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63화 (63/293)

<-- 63 회: 2-22 -->

대체 왜?

이유도 없이 누군가의 삶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던 그는 단태라는 아이를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 과감히 투자하리라 마음먹었다. 꽤 많은 돈이 생겼으니 오늘은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이나 마셔 보리라. 만취하고 깨어나면 두통에 시달리겠지만 찝찝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철무가 사무실 문을 닫고 단골 술집으로 향할 무렵, 단태는 소마선을 몰고 암방거로와 차망로 등 도시의 서쪽 지역을 돌아다녔다. 노예로 팔린 엄마와 설희 그리고 위연미를 만날 수도 있다는 조그만 희망 때문이었다. 그 희망으로 탑 밖에 나올 때마다 그 지역을 돌아다니곤 했다. 그러나 오늘도 헛수고였다.

탑으로 배의 방향을 돌린 단태는 사부인 륜사에게 보고할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는데, 생각할수록 억울한, 분통이 터지는 상황이어서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고 말았다. 조율진은 보기 드문 깨끗한 관리였다. 칭찬을 못할망정 그런 식으로 증거를 조작하여 처벌을 받게 할 수는 없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그 가족은 얼마나 답답할까?

거기까지 생각한 단태는 탑으로 가는 길에 조율진의 집을 들르기로 마음먹었다. 중간급 관리의 집은 대부분 도시의 남쪽인 ‘관정로’ 지역에 있는데 조율진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귀족과 고위 관료의 거주지인 ‘상아별로’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관정로는 깨끗한 지역이었다. 관정로 입구로 들어서자 냄새부터 달라졌다. 악취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자유롭게 숨 쉴 수 있었다.

조율진의 집, 쉽게 찾았다.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건장한 남자들이 소리치는 여자를 무시하고 집 안에서 값나갈 만한 가구 따위를 밖으로 꺼내 와 평저선으로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가 바지를 잡고 늘어지자 남자는 무심한 눈으로 여자를 쳐다보더니,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잡고 흔들었다. 한 움큼의 머리카락이 뜯겨 나가자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남자들이 세간을 옮기는 동안, 그 여자는 아직 어려서 무슨 일인지 몰라 겁먹은 아이들을 안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단태는 그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운하에 소마선을 띄운 채 열린 문 너머 짙은 절망이 내려앉은 뜰을 살피는데, 문득 빚 때문에 끌려가던 위연미의 언니가 생각났다. 그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다행히 조율진의 아내는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아직 희망을 붙잡고 있는지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한참 동안 단태는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가슴 안쪽에 무거운 돌 같은 게 들어앉은 느낌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물의 도시 유타루체는 외부인, 즉 아무것도 모르고 도시로 들어선 사람들에게만 가혹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 도시는 마둔수탑 출신 마법사이자 청렴한 관리에게도 저런 식으로 냉혹했다.

단태는 깊고 거대한 절망 앞에 선 기분이었다.

그때, 그림자가 단태를 덮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단태는 천마룡을 발견했다. 날개를 펼친 채 도시 상공을 선회하는 천마룡은 용의 착륙장이자 거주지인 도시의 북서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아!”

단태는 즉시 소마선을 움직여 ‘용경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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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룡에서 내린 반우현은 기다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오랜 비행 끝에 땅을 밟으니 더없이 기분이 좋았지만, 물의 도시 특유의 냄새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용금탄에서는 맡을 수 없는 악취였던 것이다.

“피곤하시죠? 직접 오실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반우현이 유일하게 신뢰하는 하녀 와타가 말했다. 와타는 커다란 가방을 직접 들고 서 있었다.

“한동안은 오기 힘들 것 같아서 와 본 거야. 여긴 내 고향이잖아.”

“아가씨, 주제넘은 짓 해도 될까요?”

“항상 그런 짓 하고 있잖아. 농담이야. 말해 봐.”

“용금탄은 위험해요. 용의 유산과 관련된 연구는 여기서도 하실 수 있잖아요.”

와타는 걱정을 담아서 말했다.

진심을 잘 알기에 반우현은 고마움을 담아서 대답했다.

“가진 자들이 끔찍하게 경쟁하는 용금탄은 네 말대로 위험천만한 곳이긴 해. 바로 그 때문에 난 거기 있고 싶어. 왠지 모르게 피가 뜨거워져서 말이야. 여기 유타루체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었어. 그리고 황제 폐하의 명령이잖아. 안 그래도 용의 유산을 상속했다는 이유로 칠성시에 속한 도시들이 유타루체를, 나를 경계하는데 황제의 뜻을 저버려 그들에게 우리를 흔들 핑계를 주고 싶진 않아.”

“……제 생각이 짧았네요, 아가씨.”

“아니, 앞으로도 주제넘은 짓은 계속해도 돼. 내 생각이 전적으로 옳은 건 아니니까.”

반우현은 용혈과 황궁에서의 경험 덕분에 시야가 넓어졌다. 혼자의 힘으로는 결코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누나!”

동생이 달려오고 있었다.

반우현은 오랜만에 보는 반중치를 꽉 안아 주었다. 몇 달 동안 못 봤는데 키가 자라 있었다. 아직 어리지만 조금씩 남자다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 선물은?”

“넌 선물부터 찾니?”

“그게 젤 중요하잖아.”

“와타.”

반우현의 말에 와타는 가방에서 자동인형을 꺼내어 반중치에게 건넸다. 팔뚝만 한 그 거무스름한 자동인형은 대단히 정교해서 실제로 사람의 동작을 흉내 낼 수 있었다.

“이게 뭔데?”

“동작을 기억시킬 수 있는 인형.”

“그래서?”

“직접 보면 알 수 있을걸.”

반우현은 자동인형의 등에 손을 대고 꾹 눌렀다. 그러자 인형은 스스로 움직였다. 팔을 뻗고, 다리를 차올리는 동작이 의외로 섬세했고, 절도마저 느껴졌다.

“이건……?”

“맞아. 반극권이야. 너 어디까지 익혔니? 아직 ‘땅의 장’이지?”

반중치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만 보면 반극권 이야기를 꺼내어 주눅 들게 만드는 누나에 대한 불만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 가문 대대로 전해지는 무술과 상관없는 체질로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그 무술을 익히라고 들들 볶아 대니 참기 어려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땅의 장은 어렵지 않아. 그러니 이 자동인형을 보면서 열심히 수련하면 통과할 수 있을 거야.”

“……알았어.”

반중치는 시무룩한 얼굴로 그 묵직한 인형을 들고 조그만 선착장으로 가 버렸다.

어린 남동생의 표정을 본 반우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반우현도 잘 알고 있었다. 몸 쓰는 것보다 머리 쓰는 것을 선호하는 동생은 용문거를 목표로 삼았는데, 아버지는 전혀 몰랐다. 알았다면 반중치가 붓도 잡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유타루체를 지배하는 가문 출신이 가진 것 없는 자들이나 응시하는 용문거 시험을 본다는 것 자체가 도시의 수치라고 아버지는 생각할 테니까.

“아가씨, 그 짐을 벗고 싶으세요?”

와타가 물었다.

“……짐이라니?”

“계승자 말이에요.”

“이번엔 제대로 주제넘은 말이구나.”

장난기를 버린 반우현은 도시의 계승자이자, 와타를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주인으로서 위엄을 지니고 말했다.

“죄송해요, 아가씨.”

“두 번 다시 입에 올리지 말거라.”

“네, 아가씨.”

와타가 하인들을 움직여 천마룡에 실린 짐을 다 내릴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전혀 없었던 반우현은 먼저 선착장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반우현이 아끼는 소마선이 말뚝에 묶여 있었다. 청색과 녹색이 잘 섞여 시원하면서도 독특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너는?”

“륜사 님의 종자, 단태예요.”

“그래, 맞아.”

반우현은 반가움과 어색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 생각 때문에 고생했다고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문득문득 왜 단태는 용의 유산을 거절했을까 의문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럴 때면 왠지 모르게 희미한 죄책감마저 느꼈다. 따지고 보면 단태만 그 용을 속이지 않았던 셈이다.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단태는 본론을 꺼냈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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