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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두리번거린 랍살은 단태에게 다가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직 단태를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부르셨습니까?”
“저예요.”
“……네?”
“단태, 설마 잊은 건 아니죠?”
랍살의 눈이 커지자, 그 파란색 눈은 더 깊어졌다. 우물을 내려다보는 것만 같았다.
단태는 놀란 랍살을 데리고 빈 방으로 들어갔다.
“꼭 만나고 싶었어요. 전 마둔수탑에서 종자로 있어요.”
“……노예가 아니었나?”
“사연이 있어요.”
“아무튼 잘됐다. 진심이야. 그날, 널 그냥 거리로 보내고는 마음이 안 좋았거든. 잠도 좀 설치고. 내가 널 사지로 떠민 것 같아서 말이야.”
“아저씨 덕분에 살았어요.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랍살의 안색이 무거웠다.
“무슨 일 있어요?”
“……아무것도 아니다.”
“아저씨, 전 그저 종자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아저씨를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일단 말은 해 봐요.”
“시장이 새로운 법을 만들었더구나. 노예와 관련된 법인데, 그 법에 따르면 난…… 영영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
“왜요?”
“……진노예거든. 진짜 노예. 너처럼 돈 때문에 팔린 노예는 몸값만 내면 언제든 풀려날 수 있어. 하지만 전쟁 포로로 끌려 온 나 같은 사람은 이제 몸값을 낸다고 해도 돌아갈 길이 없어진 거야. 이 도시에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만 수천 명인데, 희망이 사라진 거지.”
“방법이 없을까요?”
“시장과 11인위원회가 마음을 바꾸지 않는 이상, 난 평생 여기서 썩다가 죽는 수밖에 없다. 아, 내가 널 붙잡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잊어라. 그저 늙어 가는 남자의 넋두리라고 생각해. 널 보니 내 마음이 좋다. 얼굴을 보니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처지가 좋아진 모양이다. 그렇지?”
“……그런 셈이에요.”
단태는 자신보다 더 비참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평생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는 랍살을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도와주고 싶은데 도울 방법이 없어서 답답했던 것이다.
신전을 나와 탑으로 걸어가던 단태는 멈춰 서 몸을 돌렸다. 운하 건너편에 시청이 우뚝 솟아 있었다. 마둔수탑보다 월등히 높은 탑이 시청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푸르스름한 탑은 물의 도시의 상징이자 권력의 핵심이었다.
시장이라는 사람은 대체 뭘 하고 있을까?
만난다면 꼭 한 번 물어보고 싶었다.
탑주실로 올라간 단태는 그 앞을 서성거리는 종자를 발견했다.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아! 나, 기억하지?”
“……너는?”
“창수야, 창수. 널 그 신고식에서 구해 줬던!”
“아!”
단태는 금세 창수를 알아봤다.
“나, 잠깐 볼 수 있어?”
“뭔데? 말해 봐.”
“이쪽으로.”
창수는 단태를 이끌고 차실 쪽으로 향했다. 주위를 살핀 창수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단태에게 말했다. 속삭임에 가까웠다.
“곧 종자장을 뽑을 거야.”
“종자장?”
“응, 배망식은 탑에서 쫓겨난 데다…… 많은 종자들이 이곳을 떠나 용금탄으로 갔잖아.”
“아, 그렇지. 그래서?”
“난 네가 종자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창수는 대뜸 본론을 꺼냈다.
“내가?”
단태는 의외라서 깜짝 놀랐다. 이제 한 달 정도밖에 안 된 종자인데 종자장이라니!
“자격이 있어. 충분히. 일단 용마 륜사 님의 종자잖아. 원래 종자장은 모시는 마법사의 지위가 높아야 해. 그래야 뭐든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결단력이 있어야 하는데, 넌 배망식 사건으로 모두에게 배짱을 보여 줬잖아. 누구도 네게 자격이 없다고 말하진 못할 거야.”
“……난 아직 어린데.”
“늙었다고 뭐가 나아져? 똑똑해진다고? 웃기는 소리. 어릴 때 멍청하면 늙어도 멍청하고, 어릴 때 똑똑하면 늙어도 똑똑해.”
그 말, 제법 그럴듯했지만 단태는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냥 종자로서 마법도 배우고, 지혜도 익히고 싶을 뿐이었다.
“난 별로야. 딴 사람 찾…….”
“종자장이 얼마나 권한이 많은지 알아? 한 달에 10마전이나 받아. 종자들을 동원할 수도 있고, 이 도시에 있는 조그마한 탑에 속한 종자들에게도 명령을 내릴 수 있어. 그뿐인 줄 알아? 도시 어디를 가더라도 종자장이라는 표식을 보여 주면 할인을 받아. 음식도 반값, 아니, 공짜로 먹을 수 있어. 옷도 싸게 살 수 있고. 아, 그렇지. 뱃삯은 무조건 공짜야. 자, 어때? 구미가 당기지? 맞아. 공식적으로 도시의 관공서는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고, 장부도 볼 수 있어. 왜? 종자장은 중요한 심부름을 많이 해서, 그런 권한이 탑의 규율로 정해져 있으니까. 관공서도 인정하는 권한이라구.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고 직접 종자장을 해.”
단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종자장이 되라고 했지.”
“그 전에…… 관공서에 대해 말했잖아.”
“아, 그거? 탑의 규율에는 명시되어 있어. 종자장은 시청을 비롯해서 각처에 있는 관공서의 장부를 볼 수 있거든. 아무리 콧대 높은 관리도 막을 수 없어. 막았다가는 탑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파면당하니까. 배망식 때문에 옷 벗은 관리가 서넛은 될걸.”
“그거, 사실이지?”
“아무렴.”
“좋아. 종자장, 어떻게 해야 될 수 있지?”
단태는 마음을 바꾸었다. 노예 등록소로 가서 장부를 읽을 수만 있다면 종자장 할아버지라도 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내가 알려 줄게. 나만 믿으면 돼.”
창수는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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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국영은 술잔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봤다. 무력하고 멍청한 놈이 거기서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 손이 떨리자, 놈의 웃음이 더 커졌다. 화가 난 그는 술잔을 입에 대고 단번에 마셨다. 그를 놀리던 녀석을 없애 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왜 용혈에서 발견되었을까?
정말 사람들의 의심처럼 진귀한 보물을 찾으려고 용혈에 들어갔던 것일까?
“술만 퍼마신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아요.”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고개를 든 명국영은 화려한 기녀의 복색을 한 여자를 발견했다.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족두리를 튼 그 여자는 색기가 흐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청명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명국영은 손을 들어 휘저었다.
“……내버려 두시오.”
“그렇게는 할 수 없어요.”
여자는 명국영 앞에 앉더니 하얀 손을 뻗어 명국영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 간단한 동작에 밴 우아함에 명국영은 깜짝 놀랐다. 진짜 기녀는 손짓만으로 사람을 홀린다더니.
“사람 잘못 보셨소. 난…… 가진 게 없는 사람이오.”
“제가 사람 보는 안목이 있어요. 그리고 명 선생께서는 가진 게 많은 분이세요.”
“……날 아시오?”
“륜사 님의 친구분이시잖아요.”
“아, 그렇군.”
명국영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이곳에서 술을 마실 수 있는 이유 때문이었다.
친구와 제자를 버리고 탐욕을 좇았는데도, 그 친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있다는 듯 아예 그 일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친구를 배신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음 같아서는 저 난간 너머 더러운 운하에 뛰어들어 죽고 싶을 정도였다.
그때, 기녀의 입에서 시원한 음색이 흘러나왔다.
운하에 비친 달무리가 내 마음으로 흘러드는구나
운하처럼 내 마음도 흐르는구나
저 운하는 서쪽으로 흘러가는데
내 마음은 왜 여기 괴어 날 괴롭게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