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72화 (72/293)

<-- 72 회: 2-31 -->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어.”

“죽지 않아요. 할 일이 남은 사람은 절대 죽지 않는다잖아요.”

낮고 부드럽게 말한 단태.

“대체 왜 그렇게 종자장에 집착하는 거니?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야?”

여화가 물었다.

“륜사 님에게 어울리는 종자가 되고 싶어서요.”

단태는 진실을 숨겼고, 여화도 그 점을 눈치챘다. 이유가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행운을 빌게.”

“고맙습니다.”

문을 닫고 침대로 온 단태는 마괘를 받아야 했는지 모른다고 후회했다. 어느새 어깨로 날아와 재잘대는 란조를 힐끔 바라본 그는 조그맣지만 깊은 눈망울에 웃음을 터트렸다.

“넌 어떻게 생각해? 내가 그 지팡이를 받았어야 했을까?”

“단태가 옳다. 무조건 옳다.”

“……고맙다, 란조.”

단태는 침대에 누웠다.

조금이라도 쉬기 위해서였다.

@

“……그게 사실인가?”

“없는 말을 지어내어 부탑주님의 마음을 어지럽힐 만큼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백율운현이 말했다.

“내 종자인 단태가 부탑주의 종자라는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종자장이 되려고 한다?”

“그렇습니다.”

명문소가 말했다.

“사실이라고 해도 좀 이상하군. 종자들의 일에 왜 자네들이 나선 거지? 더군다나 둘이 함께 날 찾아오고. 그 이유가 뭔가?”

륜사는 날카롭게 물었다.

백율운현은 백율가의 가주이자 11인위원회의 일원인 백율만해의 여동생이었고, 명문소는 명가의 수장이며 역시 11인위원회에 속한 명연철의 남동생이었다. 두 사람이 미리 약속도 하지 않고 탑주실로 찾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백율운현이 이유를 설명했다.

“현재 마둔수탑은 둘로 나뉘어졌습니다. 누마탄 탑주님과 당고 마법사 등 실질적으로 마둔수탑을 이끄는 사람들은 모두 용금탄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곳 유타루체의 마둔수탑은 그 영향력이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그동안 마둔수탑의 절대적 세력 앞에 숨죽이고 있던 군소마탑들이 불순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증거들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종자장은 결코 가벼운 자리가 아닙니다. 마둔수탑의 종자장은 군소마탑의 종자들까지 지휘해야 하는데, 단태라는 아이에게 그런 능력이 있습니까? 종자들을 휘어잡는다면 유타루체에 뿌리박고 있는 수십 개의 탑들도 생각을 달리할 겁니다. 어쩌면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신중하셔야 합니다.”

“음…….”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원래 탑주에게는 종자가 없습니다. 그 이유, 륜사 님께서도 아시잖습니까?”

이번엔 명문소였다.

“탑주의 위세를 믿고 종자장이 되려고 했던 나쁜 선례 때문이지.”

륜사는 마둔수탑에 애정이 있는 만큼 그 역사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든 힘을 손에 쥐면 그 힘을 사용하기 마련인데, 탑주의 종자라는 우월한 위치를 이용한 자들 때문에 탑이 흔들린 사례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었다.

“륜사 님은 부탑주지만, 이곳의 탑주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니 둘 중 하나를 선택하셔야 합니다. 단태라는 아이를 내치시든가, 그 아이가 종자장이 될 수 없도록 하시든가.”

“내게 선택을 강요하는 건가?”

륜사의 눈빛은 강렬했다.

“도움이 될 만한 말씀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아, 그리고 용금탄에 볼일이 있어서 잠깐 들렀는데 륜사 님의 부친을 만나 뵈었습니다. 그분께서 안부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륜사는 백율운현을 노려보았다. 륜사의 출신은 극소수만 아는 비밀이었다. 이 여자가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했지만 륜사는 상대가 원하는 대로 끌려 갈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를 했다.

“고맙군. 종자 문제는 내 깊이 생각해 보겠네.”

“오늘 자정에 종자장의 마지막 시험이 있습니다. 그 전까지 결론을 내리셔야 합니다.”

“알겠네.”

두 사람이 나가자 륜사는 여화를 불렀다. 단태가 정말 종자장이 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륜사의 말을 한참 듣던 여화는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사실입니다.”

륜사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턱을 긁었다.

눈앞의 여화에게 분통을 터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당연히 단태를 불러 혼내고 싶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사형의 간곡한 부탁을 이기지 못해 유타루체 마둔수탑의 부탑주 자리를 받아들인 자신의 결정 때문일지도 몰랐다.

마음을 먹었다면 차지할 수 있었던 사형 누마탄의 자리도 거부했던 륜사는 오랫동안 권력이 집중되는 자리를 피해 왔었다. 이유는 단 하나, 자유 때문이었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이리저리 얽히는 인간관계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힘 있는 자리일수록 그 관계에 얽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신념을 이제 와서 깨뜨린 이유는 용혈에서의 수치 때문이었다. 무기력하게 잠만 자다가 일어나 보니 상황은 끝나 있었다. 염종화탑, 진매록탑, 도위신탑 그리고 팔마탑 중 하나인 후령사탑의 마법사들이 힘을 합쳐 공격했는데 그 과정에서 륜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자유롭고 싶어도 힘없이는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곳 유타루체의 탑을 맡은 것이다.

문제는 원하는 힘을 손에 쥐는 만큼 여기저기서 복잡한 일이 터진다는 점이었다. 감옥에 갇힌 조율진, 종자장이 되려는 단태 모두 륜사가 평범한 마법사였다면 모르고 지나갔거나 그런 일 자체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기에 륜사는 가만히 수습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제가 단태더러 그만두라고 말할까요?”

여화가 살며시 묻는 순간, 문을 열고 들어선 명국영이 끼어들었다.

“단태는 자네를 위해서라도 종자장이 되어야 하네.”

륜사는 눈짓으로 여화를 밖으로 내보낸 후에 물었다.

“……무슨 뜻이야?”

“일단 사과부터 하겠네. 일부러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닐세.”

“친구 사이에 사과는 필요 없어. 그보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가? 날 위해서 단태가 종자장이 되어야 한다니.”

“한 가지 묻겠네. 자네는 왜 거기 앉아 있나?”

명국영은 강렬한 륜사의 시선을 마주 보며 되물었다.

“……난 마둔수탑 유타루체 지부의 책임자야.”

술에 찌들어 지내다가 갑자기 과거로, 아니 그보다 더 활기찬 사내로 돌아온 명국영을 쳐다보며 륜사는 겨우 대답했다. 바로 조금 전에 고민했던 부분을 찌른 질문이어서 골치가 아팠던 것이다.

“그 자리의 의미는 자네도 알겠지?”

“의미? 부탑주의 자리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몰랐는데.”

“모른 척하지 말게. 내 그동안 술만 퍼마시며 시간을 낭비했지만 그래도 이 머리는 꽤 쓸 만하네. 자네가 왜 갑자기 그런 자리를 받아들여 이렇게 앉아 있는지 난 알고 있지.”

“……그런가?”

“바로 용혈 때문이 아닌가?”

륜사는 순간 눈앞의 사내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다. 저 사내에겐 아무것도 숨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륜사는 돌풍처럼 불었던 살심을 떠나보냈다. 최고의 친구와 최강의 적은 종잇장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 명국영은 평생 최고의 친구로 남을 만한 사람이었다.

“백율운현과 명문소가 왜 자네를 찾아왔겠나? 마둔수탑을 위해서? 자네를 도와주려고? 그럴 리는 없네. 자네도 종자장 후보로 누가 남아 있는지 알 걸세. 바로 백율가진과 명운이라는 녀석들이야. 만약 둘 중 하나가 종자장이 된다면…… 자넨 처음부터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게 될 거야. 허수아비 부탑주 신세가 된다는 걸세.”

“그들이 날 흔들려고 해도 소용없어. 누가 뭐라고 해도 사형 누마탄이 마둔수탑 전체의 수장이며, 난 마둔수탑 최강의 마법사니까.”

“순진한 친구야, 자네는.”

명국영이 웃자, 륜사도 따라 웃었다. 왠지 지금 명국영의 웃음에는 전혀 비난의 의도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순진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