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56화 (56/293)

<-- 56 회: 2-15 -->

멋진 음률이었다.

용문거에 수석으로 합격한 이후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용금탄에서도 잘 알려진 기녀의 노래를 들었던 명국영은 눈앞의 여자가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녀는 실력이 높을수록 자존심이 강해서 손님을 가리기까지 했다. 자격을 갖추어야 만날 수 있는 기녀도 제법 있는데, 저 여자도 그런 명기 중 한 명인 듯했다.

그런 경계심과 달리, 이미 술기운에 젖은 그의 입이 멋대로 열리며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마음은 저 북동쪽의 용혈에 있도다

내 명예와 자존심도 거기서 오지 못하는구나

망각의 늪에 빠져 건질 수 없는 보물

그대는 왜 거기서 자신을 잃어버렸는가?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 노래였다.

여자는 박수를 쳤다.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 묻어나는 조용한 환호였다.

“제 이름은 소영, 조그만 그림자라는 뜻이에요.”

“……명국영, 나라를 밝게 만들라는 뜻으로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지어 주셨소.”

명국영은 소영이라는 여자가 어딘지 모르게 친근하면서도 불편했지만, 대화 상대도 없이 혼자 술만 퍼마시는 것보다는 한결 나았다. 술로도 풀기 어려웠던 고뇌가 노래 한 자락 부르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아서였다.

“오랜만에 진짜 손님이 저희 기루를 찾아오셨어요.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소영이 손을 들자, 한 남자가 다가와 허리까지 숙였다.

“문을 닫아라. 오늘은 술도, 웃음도 팔지 않는다.”

“네, 루주님.”

남자가 가 버리자, 명국영은 소영을 쳐다봤다. 어이없는 눈으로.

“설마 나 때문에 오늘 장사를 접은 거요?”

“걱정 마세요. 하루 장사 안 한다고 휘청거릴 곳이 아니니까요. 자, 술 한잔 드세요.”

소영은 그 고운 손을 뻗어 명국영의 잔에 술을 따랐다.

곧 구미를 당기는 음식들이 나와 탁자를 가득 채웠다. 처음 본 요리가 많았는데, 그중 압권은 중앙에 놓인 금색의 물고기 구이였다. 못생겼으나 살집이 두툼한 그 생선구이를 보는 순간 명국영은 혹시나 싶어 소영을 쳐다봤다.

“맞아요. 금룡어랍니다.”

“……한 마리에 수십 마전이나 된다는 진귀한 물고기가 아닌가?”

금룡어는 황제의 밥상에까지 올라간다는 물의 도시 최고의 특산물 중 하나였다.

“손님 대접을 이 정도는 해야지요.”

“내게 뭘 원하오? 난 그쪽을 도와줄 능력도, 마음도 없소이다.”

명국영은 잘라서 말했다. 아무리 자존심이 꺾여 이런 곳에서 술을 마신다고 해도 대쪽 같은 심성은 변하지 않았다.

“노래 몇 자락이면 충분해요.”

소영은 새침하게 웃었는데, 그 미소에 명국영은 가슴이 흔들렸다. 마음 밑바닥까지 출렁거렸다.

‘저런 여자는…… 조심해야 돼.’

마음속 경고와 달리, 명국영은 잠시 고뇌를 잊고 소영의 노래를 즐겼고, 또 흥이 나면 자신도 즉흥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오랜만에 마음을 터놓고 솔직해질 수 있어서 좋았다. 그 상대로 기녀라고 해도 지금은 상관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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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일과는 단조로웠다.

금색의 침대에서 눈을 뜨면 곧바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욕통에 몸을 담근다. 피로가 풀리면 밖으로 나와 부드러운 새 옷을 입고 그가 원하는 요리만 가득한 상에 앉아 느긋한 식사를 즐긴다. 잠시 가을이 야금야금 밀고 들어오는 거대한 정원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고, 그다음에는 황제가 마련해 준 서재로 향한다.

서재에서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내는데, 황제가 붙여 준 내관과 시녀가 적당한 때에 식사와 차 따위를 가져와서 누천파는 걱정 없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걱정 없이?

실상은 표현할 길이 없는 부담감으로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황궁은 낯선 자들의 시선에 노출된 공간이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그를 쳐다보는, 감시하는 듯한 시선이 있었다. 마둔수탑의 명예를 짊어지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물의 도시로 내려갔을지도 몰랐다.

누천파는 자기가 직접 쓴 책을 펼쳤다. 고룡 암탄주가 남긴 유산 중 하나인 그 책은…… 기이한 내용과 복잡한 형식이 뒤섞여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운…… 괴상한 책이었다. 마법에 대해 설명하는데, 정작 내용은 대부분 언어의 기원, 본질, 용법에 관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꽤 재미있었다. 언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누가 처음으로 언어를 사용했는지 별로 생각한 적이 없었던 그는 언어를 하나의 유기체, 즉 살아 있는 실체로 설명하는 책의 접근법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합목적성이니, 본능의 추론적 본질이니, 자의성과 타의성이니, 개념적 규정이니…… 까다롭고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들이 등장하자 분위기는 달라졌다.

몇 개의 문장을 읽는데도 머리가 아팠고, 단어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읽었던 내용은 처음부터 봐야 할 때도 많았다. 이렇게 어려운 책은 처음이었다. 마치 한 번도 접하지 않았던 외국어로 된 책처럼 느껴졌다. 이런 책을 쓴 작자의 의도가 궁금할 정도였다.

그래도 꾸준히 읽으니 어떤 내용인지 조금씩 알 것 같았다. 고룡 암탄주가 누천파의 머리에 새긴 수많은 책들이 공통적으로 포함하는 내용은 바로 언어였다. 그 책들은 하나같이 언어가 곧 마법이라는 주장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었다. 수백 권,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책들을 모조리 독파한다면 언어가 마법이라는 주장이 완성될 것 같았다.

‘그 용이 사기 친 거 아닌가?’

의심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누천파를 흔들었다.

생각해 보면 용이 왜 인간에게 유산을 남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용족이 그토록 오랜 세월을 거쳐 축적한 귀한 유산을 인간에게 주었을까? 용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천파는 자기가 그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없애 버릴지언정 인간에게만은 절대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조바심만 없다면 암탄주가 남긴 유산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도 즐겁고, 가치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누천파가 타고난 학자 체질의 소유자도 아닌 데다 탑의 계승자라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용의 상속자가 되는 바람에 마둔수탑은 제국 남쪽의 유타루체에서 벗어나 팔마탑의 일원으로 용금탄에 입성했다. 누천파는 이미 단순한 탑의 계승자가 아니었다. 황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바란다면 누천파는 용의 유산을 이용하여 무언가 가시적인, 눈에 확 띄는 결과를 내야만 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부르지 않을 때는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단단히 명령을 내렸던 누천파는 이제 막 들어온 내관을 노려봤지만, 그 뒤로 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안 봐도 뻔했다. 저 내관은 막으려고 최선을 다했으리라.

“무슨 일입니까?”

누천파가 일어서며 물었다.

“폐하를 뵙기 위해 황궁에 왔다가 그 유명한 용의 상속자를 꼭 만나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저는 건원빙탑의 계승자 빙소철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얼굴이 유난히 창백한 남자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은색의 비단에 주홍색 보석을 달아서 소박하면서도 화려한 옷차림이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악수를 거절한다면 순식간에 그 이야기가 황궁은 물론 수도 전체로 퍼져 나갈 터였다. 누천파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빙소철의 손을 맞잡았다. 예상대로 강렬한 냉기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누천파는 ‘염열기’를 펼쳐 그 냉기를 몰아냈다. 상대의 손바닥에 화상을 입히고 싶었지만 참았다.

“마둔수탑의 누천파입니다.”

“소문대로 대단하시군요.”

빙소철은 손을 놓더니 빙긋 웃었다.

다른 사람들도 손을 내밀었다. 저마다 지방에서 올라온 탑의 계승자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서 악수를 청한 것이다.

누천파는 혜천열탑의 혜금성, 평환탑의 환예흔, 천광탑의 천무휼, 은후성탑의 성주명, 유하탑의 동윤, 계묘신탑의 묘강적과 악수를 나누었다. 빙소철과 달리 나머지 계승자들은 누천파의 손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정도를 알아볼 뿐, 빙소철처럼 노골적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후령사탑의 계승자를 제외하면 팔마탑 중 여섯 개 탑의 계승자들이 이곳으로 몰려왔다는 사실에 누천파는 마음을 풀었다.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는 것 자체가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니까.

“축하드려요. 팔마탑의 일원이 되었으니 말이에요.”

평환탑의 환예흔이 웃자, 누천파는 마음이 흔들렸다. 환상의 마법으로 유명한 평환탑의 계승자다운 능력이었다. 미소로 사내의 마음을 훔칠 수 있다면, 마법으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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