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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국영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단태의 눈빛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저 따뜻하면서도 힘 있는 눈빛…… 어디선가 봤다. 기억이 나지 않을 뿐인데, 어디서 봤더라……?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마세요. 그러면 다시 설 수 있어요.”
단태는 장당전의 노예 랍살에게 들은 이야기를 스승 명국영에게 들려주었다.
“……고맙다.”
그렇게 말한 순간, 명국영은 저 소년의 눈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닮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아무리 잘못해도 항상 아들의 편에 섰던 아버지의 눈이었다.
명국영의 등을 충분히 두드린 단태는 다시 조종석으로 돌아가 소마선을 탑으로 몰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어떻게 소년의 눈에 아버지의 그 느낌이 깃들 수 있지?’
명국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단태의 눈빛에서 아버지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왜 그런지 묻고 싶지만, 그래 봐야 단태는 무슨 말인지 이해조차 못할 것 같았다. 보물을 쥐고 있는데도 그게 보물인지 모르고 있을 테니까. 아버지의 눈빛 어쩌고 했다가는 미친 사람 보는 것처럼 쳐다볼 게 뻔했다.
‘타마 엄포윤 어르신의 손자라고 했는데, 왜 저리 어른스러울까? 마치 부모 없이 혼자 자란 아이 같잖아.’
명국영은 스승이랍시고 제자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정말 궁금해졌다. 대체 어떻게 자랐기에 벌써부터 아버지의 분위기를 드러낼 수 있을까?
그렇다고 딱딱하게 굳어서 어른인 척 흉내 내는 아이도 아니었다. 단태는 자연스러웠다. 그 나이에 어울리게 행동하면서도 속이 깊어서 흔들리지 않는 아이 같았다.
깊은 물 같달까.
그 순간, 명국영은 노련하게 소마선을 움직이는 단태를 보며 전율을 느꼈다.
저 아이의 재능은…… 단순히 마법을 다른 사람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익히는 게 아니었다. 진정한 재능은…… 저 아이의 그릇이었다. 당고 같은 강력한 마법사를 죽이는 대신 미래에 빚을 갚아 주겠노라고 말할 수 있고, 비록 죽어 가지만 최강의 용이라 할 수 있는 암탄주를 불쌍히 여길 수 있으며, 술독에 빠져 사는 스승을 위해 기루까지 직접 찾아와 스승은 그저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깊고 넓은 그릇이야말로 단태의 진정한 재능이었다.
아직 어린데 저런 그릇이라면…… 잘만 성장한다면 천하를 담을 수도 있으리라.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은 명국영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 명국영, 하늘과 땅 앞에서 맹세하노라. 이제부터 내 삶은 저 아이를 위해 사용하겠노라. 저 아이가 천하를 담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노라. 이 맹세를 깨뜨린다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도 나 명국영은 아무 불평도 하지 않으리라!’
마음이 가벼워졌다.
깃털처럼.
무거운 뭔가가 떨어져 나간 것만 같았다.
“스승님, 얼굴이 훨씬 좋아졌어요.”
“≪무무비경≫은 다 외웠느냐?”
단태의 얼굴이 굳었다.
“내일 오전부터 시작하자꾸나.”
“……네, 스승님.”
단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실패자의 얼굴을 하고 있던 스승이 범접하기 어려운 특유의 위엄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단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술은 마시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탑이 보였다.
그제야 단태는 종자장 시험의 세 번째 단계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스승과의 공부 때문에 대결을 준비할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종사장 시험이 끝난 다음에 취영루로 찾아갈걸. 너무 일찍 찾아갔어.’
단태는 후회로 한숨을 내쉬었다.
*추명
창수는 따라오라는 거친 말에 정색으로 반응했다.
“왜요?”
“왜요? 잔말 말고 따라오는 게 좋을 거야. 망현이라는 그 못생긴 녀석을 다시 보고 싶으면 말이야.”
“…….”
창수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망현은 어린 남동생이었다. 다섯 살에 불과한 아이의 이름이 왜 저 명운이라는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올까? 곧 그 의미를 깨달은 창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명운의 아버지는 물의 도시를 이끄는 11인위원회의 일원이었다. 대대로 도시를 운영하는 최종 의결기구인 11인위원회를 맡아 온 가문 덕분에 명운은 종자가 되자마자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었는데 그동안은 당고의 위세를 등에 업은 배망식 때문에 숨죽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당고의 오빠인 당현추에 비하면 명운의 아버지 명연철은 손색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당고와 그 패거리가 용금탄으로 사라지자 명운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명운만 그런 움직임을 보인 게 아니었다. 11인위원회의 일원인 백율만해의 아들 백율가진 또한 이번 종자장의 자리를 노리고 시험에 참가했고, 필기시험과 투표의 단계를 어렵잖게 통과했다.
명연철과 백율만해가 서로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명운과 백율가진 역시 만나기만 하면 싸웠는데, 창수는 웬일로 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에 두려움을 느꼈다.
동생을 걱정한 창수는 두 사람을 따라서 창고로 들어갔다. 청소 도구가 놓여 있는 그 창고는 그리 크지 않아서 세 사람이 들어가자 꽉 찬 느낌이 들었다.
“……동생은 괜찮아요? 어디 있어요?”
“네가 하기에 달렸다.”
눈이 가느다란 명운이 말했다.
“제게 왜 이러세요?”
“몰라서 물어?”
백율가진이 다가와 창수의 명치에 주먹을 박았다. 신음을 흘리며 무릎을 꿇은 창수의 뺨을 사정없이 내려치는 백율가진을 명운이 막았는데, 일부러 세 대나 맞을 동안 기다린 후였다. 뺨에 불이 난 창수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자 명운은 혀를 차며 옆으로 와서 앉았다.
“친구를 잘 사귀어야지, 안 그래?”
“…….”
“나도 동생이 있어. 동생을 잃으면 얼마나 가슴 아플지 누구보다 잘 안다는 말씀이야. 그러니 내 말 들어. 네 동생도 안전하고, 너도 좋고.”
“……말해 보세요.”
“너도 짐작은 하겠지? 난 어디서 굴러먹다가 들어왔는지도 모르는 녀석이 종자장의 자리에 오르는 꼴은 못 봐. 감히 앞으로 11인위원회를 이끌 우리를 제치고 개뼈다귀가 종자장이 된다구? 말도 안 돼. 그러니 넌 그 녀석을 없애면 돼.”
“……없애라구요?”
창수는 깜짝 놀라 눈을 껌벅거렸다.
“그래, 죽여라.”
백율가진이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러면 망현이라는 녀석, 다시 볼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이번엔 명운이었다.
“……륜사 님께 가서 말씀드릴 거예요.”
창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래? 원한다면 해 봐.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우린 못 건드려. 11인위원회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불쌍한 네 동생은 형을 잘못 둔 죄로 악어에게 먹힐 거야.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마. 흔적은 남을 테니 말이야. 팔다리가 뜯긴 몸통이 둥둥 운하를 떠돌다가 너희 집 앞에 멈출 테니까. 내가 장담할게.”
창수는 몸을 떨었다. 분노와 공포가 섞였는데 어느 쪽이 큰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 녀석을 죽이고 싶으면 맘대로 해.”
“……단태가 종자장 자리를 포기하면은요? 그래도 죽여야 하나요?”
“죽여. 놈은 우리를 모욕했어. 감히 종자장 자리에 욕심을 낸 것부터가 죽을죄를 범한 거니까.”
백율가진이 차분하고 잔인하게 말했다.
할 말을 잃은 창수.
자기가 나서서 설득하지 않았다면 단태는 종자장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터였다. 결국 자기가 단태를 죽게 만든 셈이었다. 창수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이거, 우유에 꿀과 함께 타서 먹여. 그러면 끝이야. 넌 의심받지 않을 거야. 그 약, 무색무취인 데다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어서 의심할 사람도 없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창수는 힘없이 대답했다.
몇 번의 회유와 협박이 오간 후에 창수는 창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복도는 아까와 같았는데, 어딘지 모르게 생소했다. 명운이 건넨 약병에는 하얀 가루가 들어 있었다. 우유에 섞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만다는 명운의 말이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