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회: 2-30 -->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아이에게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쏟아부을 생각입니다. 지식도 물려주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지혜, 경험도 전수할 계획입니다. 단태는 명국영이라는 사람이 세상에 남기는 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러니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명국영이 일어나 여화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중하게.
“……생각해 볼게요.”
여화는 그 기세에 밀리고 말았다.
명국영의 연구실 밖으로 나온 여화는 닫힌 문을 쳐다봤다. 취영루 근처에 볼일 때문에 갔다가 얼핏 봤던 명국영은 세상 다 산 사람, 그래서 희망과는 담 쌓은 사람 같았는데, 저 문 너머에 있는 남자는…… 불꽃에 달구어져 무엇이라도 녹일 것처럼 뜨거웠다.
무엇이 저 사람을 바꿔 버렸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그 방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마괘실이었다.
여화는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지팡이 수백 개가 기다란 선반에 놓여 있었는데, 제각기 색깔과 재질이 달랐다. 저 지팡이는 ‘마괘’라 불리는 것으로 늙은이들이 편히 걷기 위해 손에 쥐는 막대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마력을 품은 재질을 적당한 방식으로 결합하여 마법을 쉽게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로서의 지팡이는 특히 초보 마법사에게 필요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마법이 발전하면서 마법사는 이 마괘를 쥐고 다니는 것 자체를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실력이 없는 자들이나 마괘를 들고 다닌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마괘는 마법사들의 손에서 사라졌고, 이런 방에 낡은 유물처럼 놓여 있을 뿐이었다.
마법사가 버린 물건은 당연히 수련사의 몫이었다. 한때는 수련사가 마괘를 들고 다녔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마법사의 자존심은 수련사에게로 내려왔고, 수련사 역시 마괘를 손에 쥐는 일 자체를 수치로 여기기 시작했다.
마괘는 이제 종자의 몫인데, 마법의 기초조차 잘 알지 못하는 대다수의 종자는 마괘를 가질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예외는 항상 있는 법. 종자장은 마괘를 들고 다닐 수 있었다! 그건 탑을 대표하여 외부로 나와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이유로 종자장을 뽑는 세 번째 단계에서 마괘의 사용은 암묵적으로 용인되고 있었다. 마법사나 수련사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지만 마괘는 여전히 값비싼 물건이었다. 평범한 사람을 마법사로, 초보적인 마법을 펼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었다. 주로 암시장에서 거래되었는데, 불과 물을 만들어 내는 기본적인 마괘도 100마전 이상에 팔리곤 했다.
“……내가 여길 왜 온 거지?”
여화는 답을 알면서도 질문을 던졌다.
단태 때문이었다.
오늘 밤 벌어지는 대결 때문이었다.
준비도 없이 대결에 나가면…… 단태는 크게 다치거나 죽을지도 몰랐다. 대결에 참가하는 두 명의 후보를 떠올린 여화는 종자장이 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단태가 맨몸으로 나갔다가는 익사하거나 불에 타죽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여기 있는 마괘를 빼돌려도 될까?”
의리와 양심이 충돌하고 있었다.
여화는 다양한 종류의 마괘를 쳐다봤다.
마괘의 재질은 주로 쓰는 마법에 따라 달랐다. 고목의 중심 부분은 녹계 마법, 산호나 해초 혹은 바다 동물의 가죽은 수계 마법, 화산 분화구 근처에서 자란 화식순은 화계 마법, 죽은 사람의 뼈는 사계 마법, 스스로 빛을 발하는 섬신목은 광계 마법, 그리고 건드리면 소리가 나는 음명석은 소리를 기반으로 하는 음계 마법에 주로 쓰였다.
여기 마둔수탑에는 주로 나무를 재질로 하는 지팡이가 비치되어 있었다.
여화는 신중하게 마괘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마괘는 크기도 달랐는데 무게는 겉모습으로 예측할 수 없었다. 묵직해 보이는 지팡이가 깃털처럼 가벼웠고, 가느다란 지팡이가 납으로 만든 것처럼 무겁기도 했던 것이다.
한숨을 내쉰 여화는 그 마괘를 조끼 안에 넣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
오늘 하루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단태는 옷을 벗고 가슴과 허리, 등을 살폈지만 악어에게 물린 자국은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거짓말처럼, 꿈처럼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반우현과 함께 세관국장의 저택 연회에 참석하고, 연못을 헤엄쳐서 건너다가 악어에게 물려 깊은 곳으로 끌려가고……. 여전히 그는 악어들이 왜 자신을 공격하지 않았는지, 먹잇감으로 삼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야 세관국장이 저택에서 키우는 악어들은 꽤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신만 몰랐던 것이다.
그 악어만큼이나 용조라는 이름의 새도 믿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새의 노랫소리에 비단 옷이 저절로 고쳐지고, 젖은 몸도 말라 버렸으며, 새가 부리로 몇 번 쪼자 자물쇠가 부서지기도 했다. 세상에 그런 새가 있다니!
용조는 반우현을 만나기 직전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 때문에 용조를 봤던 망현이 없었다면 단태는 자기가 꾸며 낸 환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용조 덕분에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기이한 새는 은색 망토를 걸친 마법사에게 돌아갔을까? 혹시 그 마법사가 화가 나서 새에게 해코지를 하지는 않았을까?
그때, 조그만 창을 통해 새 한 마리가 방으로 들어왔다. 주먹만 한 크기의 새는 빠르게 날갯짓을 하면서 단태 앞 허공에 떠 있었다.
“용조?”
“용조가 단태를 만나러 왔다.”
“……어디 갔었어?”
단태는 너무 반갑고, 너무 좋아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잃었다가 만났기 때문이었다.
“용조는 단태 곁을 떠나지 않는다.”
“단태도 용조 곁에 있을게.”
단태는 이 용조의 주인일지도 모르는 그 마법사를 떠올렸으나 결코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용조가 자신을 선택했으니, 그 마법사에겐 더 이상의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부터 넌 용조가 아니라, 란조야. 난 단태, 넌 란조. 어때?”
“난 란조, 넌 단태.”
“맞아.”
침대에 걸터앉은 단태는 어깨에서 어깨로 옮겨 다니는 란조 덕분에 피곤까지 잊었다. 그러나 유난히 긴 오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종자장!
마지막 단계인 대결은 오늘 자정 지하 창고에서 열릴 텐데, 거기 참가해서 꼭 이기고 싶었다. 종자장은 노예 등록소로 가서 노예 등록대장을 들춰 볼 수 있다. 그러면 엄마와 설희, 그리고 위연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단태가 란조를 찾았는데, 어느새 옷걸이 뒤쪽으로 날아가 숨어 있었다. 따로 숨길 필요가 없었다.
문을 열자, 여화가 서 있었다.
“……어쩐 일이세요?”
단태는 고개를 돌려 란조가 잘 있는지 확인하고픈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준비는 잘했니?”
“지고 싶지는 않아요.”
단태는 또래와 붙어서 져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주먹이 강해서가 아니라 끈질겨서 상대가 먼저 두 손 든 적이 많았다. 기억해 낼 수도 없는 어린 시절부터 악착같은 면을 보였던 단태는 싸움은 힘이 아니라 정신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거, 받아.”
여화는 위쪽은 두툼하고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얇아지는 푸르스름한 지팡이를 내밀었다.
“뭐예요?”
“마괘.”
“……그거 규율 위반이잖아요.”
“백율가진과 명운은 마괘를 가지고 나올 거야. 그러니까…….”
“그렇다고 규율은 어길 수는 없어요.”
단태는 잘라서 말했다.
“고집 피우지 마. 아무 준비도 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
여화는 내민 마괘를 거두지 않았다.
그 지팡이를 쳐다본 단태가 고개를 흔들었다.
“조율진 마법사님에 대한 소식, 아시죠? 그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조작된 증거, 증인으로 15년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됐어요. 그분을 감옥에 가둔 건 힘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 힘을 손에 쥔 사람들은 없는 죄도 만들어 낼 수 있어요. 그런데 제가 규율을 어긴다면 그 사람들은 죄를 만들 필요도 없이 그걸로 절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저도 백율가진, 명운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들이 단순한 종자가 아니라는 것두요. 두 사람의 아버지가 11인위원회에 속해 있잖아요. 제가 종자장이 되려면 마괘의 도움을 받아선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