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76화 (76/293)

<-- 76 회: 2-35 -->

가슴과 배가 만나는 그 부분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스무 살을 넘기기 어렵다?

그러면 앞으로 길어야 4년이라는 뜻인데. 그때까지 엄마와 설희를 찾을 수 있을까? 찾지 못하면 어쩌지?

“너무 낙담할 필요는 없다. 이 사부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테니까.”

“……네, 사부님.”

단태는 앞이 노랗게 변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사물을 보고 있지만 정신이 어디론가 가 버려 멍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흐리멍덩한 마음으로 보는 세상은…… 어딘지 모르게 노란 세상이었다. 왠지 그런 것 같았다.

륜사와 엄포윤이 본격적으로 의논하자, 여화가 단태를 부축해서 탑주실 밖으로 나왔다.

“괜찮니?”

“앞으로 4년밖에 못 산다는데 괜찮을 리가 있겠어요?”

단태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륜사 흉내를 낸 것인데,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마지막 부분에서 울먹이고 말았던 것이다.

여화가 다가와 단태를 안아 주었다.

“마법사는 마법을 추구하지만 또 하나 지키는 게 있어. 그건 바로 ‘의리’야. 한때 마법사가 손가락질당하던 시대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마법사들끼리 똘똘 뭉칠 수밖에 없었어. 출신 탑을 막론하고 마법사들은 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위했대. 그때부터 의리를 저버리는 마법사는 더 이상 마법사가 아니라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지. 물론 탑에 대한 충성을 흔들 정도의 의리는 필요 없지만 말이야.”

“……네.”

“넌 날 구했어. 용혈에서 말이야. 그러니 난 내 목숨을 걸고 널 지킬 거야. 마법사로서의 의리를 걸고 맹세해. 그러니까 힘내. 알았지?”

“고마워요, 여화 누나.”

“넌 혼자가 아니야.”

“알았어요.”

여화와 헤어져 자신의 방으로 들어선 단태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단단해졌다고 자부했건만, 삶 자체가 4년으로 줄어들자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4년도 확실치 않았다. 어쩌면 내일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슬픔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미 노예로 팔려 와 탑의 그 조그만 방에서 슬픔을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이겨 낸 경험이 있었기에 단태는 절망을 극복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사부님이 종자장 때문에 뭐라고 하시지는 않았으니까.’

현재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한 단태는 종자방으로 내려가서 인장 반지를 받았다. 단태의 손가락에 딱 맞게 제작된 그 반지에는 마둔수탑 특유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반지를 건넨 종춘이 말했다.

“축하하네. 처음부터 자넨 특별하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내 생각이 옳았구먼.”

“어르신 덕분입니다.”

“어르신? 하하, 자넨 종자장이 된 후에도 변하지 않는 모양이야.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하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위로 올라온 단태는 여화에게 소마선을 빌리는 대신 정문으로 탑을 빠져나갔다. 광장을 가로질러 선착장에서 배를 탄 그는 아무도 모르게 노예 등록소로 가고 싶었다. 한결 차가워진 공기를 가르며 배가 움직이는데, 고운 소리가 들리더니 란조가 날아와 어깨에 앉았다. 갑갑했는지 탑 밖으로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그래, 같이 가자.”

단태는 배고프면 먹으려고 넣어두었던 과자를 꺼내어 란조에게 먹였다. 그 조그만 부리로 열심히 과자 부스러기를 먹어 치우는 란조를 보며 단태는 잠시 슬픔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배는 관공서가 몰려 있는 지역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린 단태는 뺨이 부풀어 오를 만큼 공기를 들이마시고는 계단 위로 올라갔다. 건장한 체구의 사내들이 단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또래의 아이들 중에도 소매치기가 많았던 것이다. 단태는 앞을 가로막는 경비대원에게 인장 반지를 보였다.

“아, 마둔수탑의 종자장이시군요. 들어가십시오.”

단태보다 열 살은 많은 경비대원이 고개를 숙였다.

단태는 종자장이라는 자리의 위력에 놀란 속내를 감추며 노예 등록소 안으로 들어섰다. 관리가 다가오자 또 한 번 인장 반지를 보여 주었는데, 그 오만한 관리가 순한 양으로 변하더니 무엇이 필요한지 물었다.

“노예 등록대장을 보고 싶은데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아버지뻘이라고 해도 좋은 관리가 단태를 정중하게 안내했다. 그에게 단태는 소년이 아니라 마둔수탑을 대표하여 이곳에 온 사람이었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했다가는 승진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단태는 곧 책 냄새 가득한 서고로 들어섰다. 관리는 노예 등록대장이 빽빽이 꽂힌 서가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수백 권에 달하는 장부가 꽂혀 있었다.

관리가 나가자 단태는 장부를 찾기 시작했다. 수십 년 전의 장부도 있었는데, 가장 최근의 장부가 필요했다. 그 장부를 찾아내어 조그만 탁자 위로 가져온 단태는 자신이 팔린 날짜로 장부를 펼쳤다. 엄마와 설희의 매매 기록을 보려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몸을 돌린 단태는 깜짝 놀랐다.

“스승님?”

“그 장부 때문에 종자장이 되고 싶었던 게로구나.”

“…….”

명국영의 말에 단태는 할 말을 잃었다.

“사십 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사람 보는 안목만큼은 자랑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내가 보기에 넌 사람들 위에 서기 위해 종자장이 된 게 아니었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지. 그래서 네가 종자장이 되고 나서 무엇을 할지 기대하며 따라왔는데, 의외로구나. 노예 등록소라니. 게다가 노예 등록대장이라니. 네가 아는 누군가가 노예로 팔린 것이냐?”

“……찾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누군데?”

명국영은 어느새 다가와 장부를 훑어보고 있었다.

“위연미요.”

“위연미? 여기 있구나. 최근에 팔린 모양인데, 너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 아이네? 잘 아는 사람이냐?”

“……친구예요.”

“친구를 찾고 싶어서 종자장이 되다니, 너도 참 대단하다.”

명국영은 껄껄 웃었다.

“위연미가 어디에 있을까요?”

“음, 어디 보자. 어? 좀 이상하구나. 이 장부에 분명히 매매 기록이 구체적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구매자의 이름이 없다. 아무래도 장부에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은 누군가가 네 친구를 산 모양이다.”

“그럴 수도 있나요?”

“극소수만 가능하지.”

“극소수요?”

“도시를 지배하는 사람들.”

“그게 누군데요?”

“보통은 11인위원회 정도는 돼야 가능할 게다.”

“그러면 11인위원회에 속한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위연미를 데려갔다는 뜻인가요?”

“장부만 본다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

“알아낼 방법은 없을까요?”

단태는 그렇게 질문을 던지면서 엄마와 설희를 장부에서 찾았다. 놀랍게도 엄마, 설희를 데려간 사람들의 이름도 비어 있었다. 그들 역시 11인위원회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어쩌면 위연미를 구입한 사람이 엄마, 설희도 데려갔을지 몰랐다.

“의지만 있다면 방법은 찾아낼 수 있겠지만, 여기에는 그 답이 없을 것 같구나.”

“……네.”

단태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여기에 오면, 장부를 확인하면 가족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건만.

“너무 낙담하지 마라. 지성이면 감천이니까. 이 똑똑한 스승이 널 돕는다면 네 친구를 금세 찾아낼 수 있을 거다.”

“……고맙습니다, 스승님.”

단태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름을 장부에서 찾았으나……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 엄포윤이 손을 써서 장부에서 단태라는 노예의 매매 기록을 빼 버렸을까? 이유는 몰라도 단태라는 이름은 거기 없었다.

“새가 아주 예쁘구나.”

명국영은 단태의 어깨에 앉아 노예 등록소 안까지 들어왔던 백관조를 자세히 살폈다.

“란조예요.”

“란조? 이 근방에서는 못 보던 새 같은데.”

명국영이 손을 뻗어 만지려 하자, 란조는 재빨리 날아올라 손등을 물고는 단태의 반대쪽 어깨로 옮겨 갔다.

명국영은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허허, 성질 한번 고약하구나.”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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