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57화 (57/293)

<-- 57 회: 2-16 -->

‘적으로 삼으면 안 될 사람이야, 저 여자는.’

그렇게 생각한 누천파는 속내를 숨기며 환예흔을 쳐다보면서 미소 지었다.

“그래도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하시면 곤란합니다.”

오른쪽 어깨에 눈이 예리한 매 한 마리를 올려놓은 은후성탑의 성주명이 말했다.

“……당연하지요.”

누천파는 성주명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얼굴은 평범해서 길 가다가 마주쳐도 모르고 지나갈 것 같은데, 목소리는…… 한 번만으로도 각인이 될 만큼 좋았다. 사람의 마음을 끄는 묘한 느낌인데, 평환탑의 환예흔과는 달리 속임수와는 관련이 없었다.

“이렇게 팔계회의 일원이 된 셈인데,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한잔 하는 게 어때?”

체구가 큰 묘강석은 호탕했다.

반말인데도 친근해서 반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신기한 누천파는 팔계회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팔계회라니요?”

“앞으로 팔마탑을 이끌 계승자들의 모임이 바로 팔계회랍니다.”

얼굴이 동글동글해서 아이 같은 느낌을 주는 유하탑의 동윤이 말했다.

누천파는 계승자들 중에서 동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가장 독특한 탑의 계승자였던 것이다.

불의 마법을 펼치는 탑은 소규모까지 포함하면 백 개는 족히 넘었다. 물의 탑, 소리의 탑, 숲의 탑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시간의 탑은 제국 전체를 통틀어도 유하탑 하나뿐이었다. 탑의 규모나 세력으로 따지면 팔마탑 중 하위에 머무르지만 유하탑은 그 희귀성으로 인해 팔마탑에서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저 녀석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건가?’

누천파는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끔 신경 쓰며 동윤을 살폈다. 그러나 비범한 면은 찾을 수가 없었다.

“다들 여기서 수다나 떨 건 아니지? 오늘은 내가 쏠게. 자, 가자구.”

묘강석이었다.

누천파는 책을 덮고 그들을 따라나섰다. 용의 유산인 ‘언마’의 경지에 오르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마법계를 이끌 이들과 친해져서 나쁠 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해관계로 시작된 우정이지만, 잘만 키워 나가면 소꿉친구보다도 나을지 누가 알까?

‘반우현은 잘 있을까? 잘 있겠지, 아마도. 어딜 가더라도 빠질 녀석은 아니니까. 오늘은 술을 진탕 마실 테니 어쩔 수 없지만, 시간을 내어 반우현을 만나야겠어. 연금술 연구가 얼마나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니 말이야.’

누천파는 계승자들과 함께 커다란 마차에 오르면서 또 다른 세계가 자기 앞에 펼쳐지는 느낌을 받았다. 물의 도시도 한때는 거대해서 마둔수탑을 장악하는 것도 까마득한 미래처럼 보였는데, 이제 그는 더 큰 미래를 볼 수 있었다.

*맹세

종자장 시험이 시작되었다.

단태는 심호흡을 하면서 시험지가 오기를 기다렸다. 열 장이나 되는 시험지를 받아 들자 배 안쪽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침착하게 풀면 된다. 그동안 최선을 다했으니 실력이 부족해서 떨어진다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를 썼지만, 종자장이 아니면 노예 등록소의 장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기에 단태는 자신도 모르게 진지해졌고, 그만큼 더 긴장하고 말았다.

필기시험은 세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참가자는 15명이었고, 필기시험으로 7명을 뽑게 되어 있었다. 중간 이상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집중한 단태는 첫 번째 문제부터 풀었는데, 막히고 말았다.

‘……틀렸어.’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단태는 호흡을 조절하며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그런 단태를 힐끔 쳐다본 여화는 참가자 사이를 돌아다니며 혹시 있을지 모를 부정행위를 감시하고 있었다. 여화뿐 아니라 또 다른 수련사 두 명이 감독관을 맡아서 참가자 사이를 돌아다녔다. 여화는 다른 참가자 옆을 지나면서도 단태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아이가 부정행위를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지만, 왠지 그릇된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여화는 종자장이 된 사람들을 여럿 보았고, 그들의 말로도 목격했다. 하나같이 끝이 좋지 않았다. 이유도 나름대로 생각해 봤다.

종자는 그저 생도, 수련사를 거쳐 마법사가 되는 과정인데, 종자장이 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꿈과 목표를 이룬 것처럼 행동했다. 탑이 보장하는 종자장의 특권 때문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웬만한 마법사보다 권한이 강한 종자장의 권리로 인해 더 이상의 노력은 필요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을지도 몰랐다.

몇 번 단태에게 귀띔을 했었다. 종자장은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고. 그런데도 단태는 알아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일부러 무시했는지 몰라도 종자장 시험을 치고 있었다.

‘아까운 아이야. 저대로 내버려 둬야 하나? 아니면 억지로라도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까?’

여화는 요즘 단태 때문에 고민하느라 입맛까지 잃고 말았다.

시골에서 자라서 순박한 아이가 종자장이 되려는 이유는 뻔했다. 누군가를 밟고 일어선다는 그 느낌 때문일 것이다. 특권은 곧 지배를 뜻한다. 명령을 내리면 그대로 이행하는 사람들에게서 쾌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끼어들 문제가 아닐지도 몰라.’

오래지 않아 시험이 끝났다.

여화는 시험을 망친 듯 고개를 숙인 채 방에서 나가는 단태를 보며 따로 뜯어말리지 않아도 된다 싶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괜히 찾아가서 뜻을 꺾어 버리면 관계가 어긋날 수도 있어서 마음이 무거웠었다.

그러나 즉시 진행된 채점 과정이 끝나자, 여화는 심각해졌다. 평소 종자장 필기시험이라면 떨어지고 남았을 점수지만 단태는 7등으로 첫 번째 단계를 통과했다. 실력 있는 종자들이 수도 용금탄으로 대거 이동하는 바람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기분 좋겠어.”

수련사들은 여화의 속도 모르고 단태의 통과를 축하했다.

밖으로 나온 여화는 나름대로 계산을 했다. 두 번째 단계인 투표는 통과가 확실했다. 여기 남아 있는 종자들 중 단태보다 유명한 종자는 없었다. 비록 용의 유산을 거절했지만 그래도 종자 중에 그런 식으로 황제를 만난 사람은 탑의 역사를 통틀어 단태가 유일했다. 게다가 단태는 이 탑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륜사의 종자였다. 다른 종자들이 누구를 선택할지는 이미 정해졌다고 해도 무방했다.

문제는 세 번째 단계였다.

지팡이를 비롯해 약초를 비롯한 다양한 마법 재료까지 사용 가능한 그 대결에서 단태는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 아니, 무사히 대결 과정을 마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종자장 세 번째 단계의 수준을 고려한다면 단태가 맨몸으로 나갔다가는 크게 다칠 뿐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여화는 고민에 빠졌다.

단태를 도와줘야 할까? 아니면 가만히 지켜봐야 할까?

륜사가 아직 단태의 행보를 모른다는 점을 생각한 여화는 선뜻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시험 결과를 통보받은 단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때, 창수가 다가왔다.

“잘했어!”

“……아슬아슬했어.”

“그래도 통과했잖아. 그게 중요한 거지. 두 번째 단계는 내게 맡겨.”

“맡기라니?”

“최대한 많은 종자들을 만나야 해. 네가 누구인지를 알려야 하니까. 그래야 표를 줄 거야. 가능하면 앞으로 어떤 종자회를 이끌지도 이야기를 해야 하고. 그래서 내가 미리 준비한 건데, 들어 볼래?”

“……그래.”

단태는 떠밀리듯 대답했다.

창수는 기존의 악습과 폐단을 철폐하여 새로운 종자회의 구조와 운영 방식을 쉬우면서도 정확하게 알려 주었다. 전대의 종자장 배망식은 종자로부터 한 달에 1마전씩 돈을 거두어들인 모양이었다. 창수는 ‘악전’이라 불리는 그 상납금을 없애겠다고 하면 종자들이 좋아할 거라고 말했다.

단태가 깜짝 놀라자 창수는 더 신이 나서 어떤 문제점이 있었는지, 어떤 일 때문에 종자들이 피해를 보는지 등등 온갖 이야기를 다 했다.

그 설명을 듣던 단태는 창수가 종자회에 상당히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만 하면 두 번째 단계를 통과하는 건 문제없어. 자, 나랑 같이 가자.”

창수는 단태의 팔을 잡고 종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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