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70화 (70/293)

<-- 70 회: 2-29 -->

번운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앞으로 추명을 이끌 윤강에게 힘을 실어줄 요량으로 질문을 던졌다.

“……유천주가 방책을 무너뜨리고 도시로 들어온다면 우리 하층민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추명도 영향력을 잃을 겁니다. 현재 경제 규모로만 따지면 도시 전체의 수입 중 4할 정도를 도시의 서쪽이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물론 공식적인 집계에는 잡히지 않는 수입이 대부분입니다만, 시장을 비롯해 11인위원회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저는 그들이 하층민을, 우리를 두려워해서 이런 계획을 꾸몄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전적으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의견이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번운재는 한쪽에 잠자코 앉아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탐사로서의 자네 의견은 추명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러니 솔직히 말해 보게나.”

번운재는 철무의 속내를 듣기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 끄집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가 만약 수룡 유천주를 불러들일 계획을 세운 장본인이라면, 바로 이 자리에 첩자를 잠입시켜 추명의 동태를 살필 겁니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철무는 노골적으로 이 비밀 회의실에 첩자가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다들 서로를 쳐다보는데, 그 시선엔 짙은 의심이 담겨 있었다.

“철무는 그저 가능성을 언급한 걸세. 우리는 항상 첩자의 존재를 대비해 오지 않았나? 그러니 평소와 다를 건 없네. 그보다 아직은 가설이니 속단은 이르네. 그래도 확인은 해 봐야겠지. 이제부터 추명의 전력을 다해 이 일을 최우선으로 다룰 걸세. 우리의 운명이 달린 일이니 말일세.”

번운재는 분위기를 다잡고 회의의 방향을 재설정했다.

“알겠습니다.”

다들 고개를 숙이며 수장에 대한 예를 표했다.

구체적인 지시 사항을 윤강에게 일임한 번운재는 밖으로 나와 악취 섞인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는 상아별로의 상쾌한 공기보다 이곳의 냄새 나는 공기가 더 좋았다. 적어도 이곳에는 가식이나 위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뒷짐을 진 채 서쪽 방책을 쳐다봤다. 횃불이 곳곳에 놓여 그 윤곽을 드러낸 방책은 견고했지만 수룡이 날뛴다면 소용이 없을 터였다. 그는 투쟁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몸으로 느꼈다. 위기인 동시에 기회였다. 이번 기회를 잘만 잡는다면 도시의 주인이 달라질 것이다. 어쩌면 반가의 지배가 끝나고 새로운 가문이 도시를 다스리게 될 지도 몰랐다.

번운재는 죽기 전에 그런 세상을 보기를 간절히 빌었다.

*동지

만년필로 서류 아래에 서명을 하던 시장 반명은 고개를 들어 딸을 쳐다봤다. 기어 다니면서 까르르 웃던 게 엊그제 같았는데, 이제 도시의 내부 사정을 예리하게 알아낼 만큼 성장해 있었다. 세월이 빠르긴 빠른 모양이었다.

“그 일에서 손 떼거라.”

“……네?”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아버지도 그 일을 알고 계셨군요.”

“도시를 위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 재앙이 반복되는 것인가요?”

반우현은 금세 진실을 알아냈다.

반명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똑똑한 딸이니 도시가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재앙이 필요하다는 아버지의 의견을 이해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전 빠지겠어요.”

“그 일을 아는 사람이 또 있느냐?”

“……없습니다.”

반우현은 단태를 떠올렸으나 말하지는 않았다. 그 아이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단태의 말로 인해 륜사가 움직인다고 해도 재앙은 일어날 테고, 도시의 상당 부분이 폐허가 되고 말 터였다.

“더 할 말이 남았느냐?”

“조율진을 풀어주세요.”

“왜 그래야 하지?”

“용마 륜사가 조율진에게 관심이 있어요. 내버려 두면 감옥에 갇힌 조율진을 도와주다가 그 계획을 알아낼지도 몰라요.”

“음, 좋은 지적이다. 조치를 취하마.”

시장 반명은 감정에 치우쳐 일을 그르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장실 밖으로 나와 복도를 걷던 반우현은 기다란 창 너머 난간 앞에 섰다. 도시가 저 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운하 사이로 솟아난 높다란 건물들은 햇살 아래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계승자가 된 날부터 이 도시를 더 아름답게, 더 위대하게 만들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 도시를 비록 일부라고 해도 부숴야 하다니.

그 필요성은 반우현도 공감하고 있었다. 도시 운영을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하층민의 결사 조직 추명을 뿌리째 뽑지 않는다면 도시의 구조 자체가 뒤집힐 가능성도 있었다. 추명을 없애지 못한다면 그 조직의 기반인 하층민의 힘을 줄여야 하는데, 그 방법이 바로 소리의 마법사를 이용하여 수룡 유천주를 불러내는 것이었다.

유천주는 곧 방책을 부수고 넘어와 하층민의 거주 지역인 암방거로, 차망로, 서천목로 따위를 공격할 것이다. 마법사들이 미리 대비를 한다면 유천주는 비록 중류층의 거주지를 범할 수는 있어도 시청, 탑 그리고 상류층의 거주지인 상아별로 근처로는 다가오지 못할 것이다.

필요성을 알지만 마음은 개운치가 않았다. 필요하다고 해서 모든 일을 해도 되는 건 아니다.

륜사가 생각났다.

항상 단호하게 길을 선택하는 그 태도가 부러웠다.

륜사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불 보듯 뻔해.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수룡 유천주의 침입을 막겠지.’

반우현은 괜히 물의 도시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사랑하는 이 도시가 괴물로 인해 파괴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할 일이 없다면…… 당연히 떠나야 한다.

반우현은 와타를 찾아내어 지시를 내렸다. 한시라도 빨리 용금탄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고.

이 꺼림칙한 기분은 용금탄에 도착하면 사라질 것이다.

반드시 사라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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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국영은 부드러운 천으로 난초의 잎을 쓰다듬다가 이제 막 이야기를 끝낸 여화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그 아이가 종자장 마지막 시험에 참가하지 못하게 말려 달라는 겁니까?”

“……선생님도 그 길이 단태에게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아시잖아요.”

“난 생각이 다릅니다만.”

난초를 창가로 두고 온 명국영은 의자에 앉고는 다리를 꼬았다.

여화는 그 건방진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부탁하는 처지라 꾹 참았다.

“선생님과 달리, 전 이 탑에서 10년 이상 있었어요. 그동안 종자장이 된 사람들이 어떤 신세가 되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아요. 그러니 제발 단태를 말려 주세요.”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까?”

“……기회라니요?”

여화는 벌떡 일어나 저 남자의 따귀를 때리고 싶었다. 그만큼 화가 났던 것이다. 고민을 거듭하다 용기를 내어 찾아왔건만, 스승이라는 작자가 제자의 앞날을 걱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기회라니!

“사람이 성장하려면 좁은 곳을 벗어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종자장에 그만한 특권이 있다면, 그 힘에 휘둘리는 대신 단태가 낯선 위치를 경험하고 성장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만. 감싸 안아야 할 때가 있으면 보내 줘야 할 때도 있는 겁니다, 여화 수련사.”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용혈에서는…….”

흥분으로 쏘아붙이던 여화가 말을 멈췄다. 상대의 약점을 후벼 파는 지적은 비열하다는 사실을 떠올린 까닭이다.

“그 비난, 달게 받겠습니다. 비록 기억이 없다고는 하나, 정황상 제가 륜사 그 친구와 단태를 배신했다는 점은 거의 확실하니까요. 그 때문에 단태가 종자장이 된다면 있는 힘껏 도와서 절대 타락하지 않도록 만들 생각입니다. 그 일에 제 목숨을 걸어도 안 되겠습니까?”

여화는 남자의 차분한 기백에 주눅이 들었다. 기루에서 여자를 끼고 술이나 퍼마시던 남자가 하루아침에 달라진 모습으로 탑에 돌아온 것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는데, 갑자기 단태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걸겠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보다 세 번째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제겐 그런 힘이 없지만, 여화 수련사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규율 위반이에요.”

여화는 생각해 둔 바가 있지만 명국영에겐 말하지 않았다. 아직 결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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