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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린 편이고 경험도 적으나 종자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솜씨나 용혈로 가는 동안에 보여 준 듬직한 태도는 눈에 띄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위기의 순간에 오히려 침착해지는 게 단태의 장점이라고 했던 여화의 칭찬에 륜사도 동의했다. 륜사는 당고가 죽일지도 모르는데 침착하면서도 차분하게 자신이 나중에 갚겠다고 말한 단태를 잊을 수 없었다. 그런 아이라면 이번 일을 맡겨도 될 것 같았다.
‘그래, 일단은 해 보자.’
륜사는 즉시 단태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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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마선을 타고 탑 밖으로 나온 단태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야.”
종자장이 되려는 자신을 혼내려고 사부님이 부른 줄 알았더니 심부름 때문이었다. 종자장 시험 두 번째 단계도 무사히 통과했다. 최다 득표로 통과한 것이다. 그 사실을 알리자 창수는 자기가 통과한 것처럼 기뻐했다. 그 덕분에 단태도 즐거웠다.
그러나 사부님을 생각하면 그런 기분은 사라져 버렸다. 륜사를 누구보다 잘 아는 단태는 종자장 시험을 봤다는 사실만으로도 불호령이 떨어지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들키면 한바탕 난리가 나겠지만 당분간은 이대로 조용히 지냈으면 했다. 륜사는 종자 주제에 명예를 탐한다면서 벌컥 화를 낼 텐데, 그때 가서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속도를 내며 운하 위를 질주하는 소마선 위에서 단태는 서늘한 공기를 뚫고 달리는 쾌감을 만끽했다. 복잡한 생각을 잊을 만큼 좋았다. 소마선에 혼자 탄 자신을 응시하는 사람들의 눈에 서린 선망의 느낌도 즐겼다. 마법사 혹은 탑에서 자격증이 발급된 사람만이 소마선을 조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커다란 물길에서 벗어나 골목처럼 좁은 물길로 들어서자 단태는 집중하여 배를 몰았다. 배가 볼록 튀어나온 아이들이 커다란 눈으로 지나가는 단태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고, 그 옆에는 앞니가 빠진 노인들이 쭈그려 앉아 단태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살길이 막막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단태는 말없이 그 거리를 벗어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으로 접어들었다. 주소를 확인했지만 몇 번이나 헤맨 끝에 도착한 곳은 후미진 문짝이 달린 조그만 선착장이었다.
그 주소였다.
소마선을 말뚝에 묶은 단태는 녹슨 문을 열었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는데, 수리를 하지 않은 듯 여기저기 금이 가 있었다. 올라가는 동안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만큼 삐걱대는 소리가 컸다. 그래도 참고 올라가자 복도가 나왔다. 복도 끝으로 가서 문을 여니…… 낡은 응접실이 보였다.
기다란 안락의자는 가죽이 군데군데 뜯겨 있었고, 벽에 걸린 액자는 으스스한 그림이어서 응접실의 분위기는 우중충했다. 그곳과 어울리지 않는 중년의 여인이 안락의자 왼쪽 끝자락에 앉아 있었다. 손가락에 있는 굵은 보석 반지, 살찐 목에 걸린 반짝이는 목걸이, 화려한 비단 옷까지 꽤 사는 집 부인 같았다.
단태는 반대쪽에 가서 조용히 앉았다.
“여기가 탐사 철무님 사……무실 맞나요?”
그 여자는 단태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단태 같은 사람과는 말도 섞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곧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가방을 챙겨 서둘러 철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는데, 마음이 급했는지 문을 완전히 닫지 않아 안쪽에서 대화가 흘러나왔다.
“남편 바람 핀 거 때문에 왔지? 관심 없으니까 가슈.”
“……어떻게 아셨어요?”
“뻔하지 뭐. 아무튼, 난 그런 일 생각 없으니까 돌아가서 남편을 믿고 기다리거나, 아니면 시법원에 가서 이혼 재판이라도 하슈.”
“……500마전, 드리겠어요.”
“안 한다니까! 꺼져!”
철무가 소리치자, 여자는 겁에 질려 뚱뚱한 엉덩이를 흔들며 밖으로 나가 쿵쿵 계단을 내려갔다.
단태는 어쩌면 철무에게 혼나서 달아난 사람들 때문에 계단이 그 지경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괴팍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저렇게 멋대로 소리치는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냥 나가자. 사부님께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해하실 거야.’
살금살금 나가려는데,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단태는 잠시 망설였다. 모른 척 나갈지, 아니면 저 무지막지한 남자를 만나 볼지.
‘일단, 만나는 보자. 그래야 사부님 앞에서 부끄럽지는 않을 테니까.’
단태는 문을 열고 그 방으로 들어섰다.
대머리 남자는 손에 악기를 쥐고 있었다. 대나무에 구멍을 낸 그 악기를 붕붕 소리 나게 휘두르던 그는 힐끔 단태를 쳐다봤는데, 시선이 꽤 오랫동안 머물렀다. 무언가 이상한지 남자는 악기를 내려놓고 단태 앞으로 걸어왔다.
단태는 언제 버럭 소리를 지를지 몰라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너, 뭐냐?”
“……단태인데요.”
“이름 말고, 정체.”
“심부름 왔는데요.”
“시골에서 자라서 꽤 어렵게 살았을 텐데, 어떻게 탑으로 들어갔지? 종자가 되기 쉽지 않은데 말이야. 몸만 보면 멋모르고 이곳으로 왔다가 노예 상인에게 가족을 빼앗긴 사람 같은데, 또 옷차림 따위를 보면 부유하게 살다가 마법사가 되려고 탑에 들어온 종자 같은걸. 그래서 묻는 거다. 네 정체가 뭐냐?”
“……심부름 왔다니까요.”
어떻게 노예 상인에게 가족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아냈을까? 단태는 떨리는 마음을 숨기고 철무에게 종이를 건넸다.
종이를 받은 철무는 금세 읽더니 표면이 갈라진 책상 너머 의자에 앉았다. 더 이상 종이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너, 첩자냐?”
황당한 단태는 인상을 구겼다.
“아니, 아니야. 그럴 리는 없어. 이런 아이를 들여보내 봐야 사소한 정보만 알아낼 수 있으니까. 그럼, 정체가 대체 뭐지? 이거 참, 알아내기가 힘드네. 거기, 가만히 있어! 그래, 가만히.”
“……네.”
하품을 하던 단태는 황급히 입을 다물고 서 있었다. 예리한 시선에 정육점 고깃덩이가 된 기분이어서 그리 썩 느낌이 좋지는 않았다. 당장 나오고 싶은데, 두 가지 이유로 남아 있었다. 륜사의 부탁이라서, 그리고 저 남자가 어떻게 진실을 알아냈는지 알고 싶어서.
“음, 아무래도 어린 나이에 평범치 않은 삶을 산 모양이구먼. 그렇지?”
“거기 적혀 있는 분의 사정을 자세히 알아봐 주세요.”
단태는 모른 척했다.
“좋아. 이번 건, 받아 주지. 이유는 하나야.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졌거든.”
철무는 가느다란 눈으로 단태를 노려봤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시선이었다.
“…….”
단태는 괜히 찾아왔다 싶었다.
“이틀 후에 다시 찾아와.”
“……네.”
밖으로 나온 단태는 소마선에 올라타고 질주하면서 철무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엔 그냥 화를 부르는 무식한 사람 같았는데 생각해 보니 사람을 척 보고 사정을 알아내는 능력이 범상치 않았다. 그러니 사부님이 찾아가서 일을 맡기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엄마와 설희를 찾아 달라고 해 볼까? 황제 폐하가 주신 돈이라면 일을 맡길 수도 있을 텐데. 안 돼. 잘못하면 그 사람이 내 사정을 알아낼 테고, 그러면 가족을 찾기도 전에 탑에서 쫓겨날지도 몰라. 무엇보다도…… 그 사람을 믿을 수 없잖아.’
단태는 돌아가는 길에 처음 이 도시로 와서 짐을 풀었던 그 집으로 가 봤다. 도양도, 엄마와 설희도 거기 없었다. 정말 도양이 팔아 버리고 수도로 떠난 것이다.
아쉬워서 노예 등록소 근처도 맴돌았다. 건장한 체구의 경비대원들을 보자마자 제발이 저려 달아난 단태는 일단 종자장 시험 세 번째 단계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보름 남았으니 최선을 다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탑으로 돌아가는데, 문득 스승님 생각이 났다. 한동안 탑에는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며칠 전에 여화와 사부님 사이의 대화를 우연히 들은 후에야 스승님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취영루라고 했지, 아마?’
취영루는 도시의 서쪽 구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악마의 거리라고 불리는 암방거로 북쪽인데, ‘차망로’라는 지역이었다. 취영루뿐 아니라 수십 개에 달하는 기루가 몰려 있는 장소에는 소마선과 쪽배, 제법 큰 배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 저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