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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솔한 내가 잘못이지. 자, 이제 나갈까?”
“네, 스승님.”
단태는 장부를 원래 자리에 올려놓고 명국영과 함께 노예 등록소 밖으로 나왔다. 현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악화되었다. 올해 안에는 가족을 되찾을 줄 알았는데. 이런 식이라면 죽기 전에 설희도, 엄마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배에 올라타자 옆으로 다가온 명국영이 말했다.
“여화에게 이야기 들었다.”
단태는 눈물이 핑 돌았지만 꾹 참았다.
“4년은 긴 시간이다.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어라. 네 사부도 가만히 있지 않겠지만, 이 못난 스승도 널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할 테니까.”
“고맙습니다.”
“이 스승이 널 위해 맛난 요리를 사 주마. 너, 금룡반침이라고 들어 봤니?”
“……아니요.”
단태는 이미 먹어 봤지만 솔직히 말했다가는 반우현과 함께 평굉의 저택에 들어갔던 일까지 설명해야 할 것 같아서 거짓말을 했다.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명국영은 단태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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륜사는 일곱 개의 수정구를 사용하여 제국 각처에 흩어져 있는 마법사들과 의견을 나누었다. 역사적으로 풍혈지체와 유사한 증상을 가진 적문공추지체의 단점을 고치기 위해 여기저기 질의서를 보내고 약간의 실마리라도 찾기 위해 애를 쓰는 중이었다.
왼쪽 두 번째에 있는 수정구에서 빛이 나자, 륜사가 손으로 슬쩍 건드렸다. 아름다운 여자가 수정구 표면에 나타났다.
“좀 찾아봤어?”
“누가 적문공추지체를 타고난 거야?”
여자가 물었다.
“응. 그래서 급해.”
“몇 살인데?”
“대략 열다섯 정도.”
“……그러면 어렵겠는걸. 적문공추지체에 대한 해결책이 있긴 한데, 최소 다섯 살 이전에 적용해야 효과를 볼 수 있거든. 그 방법도 항상 효과를 본다는 보장도 없고. 설마 아들은 아니지?”
“어이, 난 결혼도 안 했어.”
륜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결혼 안 해도 아들이 생길 순 있잖아. 아직도 혼자야? 사귀는 사람도 없고? 없으면 나 어때? 나도 아직 혼자거든. 그러니까 우리 둘이 결합하면 아주 뛰어난 천재가 나올 것 같은데…….”
“끊어.”
수정구를 건드려 대화를 마무리한 륜사는 마정청 관리이자 명문 귀족 출신인 계연빙의 이름에 줄을 그었다. 벌써 열다섯 명에게 의견을 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앞으로 일곱 명 남았다. 그들에게서 실마리를 얻어 내지 못한다면…… 적문공추지체보다 훨씬 까다로운 풍혈지체의 위험으로부터 단태를 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골치가 아팠다.
마법은 위험한 힘이어서 마법에 적합한 몸일수록 선천적인 질병에 노출되기 쉬웠다. 그래도 같은 체질의 사람이 많이 태어나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화혈산중지체는 그 체질의 소유자가 스무 살 무렵이 되면 몸이 저절로 타 버리게 만들었으나, 그런 일이 자주 발생하자 대마법사까지 나서서 문제를 추적하는 바람에 해결된 지 벌써 수백 년이나 지났다. 진짜 문제는 희귀한 체질인 경우였다.
풍혈지체를 타고난 사람은 기록 자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만큼 드물었다. 그러니 어떤 식으로 치료를 시도했고, 그 결과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에 대한 자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씩 풍혈지체에 대해 연구를 해야 한다는 뜻인데, 그런 식으로 접근하다가는 단태가 죽기 전에 문제 해결은 불가능할 터였다.
결국 나머지 마법사들과의 대화에서도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낙담한 륜사는 공기를 입안에 넣어 뺨을 부풀린 채로 탑주실 창가로 걸어갔다.
거대한 도시가 저 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한때 이 방의 주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대륙을 떠돌았었다. 그는 자신을 잘 알았다. 조직의 수장이 되기엔 너무 자유분방했다. 바로 그 때문에 일부러 사형 누마탄이 탑주가 되도록 엉뚱한 짓을 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지만.
“세상이 이토록 광활하니, 어딘가에 방법이 있겠지.”
륜사는 지레 실망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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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포윤은 만족스러웠다.
적당한 기회를 봐서 그 문제를 륜사에게 떠넘기는 데 성공했다고 확신했다. 단태가 스스로의 힘으로 종자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의외였지만 큰 틀에서 보면 계획은 여전히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야말로 인형극을 주도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생각했다.
“륜사는 서둘러 그 아이에게 마법을 가르치겠지. 그게 남은 유일한 방법이니 말이야.”
엄포윤은 륜사가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있었다. 단태 스스로 풍혈지체라는 짐을 짊어져서 극복하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그리 쉽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륜사가 누군가? 륜사라면 단태를 잘 구슬려 불가능도 가능케 만들 것이다.
최근 엄포윤은 연구실에 틀어박혀 형운세초의 대량생산 방법을 위한 마지막 문제 해결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 부분이 성공하면 거액의 돈이 저절로 굴러 들어올 것이다. 돈이 모든 것을 해 줄 수는 없지만, 돈은 거의 모든 과정을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살을 찌푸린 엄포윤은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나 문을 열었다.
“탑 정문에 타마 어르신의 아드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드님?”
“네.”
“단태의 아버지 말인가?”
“그렇습니다. 전 그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소식을 전한 수련사는 몸을 돌려 가 버렸다.
엄포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단태에게 아버지가 있다니. 그러고 보니, 단태를 구입한 매매소 직원 말에 따르면 단태는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노예로 팔렸다. 어머니가 있으면 어디엔가 아버지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가 왜 찾아왔을까?
단태를 돌려 달라고?
일단, 만나 보자. 그러면 그 사람의 의중을 알 수 있을 테니까.
엄포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망토 중에 가장 질 좋은 망토를 꺼내어 입고는 탑 입구로 내려갔다. 팔짱을 끼고 콧노래까지 부르는 남자가 수련사들 옆에 서 있었다. 그가 엄포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밖으로 나가서 얘기하지.”
엄포윤은 그를 데리고 광장의 분수대 앞으로 갔다.
주위를 살펴 낯익은 얼굴이 없다는 점을 확인한 엄포윤은 술에 찌든 사내를 노려봤다.
“자네가 단태의 아버지인가?”
“단태에게 마법사님 같은 할아버지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요.”
비열하게 웃는 남자.
“뭘 원하나?”
“보다시피 제가 못 먹고 못 입은 게 벌써 보름이나 되었거든요. 도움을 바라고 여기까지 찾아왔습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엄포윤은 눈앞의 이 아버지라는 사람이 단태와 그 어머니, 여동생을 노예 상인에게 팔아먹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단태에 대해 걱정하기는커녕 돈 뜯어 낼 궁리만 했던 것이다. 한 번 돈을 주면 계속, 어쩌면 평생 돈을 뜯어 낼 놈이었다.
“얼마면 되겠나?”
“일단 50마전이면 충분합니다.”
“기다리게.”
엄포윤은 급한 불부터 끈 후에 차근차근 저 짐승 같은 놈을 처리하리라 마음먹었다. 손에 돈을 쥐여 준다면 당분간 신 나게 그 돈을 쓸 텐데, 그동안 놈이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서 시간을 보내는지 파악한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서 운하 바닥에 가라앉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이 도시에는 꽤 많았다.
탑주 누마탄이 주고 간 돈에서 50마전을 꺼내 온 엄포윤은 돈을 보고 눈이 이글거리는 남자에게 주머니째로 넘겼다. 남자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광장을 가로질러 선착장으로 가 버렸다. 꼴을 보니 술을 마시거나 도박장에 기어들어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