석은 결정 때문에 마땅히 자신이 누려야 할 이익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겐 용족의 부활을 약속할 만큼의 능력은 없으니까요.”
“……그 용이 그런 약속을 요구한 거냐? 누천파와 반우현은 그걸 받아들였고?”
“네.”
“네가 용의 유산을 받았다면, 넌 당장 네 가족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대체 무슨 정신으로 거절한 거냐?”
진실을 아는 사람마다 그런 이야기를 하자, 단태는 입을 다물었다. 귀에 박혀, 잠들어도 꿈에서 들릴 것 같았다.
“황제 폐하께서는 뭐라고 하시더냐?”
“……마둔수탑을 팔마탑의 하나로 지정하셨어요.”
“뭐어?”
엄포윤은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사부님도 아시고, 계승자님들도 알고 계세요.”
“그, 그러면 마둔수탑이 이곳 용금탄으로 옮겨 오는 것이냐?”
“일부만 옮겨 온다고 들었어요.”
“……그래.”
엄포윤은 머리를 굴렸다.
마둔수탑이 두 개의 탑을 거느린다면 더 많은 마법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면 승급 시험의 관문도 넓어질 터, 잘하면 타마 꼬리표를 떼어 낼 수도 있을 터였다. 부마로 승급하면 더 많은 특권을 가지게 될 텐데. 그러면 더 좋은 성과를 낼 수도 있으리라.
물론 그는 저 녀석을 이용하여 천린풍탑을 찾는 일을 포기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미 그건 일생의 목표가 되어 버렸다.
“들어가 봐도 될까요?”
“그래, 가거라.”
엄포윤이 허락하자, 단태는 안채로 달렸다. 엄포윤에게서 벗어나자 답답함이 해소되었다. 방에 가서 쉬라는 여화의 말에 푹신한 침대가 있는 방으로 간 단태는 그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봤다. 기분이 이상했다. 노예로 팔렸다가 우여곡절 끝에 종자가 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황궁에 가서 황제까지 만났다.
엄마와 설희는 이 이야기를 믿어 줄까? 엄마는 꿀밤을 때릴지도 몰랐다. 설희는 그저 까르르 웃으리라.
단태는 주머니를 찾아서 금덩이를 꺼냈다. 이 정도면…… 그 매매소를 찾아가서 엄마와 여동생이 어디 있는지 알아낼 뿐 아니라, 두 사람을 자유인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물의 도시에 적당한 집을 마련해서 함께 살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앞날이 밝지만은 않았다.
바로 조금 전 만난 엄포윤 때문이었다.
종자로서의 삶은 만족스러웠다. 사부인 륜사는 엉뚱하지만 자상한 면모를 지니고 있고, 스승 명국영은 배울수록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수련사 여화는 친누나처럼 잘 챙겨 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단태가 노예라는 사실이 밝혀져도, 엄포윤의 손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져도 그들이 이전과 같을까? 단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셋 다 성격 좋고 올바른 사람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탑의 규율을 무시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규율에 의하면, 단태는 탑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처벌을 받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난 정말 마법을 배우고 싶은데…….’
황제 덕분에 돈이 마련되었으니 가족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한쪽 마음은 현재의 삶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요즘처럼 행복한 적은 없었다. 엄포윤을 보면 긴장하고 몸이 뻣뻣하게 굳지만, 여화와 륜사 그리고 명국영 때문에 이런 게 살아가는 즐거움이구나 싶었다.
‘그걸 다 버려야 하다니.’
눈을 감은 단태는…… 그리 편치 않은 잠을 잤는데, 가끔 신음을 흘렸다.
악몽이라도 꾸는 모양이었다.
*종자장
대규모 이동이 시작되었다.
범선 수십 척이 마둔수탑에서 가까운 운하에 대기하고 있었고, 평저선은 탑 안쪽의 선착장에서 실은 물품을 범선으로 옮기고 있었으며, 선원들은 기중기를 이용하여 물품을 범선으로 올리고 있었다. 탑의 이동에 동원된 평저선의 수만 해도 백 척이 넘었다. 마둔수탑은 탑이 세워진 이래 처음으로 팔마탑의 일원이 된 터라, 처음 경험하는 대규모 이동의 혼잡함에도 소속 마법사들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의 얼굴이 밝지는 않았다.
같은 탑에 속했던 사람들은 둘로 나누어졌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
당연히 떠나는 자들이 승자였고, 남는 자들은 팔마탑의 일원이기는 하되 그 즐거움을 수도 용금탄에서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남게 된 사람들은 왜 자신들이 남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드러내 놓고 불만을 보일 수는 없었다. 탑주가 최종적으로 결정했지만 당고와 그 세력이 이번 결정에 개입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어서 그들은 냉가슴을 앓을 뿐이었다.
하지만 남는 자들 모두가 낙심하지는 않았다.
“아아, 기분 좋다.”
넓어진 연구실 창가에 누워 아래를 내려다보며 하품을 한 륜사는 거치적거리는 당고와 그 패거리가 사라진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그렇게 좋으세요?”
여화도 웃는 얼굴이었다.
7할에 달하는 마법사와 수련사, 생도 그리고 종자들이 이 탑을 떠나는 바람에 륜사는 예기치 않게 탑주실을 차지했고, 그 덕분에 여화도 자신만의 방을 가지게 되었으며, 종자인 단태까지 조그만 독방을 배정받았다. 이제 륜사는 이 탑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
“좋지.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야.”
륜사는 느릿느릿 도시를 벗어나 강으로 진입하는 범선들을 쳐다봤다. 저 범선들은 보름, 바람 상황이 나쁘면 한 달이나 항해한 끝에 수도 용금탄의 새로운 보금자리에 도착할 것이다.
여화는 탑주실 입구 옆에 자리 잡은 단태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어때?”
“……좋아요.”
단태는 여화를 올려다봤다.
“요즘 고민이 있는 것 같다, 너.”
“아니에요.”
얼버무리는 단태.
“명 선생님은?”
“바람 쐬러 나가셨어요.”
“그래?”
여화는 여전히 명국영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잡아떼는 행동 자체가 싫었다. 차라리 용혈 안에 탐나는 게 있었다고, 그래서 용혈에 들어갔었다고 말했다면 이렇게 얄밉지는 않았을 텐데.
단태는 이번에 여화가 대규모 이동으로 반납된 소마선 중 한 대를 지급받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저, 소마선 좀 빌려 주시면 안 될까요?”
“그건 왜?”
“도시에 온 지 꽤 됐는데, 구경 좀 하고 싶어서요.”
“소마선 조종할 줄 알아?”
“……할아버지 덕분에 할 줄 알아요.”
단태는 거짓말도 능숙하게 했다. 이 도시에 와서 거짓말 하는 실력만 좋아진 것 같았다.
“그래? 좋아. 하지만 서쪽으로는 가지 마. 행여 길을 잃어 방책 너머로 나가 버리면 곤란하니까.”
단태는 그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귀동냥으로 이 물의 도시가 겉으로는 안전하지만 실상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쪽이라는 말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대부분의 집은 남쪽 혹은 동쪽으로만 창이 나 있었고, 도시의 서쪽 경계인 방책 근처로는 다들 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특히 그 방책 너머 광활한 호수는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아서 이상한 적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