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륜사는 애써 실망감을 숨기며 물었다.
“아직은 말할 수 없네. 때가 되면 알려 주겠네.”
륜사는 명국영처럼 영리하고 강단 있는 사람이 품은 꿈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그래 봐야 소용이 없음을 잘 알았던 것이다. 명국영은 힘없는 서생에 불과하지만 그의 말은 어떤 마법으로도 담아낼 수 없는 지혜를 품고 있었다. 저 머릿속에 담긴 지식과 지혜는 마법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을지도 몰랐다.
‘언젠가는 알 수 있겠지.’
륜사는 술잔을 기울이며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 동지로서 명국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명국영이 그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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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 예법은 까다롭고 복잡했다.
그 예법 공부에 참가한 하녀들 중 눈에 띄게 탁월한 사람은 단연 위연미였다. 어떤 옷을 입혀도 기품이 흘렀고, 말투에도 품위가 있었으며, 무엇보다 황궁에 어울리는 차가운 분위기에 반우현은 자신의 시녀로 와타 대신 위연미를 선택했다. 와타에게는 다른 일을 시킬 생각이었다.
위연미는 좋은 기색도, 싫은 기색도 없었지만 노예 매매소에서처럼 조건을 걸었다.
“뭐? 동생을 데려가겠다구? 뭐, 어려울 건 없지.”
반우현은 동생이 곁에 있으면 위연미가 더 열심히 자신을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다.
“고맙습니다, 아가씨.”
“앞으로는 공녀라고 불러.”
“네, 공녀님.”
응접실 밖으로 나온 위연미는 길게 숨을 쉬었다. 어디엔가 있을 엄마와 언니, 단태를 남겨두고 수도 용금탄으로 간다는 사실은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설희를 데리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주방으로 간 위연미는 그릇을 씻고 있는 설희 옆으로 다가섰다.
“언니?”
“응, 내가 도와줄까?”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나도 할 수 있거든.”
“그래.”
“무슨 일 있지?”
“아, 그게…….”
“용금탄으로 간다면서? 난 괜찮아. 소문, 나도 들었어. 언니라면 아가씨의 시녀로 손색이 없어. 손색이라는 말, 이럴 때 쓰는 거 맞지?”
“……내가 널 두고 어떻게 가?”
“…….”
“너도 나와 함께 갈 거야. 그리고 곧 함께 돌아올 거야. 그래야 너도, 나도 가족을 찾을 수 있잖아.”
“……언니.”
설희는 눈물을 흘렸다. 말은 안 했지만 혼자 남는다는 사실이 두려워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이다.
위연미가 설희를 안았다.
“울지 마. 용금탄으로 가면…… 이런 생활에서 벗어날 기회가 있을 거야. 거긴 사람도 많고, 기회도 많다니까. 그때가 되면 우린 당당하게 가족을 찾으면 돼. 그때까지는 너도, 나도 울지 말자. 알았지?”
“……응, 언니.”
위연미는 소맷자락으로 설희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반우현의 지시로 방으로 돌아가서 얼마 되지 않은 짐을 싸던 위연미는 낡은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도안집의 ≪역사≫였다. 너덜해져서 쓰레기통에 버려진 그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가방에 넣어 두었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고, 작은 부분이라도 되새기며 외웠다. 하녀, 혹은 시녀로 지냈다가는 영영 이런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에 옛날에는 엄마가 읽으라고 해도 귓등으로 들었던 책을 손에 잡은 것이다.
≪역사≫는 난해한 책이었다. 한 장도 읽기 어려웠는데, 반복해서 읽으니 조금씩 의미를 알 것 같기도 했다. 그 책에 ‘길’이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위연미는 확신했다. 그래서 수중에 있는 단 한 권의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래야 살아갈 힘이 생겼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연미에게 도안집의 ≪역사≫는 경전이나 다를 바 없었다. 매일매일 그 책을 통해 힘을 얻어 살았기 때문에.
밤늦게 위연미는 설희를 데리고 천마룡에 올라탔다.
*풍혈지체
종자장 시험은 싱겁게 끝났다.
구경꾼까지 합쳐서 수백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하 창고의 중앙으로 세 사람의 후보가 나섰지만 그중 두 사람이 복통을 일으켜 기권을 하는 바람에 단태는 어부지리로 종자장이 되었다. 백율가진과 명운은 음모라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는데, 둘 중 더 요란하게 흥분한 명운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실례를 하고 말았다.
화장실로 직행한 두 사람은 왜 단태가 멀쩡하고 자신들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창수의 동생이 무사히 구출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한 두 사람은 창수가 비밀 조직 추명의 지도자인 번운재의 손자라는 사실도 몰랐다. 추명이 나서서 두 사람이 대결 전에 먹은 음식에 무색무취의 독을 집어넣어 복통을 일으켰다는 사실 또한 꿈에도 알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깬 단태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봤다. 어젯밤 일이 꿈같았다. 다행히 꿈은 아니었다. 드디어 종자장이 된 것이다. 오늘 종자장의 신분을 증명하는 인장 반지를 받으면 당장 노예 등록소로 달려갈 생각이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단태는 그쪽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수련사 여화가 서 있었다.
“사부님께서 널 찾으신다. 준비하고 올라와.”
“……네.”
이런 순간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륜사를 만날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단태는 당황하고 말았다. 사부님이 뭐라고 하실까? 탑에서 내쫓지는 않을까? 걱정이 꼬리를 물었다.
‘오늘 쫓겨나도 상관없어. 난 노예 등록대장만 확인하면 돼. 그러면 설희와 엄마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단태는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유쾌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예리해서 앞에만 서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륜사 때문에 겁이 났다. 한숨을 내쉬는데 란조가 날아와 공중에 뜬 채로 단태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부님이 나를 용서하실까?”
“용서한다. 용서한다.”
“고맙다. 그 말을 들으니 좀 힘이 나는 것 같다.”
“란조도 고맙다. 란조도 고맙다.”
“넌 여기 있어.”
탑 꼭대기로 올라가기 위해 종자 숙소 밖으로 나온 단태는 창수를 발견했다.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축하해.”
다가온 창수가 말했다.
“고마워.”
“부탑주님이 부르셨다면서?”
“응.”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거야.”
“아마도.”
“나중에 봐.”
창수가 손을 흔들자, 단태는 심호흡을 하며 계단으로 접어들었다.
사부님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내려오던 종자들이 단태를 보자 달려와서 꾸벅 인사를 했다. 단태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종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종자방의 터줏대감 종춘도 단태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종자장에 대한 예의였다.
하루아침에 대접이 달라져 있었다.
단태의 마음은 이미 노예 등록소에 가 있었다. 종자장의 인장 반지를 끼고 가면 그 고압적인 관리도 두말 않고 장부를 보여 줄 것이다. 그러면 엄마와 설희, 위연미가 어디로 팔려갔는지 알 수 있을 테고, 오래지 않아 가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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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관조를 돌려주지 않으면 더 이상 이곳에서 작업을 진행할 수 없소이다.”
한때 은후성탑의 칠장로 중 한 사람이었던 음택수는 단호했다.
“그 새를 간수하지 못한 책임은 그쪽에게 있잖습니까?”
양도출이 불만을 담아 물었다.
“간수하지 못했다? 재미있군. 당신은 백관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소?”
“소리 마법사들이 한 마리씩 데리고 다니는 애완용 새가 아닙니까?”
“국장님, 그대의 마법사가 이토록 무식한 줄은 상상도 못 했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