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60화 (60/293)

<-- 60 회: 2-19 -->

단태는 푸른색 지붕에 금으로 문양을 칠한 기루 앞으로 소마선을 몰고 갔다. 배를 댈 곳은 제법 많았다. 소마선의 밧줄을 말뚝에 묶은 그는 계단을 딛고 올라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고급스러운 나무 기둥 수십 개가 떠받친 지붕 아래 칸막이가 나눠진 방들이 들어차 있었는데, 입구에는 건장한 체구의 사내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무슨 일이니?”

연지를 과하게 발라서 빨갛게 변한 입술이 보였다. 그 입술이 스스로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명국영 스승님을 뵙고 싶어요.”

“스승님? 그러면 혹시 네가 단태니?”

“네, 제가 단태예요. 스승님이 어디 계신지 아세요?”

“따라오려무나.”

단태는 그 입술 빨간 여자를 뒤따라갔는데, 매끄러운 붉은색 비단 안쪽에서 요염하게 씰룩거리는 엉덩이가 인상적이었다. 그 엉덩이는 손가락으로 찔러 보고 싶을 만큼 탱탱했다. 바늘로 찌르면 팡 터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단태는 키득 웃었다.

“왜 웃니?”

“말하면 화날 거예요.”

“난 쉽게 화내는 사람이 아니란다.”

“스스로 화 잘 내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 세상에 없어요.”

“그러니?”

단태를 눈여겨 본 여자는 다시 몸을 돌려 단태를 명국영이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문을 열자 방은 술 냄새로 진동했다.

단태는 술과 안주가 놓인 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명국영을 쳐다봤다. 인사불성이었다. 한편으로는 실망스럽고, 한편으로는 불쌍했다. ≪무무비경≫을 알려 주고, 광릉 축제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던 그 박식하고 지혜로운 남자는 어디로 가 버렸을까? ‘생각’이 무엇인지 가르치면서 열정을 보여 주었던 사람은 어디로 숨어 버렸을까?

단태는 스승이 술을 마시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배신한 게 부끄러워서? 정말 부끄럽다면 술을 마시는 대신 무언가 더 열심히 해서 그 수치를 씻어야 한다. 그게 진정한 반성이 아닌가.

“한심하지?”

그 여자가 말했다.

“……나가 주세요.”

“왜? 기분 나쁘니? 내가 너의 스승님을 비웃어서?”

여자는 놀리는 듯한 어조였다.

“아주머니.”

“뭐? 아……주머니?”

“아들도 딸도, 없죠?”

“그, 그래. 없다.”

이번엔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무슨 말이지? 그럴 줄 알았다니?”

“두꺼운 화장으로 피부를 가렸지만 자글자글한 주름을 완전히 숨길 순 없어요. 아무리 봐도 엄마와 비슷한 나이 같은데, 어떻게 아들뻘인 저를 안내하면서 엉덩이를 그렇게 흔들 수 있어요? 이곳으로 오면서 제가 얼마나 난처했는지 아세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 애먹었어요. 스승님이 지금은 잠시 상심하셔서 술을 마시고 계시지만, 아주머니가 함부로 말할 분은 아니에요. 지금은…… 그러니까…… 잠시 숨을 고르고 계신 거예요. 더 힘차게 뛰기 위해 움츠리는 개구리처럼 말이에요. 그러니 아주머니는 이 방을 나가셔서 그 이상한 걸음걸이나 고치세요. 애를 쓴다면 올해 안에는 고칠 수 있을 거예요. 아셨죠?”

“…….”

여자는 할 말을 잃었다.

그때, 어느새 깨어나서 흐릿한 눈으로 단태와 여자를 쳐다보던 명국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억눌린 웃음이 아니라, 그동안 쌓였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날려 버리는 박장대소였다.

“하하하하, 소영 자네가 한 방 먹었구먼.”

“그 스승에 그 제자네요. 정말 한 방 제대로 먹었어요. 그런데 선생께서도 한 방 먹은 것 같은데요?”

“정신이 번쩍 들었지. 날 멍청한 개구리라고 했으니 말이야.”

“스승님, 저는…….”

단태가 급히 끼어들었다.

“아니, 네 말이 옳다. 난 그저 숨을 고르고 있었던 거다. 너무 오래 움츠려서 다리에 쥐가 나 버린 개구리인 거지. 네 말 덕분에 쥐가 사라진 모양이다. 그러면 일어서 볼까?”

명국영은 일어서다 비틀거렸다. 단태가 가서 재빨리 부축하자 명국영은 단태를 의지하며 설 수 있었다.

“그동안 고마웠소.”

명국영은 소영을 쳐다봤다.

“자주 들러 주세요.”

“그러지.”

단태는 명국영을 부축해서 취영루 밖으로 나왔다. 소마선에 명국영을 태운 후에 탑을 향해 배를 모는데, 주저앉아 배의 난간에 팔을 올린 명국영이 단태를 보며 말했다.

“넌 내가 밉지 않느냐?”

“네.”

“난 륜사와 너, 여화를 버리고 달아난 사람이다. 왜 미워하지 않는 거지?”

“미워할 여유가 제겐 없거든요.”

단태는 진심이었다. 그동안 명국영의 존재 자체를 잊고 있을 만큼 마음이 바빴던 것이다. 오늘도 예기치 않게 탐사 철무를 만나고 돌아오지 않았다면 명국영을 찾으러 취영루로 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

명국영은 충격을 받았다.

아까 개구리 표현보다 백배, 아니 그 이상의 충격이었다. 이쪽은 배신을 자책하며 술이나 퍼마시고 있는데 아직 성인도 안 된 녀석은 배신 따위는 신경 쓸 여유가 없다니. 힘껏 주먹을 날렸는데 상대는 맞았는지도 모르고 지나가 버리는 꼴이 아닌가. 이보다 더 자존심 상하는 순간도 없을 것 같았다.

순간, 문양 위에 서서 소마선을 조종하는 단태가 훨씬 크게 느껴졌다. 아직 자라는 중이라서 작은 체구인데도 부쩍 성장한 것 같았다.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왜 고룡 암탄주가 두 명의 계승자와 더불어 저 아이를 선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순간, 명국영은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었다.

“왜 용의 유산을 거절했니?”

“너무 자주 들어서 지겨운 질문이에요.”

“날 여전히 스승이라고 생각한다면 한번 대답해 주려무나.”

그 말에 단태도 진지해졌다.

“……그 용이 불쌍해서요.”

“불쌍해서?”

“제겐 그 용의 소원을 들어줄 능력이 없어요. 용족의 부활이라니, 너무 어마어마하잖아요. 죽어 가는 마지막 용을 속여서까지 무언가를 얻고 싶지 않았는데, 사실 요즘엔 후회하고 있어요.”

질문에 답한 후에 단태는 소년답게 얼굴을 구겼다. 짓궂게 장난을 치는 것처럼.

“……그게 전부냐?”

“솔직히 말하면, 저도 모르겠어요. 왜 거절했는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받아들일지도 몰라요. 뭐, 돌아가 봐야 알겠지만요.”

“그래, 알았다.”

갑자기 솟구친 술기운에 배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한바탕 토해 낸 명국영은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저 녀석, 분명히 용이 불쌍하다고 했다. 맞다. 마지막 용이니 불쌍할 만도 했다. 한데 용혈에 모인 마법사들 중에 고룡 암탄주를 진심으로 불쌍히 여긴 사람이 있을까?

‘한 명도 없어. 내 목을 걸고 장담할 수 있지. 다들 뭔가를 얻기 위해 거기로 왔으니까.’

명국영은 바람을 맞아 머리카락과 소맷자락이 흔들리는 단태를 쳐다봤다. 단태는 성인이 되려면 앞으로 몇 년은 더 있어야 하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그렇다면 왜 저 녀석만 암탄주를 불쌍히 여긴 거지? 어려서? 거기엔 단태 또래의 종자들, 아이들이 꽤 있었다. 그런데도 암탄주는 그 녀석들 대신 단태를 택했어. 왜? 아이들은 암탄주를 보기만 해도 오줌을 지릴 정도로 무서워하니까. 전설에 등장하는 용 중에는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도 있으니까. 뭐, 이 도시의 서쪽에도 그런 용이 있으니 전설이라고도 할 수 없지. 그러니 용을 보고 공포에 질려 꼼짝도 못하는 게 정상이야. 그러면 왜 단태는 그 거대한 용을, 잔혹해 보일 수 있는 용을 불쌍히 여길 수 있었지?’

답을 구하고 싶은데, 찾을 수가 없어서 답답해진 명국영은 또 한 번 배 밖에 토하고 말았다.

‘용 앞에 선 인간은 결국 무서워하면서도 용을 이용하려고 해. 순수함을 잃지 않은 아이들은 두려워하고, 어른들은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거지.’

어느새 소마선을 멈춘 후에 다가온 단태가 등을 두드렸다.

“괜찮으세요?”

“……좋아지고 있다.”

“스승님,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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