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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돈을 더 준다면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고 말했는데, 명국영은 헛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탑으로 돌아온 명국영은 여화에게 부탁해서 수정구를 받아 왔다. 수정구는 마법사의 상징이지만, 마력석과 몇 가지 요령만 터득한다면 보통 사람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도구였다. 문제는 비싸다는 점이었다. 명국영은 머릿속에 담긴 인맥을 총동원하여 도양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찾았다.
무려 150마전에 달하는 마력석이 소비되었지만 명국영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세 시간 만에 도양에 대한 정보가 명국영의 손에 들어왔다. 도양은 여기 물의 도시에서의 버릇을 용금탄에서도 버리지 못했다. 노예 상인으로 한몫 단단히 잡기 위해 용금탄에 왔다가, 의외로 경쟁이 치열해 재미를 못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다가 그 쓰레기 같은 녀석에게 관심이 생긴 겁니까? 명 선생처럼 고고한 분과는 거리가 있을 텐데요.”
“제가 아는 사람이 도양을 통해 노예 매매소로 넘어갔습니다.”
“아, 그런 애석한 일이 있었군요. 너무 낙담하지 마십시오. 도양이라는 쓰레기는 곧 망할 겁니다. 어쩌면 빚 때문에 그 자신이 노예로 팔릴지 모르겠습니다.”
용금탄의 상재부 관리 회통하가 말했다. 회통하는 십 년의 공부를 접으려는 찰나 우연히 만난 명국영에게 가르침을 받아서 그 어렵다는 상재부 등용 시험에 합격했다. 그 기적 같은 순간을 경험한 이후로 명국영의 말이라면 입고 있는 속옷이라도 벗어 줄 것처럼 받들기 시작한 사람이었다.
“고맙습니다.”
“언제든 연락하십시오. 선생님 말씀이라면 제 힘 닿는 데까지는 도와 드리겠습니다.”
대화를 끝낸 명국영은 그림을 가져와서 다시 들여다봤다. 분명히 그 새였다.
그림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그는 창가로 가서 물의 도시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미 오래 전부터 단태에게 석연치 않은 점을 느끼고 있었다. 단태라는 아이 자체는 믿을 만했지만, 단태와 엄포윤의 관계가 평범한 조손 사이가 아님을 눈치챈 것이다. 할아버지와 손자인데, 왠지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가지 않으려 하고…… 할아버지도 손자가 껄끄러운 듯 보였다.
이 순간, 명국영은 단태가 엄포윤의 손자가 아님을 직감했다. 근거는 없다. 그런데도 그는 이 확신을 버릴 수가 없었다.
때때로 한 가지 일에 몰입하면 논리적인 과정이 아니라, 단번에 결론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 결론이 옳다는 근거가 없는데도, 그 확신은 더없이 강렬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직감은 거의 정확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람에게는 이런 식의 도약적 사고도 가능한 모양이었다.
‘그러면 왜 단태를 손자라고 말할까?’
그 질문을 속으로 던지자마자 답이 튀어나왔다.
명국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직 증거가 없기 때문에 속단은 이르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머릿속에 새긴 노예 매매 기록을 종이에 썼다. 위연미가 팔린 바로 그날, 즉 단태가 탑에 들어오기 전날의 매매 기록이었다. 76명의 노예가 그날 하루 동안 팔려 나갔다.
그중 위연미, 설희, 양지란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73명이 남는다.
‘일일이 찾아가서 확인할까? 시간도 오래 걸릴 뿐 아니라, 노예 매매가 아무리 자유롭게 이루어진다고 해도 노예를 구입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밝히길 꺼려 하니까 아예 구입한 적 없다고 잡아뗄지도 몰라. 그래도 필요하다면 확인하는 수밖에.’
명국영은 자기 추측이 틀리기를 바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봉
어젯밤 늦게까지 ≪11인위원회≫를 읽느라 잠을 설친 단태는 움직이는 배 안에서 찬 바람을 맞으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서고에서 빌린 책 ≪11인위원회≫는 물의 도시 유타루체의 굵직한 정책을 결정하는 모임의 변천 역사를 담고 있었다. 엄마와 설희, 위연미가 그 11인위원회에 속한 누군가가 데려간 이상,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야 했던 것이다. 반도 읽지 못했지만 단태는 유타루체를 세운 11개 가문의 수장이 모여 의논한 것이 11인위원회의 유래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피곤하지?”
창수가 물었다. 창수는 보종자로서 단태 옆에 붙어 다녔다. 보종자는 종자장이 임명하는데, 종자장을 돕는 역할이었다.
“조금.”
종자장이 된 이후 단태는 몇 배나 많은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마법사 밑에서 해야 할 일도 만만찮는데, 종자장은 탑 안에 거주하는 종자들 전부의 업무를 알고 있어야 했다. 일이 많은 종자와 일이 적은 종자를 구분하여 업무를 할당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외부 의뢰 업무 보조, 방책 경계 업무 보조, 약제실을 비롯한 탑 내부의 시설 관리와 청소, 주방 지원, 세탁실 지원 등 다양한 업무가 종자들에게 할당되었는데, 종자장은 그 업무를 각 종자들에게 배당하는 책임이 있었다. 바로 그 권한 때문에 종자들은 종자장 앞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종자가 된 지 석 달이 훌쩍 지났고, 그사이 도시 곳곳을 녹색으로 물들인 나무도 울긋불긋 물들었다. 석 달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고집은 있었지만 세상 물정 몰랐던 단태는 이제 수백 명의 종자들을 거느린 종자장이 되어 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단태는 빠르게 종자장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단태는 앞쪽에서 질주하는 중마선을 쳐다봤다. 여화를 비롯해서 수련사 열 명이 거기 타고 있었다.
오늘 할 일은 도시를 서쪽으로 확장하고 있는 간척장에 설치된 보호 마법진을 보수하는 것이었다. 유타루체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땅은 항상 부족했다. 물의 도시는 전통적으로 서북쪽 늪지대에 말뚝을 박고, 물을 빼낸 다음에 흙과 모래를 채워 땅으로 만드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시행하고 있었다.
오늘 업무에는 수련사 열 명, 종자 삼십 명 투입될 예정이었다.
단태는 떨리는 손으로 난간을 움켜잡았다. 종자장으로 처음 해 보는 일인데,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평범한 종자였을 때는 잘못을 저질러도 금세 되돌릴 수 있는데, 종자장의 업무는 차원이 달랐다. 지시 한번 잘못 내리면 탑 전체가 마비될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특히 약제실, 배급실, 세탁실, 마주방, 우편실 등에 문제가 생기면 수련사는 물론 마법사까지도 손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
“휴우.”
단태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살폈다. 란조가 없으니 허전했다. 그 무뚝뚝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정감 있는 말투를 들으면 마음이 편해질 텐데.
곧 배는 간척장 입구에 도착했다. 방책과 성벽 사이에 철로 제작된 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바로 그 너머가 간척장이었다. 한층 강렬해진 악취가 코로 파고들었다.
수련사들과 종자들이 배에서 내려 간척장으로 들어섰다. 단태는 저 멀리까지 펼쳐진 늪지대 중앙으로 뻗은 다리를 볼 수 있었다. 말뚝을 박고 그 위에 박아 넣은 판자로 된 그 다리 끝에 수백 명이 달라붙어 통나무와 흙, 모래를 옮기고, 말뚝을 세우고, 그 말뚝을 고정시키는 등 부지런히 일하고 있었다.
자연을 사람의 힘으로 바꾸고 있었다.
그 늪을 관통하는 다리로 다가가자 악취는 더욱 심해졌다. 곧 단태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발목에 쇠사슬을 찬 깡마른 남자들이 힘겹게 끙끙 신음을 흘리며 통나무를 옮기는 중이었고, 그 너머에는 맨손으로 통나무와 연결된 밧줄을 당겨 통나무를 세우는 남자들이 있었다. 일부는 수직으로 선 통나무에 달라붙어 근처 다른 통나무와 연결하고 있었다.
“전부 노예들이야.”
창수가 말했다.
줄잡아 오백 명, 어쩌면 천 명 가까운 노예들이 감독관의 채찍을 맞아 가며 거기서 일하고 있었다. 악취의 근원인 노예들은 쉴 틈도 없이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단태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노예들을 쳐다봤다. 그들 중에는 랍살처럼 피부가 하얀 노예들이 제법 많았다. 이삼백 명은 될 것 같았다. 그 외에는 단태와 피부색이 같은, 살이 오르고 옷만 갈아입으면 평범한 백성이었다. 억울한 빚 때문에 노예 신세가 된 단태는 자신처럼 체구가 작고 어린 노예가 어른 노예들 사이에 끼어 일하는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어쩌면 저기가 자신의 자리였을지도 몰랐다.
“가자.”
창수의 말에 정신이 든 단태는 얼마 전에 완성된 간척지로 향했다.
수련사들은 이미 도착해서 마법진을 그릴 위치를 의논하고 있었다. 방식은 간단했다. 노련한 마법사들이 제작한 두루마리인 중족을 하나씩 손에 든 수련사들이 정확한 위치에 서서 그 두루마리를 찢기만 하면 섬광과 함께 마법진이 땅에 새겨지는데, 그러면 땅은 건물을 올려도 될 만큼 견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