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80화 (80/293)

<-- 80 회: 2-39 -->

설치할 마법진은 모두 일곱 개여서 종자들은 중족 다발을 들고 수련사를 따라다녔다. 각 마법진마다 수련들이 설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간단하나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작업이었다.

단태는 잔뜩 긴장을 한 채로 종자들을 살폈다. 창수의 도움을 받아 탑에서도 가장 일 잘하는 종자들을 뽑은 터라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종자장이 된 이후 처음으로 책임을 맡은 작업이라서 남의 일 보듯 편안할 수가 없었다.

그때, 수련사 하나가 엉뚱한 위치에서 중족을 찢었다. 섬광이 동시에 터져야 하는데, 그 수련사는 시간도 늦어 마법진은 땅에 스며드는 대신 공중에서 사라져 버렸다.

“미안해. 여분의 중족이 있으니까 걱정 마.”

수련사는 동료들에게 고개를 숙였지만 정말 미안해하는 기색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수련사를 도왔던 종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단태 앞에 나타났다.

“종자장님, 남는 두루마리가 없습니다.”

“……왜요? 열 개씩 챙기라고 했을 텐데요.”

출발 전에 몇 번이나 확인한 내용이라 단태는 당황했다.

“배급실에서 일곱 개만 가져가라고 해서…….”

“왜 출발 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무 문제 없을 줄 알고.”

그 종자는 고개를 푹 숙였다.

단태는 창수를 쳐다봤다. 창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탑에 갔다 올 시간은 없었다. 간척장은 일몰과 함께 폐쇄된다. 늪지대 곳곳에 숨어 있는 악어가 어둠을 틈타 도시로 침입할 가능성 때문이었다.

수련사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여분의 두루마리가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키가 큰 수련사가 단태 앞으로 걸어왔다. 유난히 커다란 빨간 목도리가 눈에 띄었다. 수석수련사 당원일이었다. 종자들의 우두머리가 종자장이라면, 수련사들에게는 수석수련사가 있었다.

“여분을 챙기지 않았다던데, 사실이냐?”

“……죄송합니다.”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당원일은 발로 단태의 복부를 걷어찼다. 허리가 꺾이자 팔꿈치로 등을 내리꽂았다.

신음을 흘린 단태는 땅바닥에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 줄 모르나? 곧 시작될 승급 시험 준비만으로도 바빠 죽겠는데. 너, 종자장이라고 기고만장했지? 건방지게 굴지 마. 그래 봐야 종자니까.”

당원일은 동료들에게 가더니 오늘은 종자장 때문에 철수한다고, 대신 자기가 거하게 술을 사겠다고 외쳤다. 환호하는 동료들과 함께 중마선으로 간 당원일은 종자들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배를 타고 기루가 몰려 있는 차망로 쪽으로 가 버렸다.

종자들이 단태 주위를 에워쌌다. 그들 중 일부는 이제 막 탑에 들어온 주제에 종자장이 된 단태를 꼴사납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지만, 수련사에게 짓밟힌 종자장의 처지에 웃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종자들은 모두 수련사들에게 무시와 경멸을 당해 왔던 것이다.

단태는 말없이 일어섰다.

“……죄송해요.”

그 종자가 말했다.

“내일 실수 안 하면 됩니다. 혹시 모르니까 내일은 필요한 수의 두 배를 챙깁시다. 꼭. 다들 알겠습니까?”

단태의 말에 종자들이 작은 소리로 답했다.

종자들이 배로 돌아가자, 남아 있던 여화가 단태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니?”

“누나 말씀이 옳았네요.”

단태는 여화의 경고를 떠올렸다. 종자장의 기를 꺾어 놓기 위해서 뭐든 다 할 거라는 충고였다.

“앞으로도 쉽지 않을 거야.”

“쉬울 것 같아서 종자장이 된 건 아니에요.”

단태는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 배로 가려다가 몸을 돌려 아직도 일하는 노예들을 쳐다봤다. 왠지 그 노예의 처지가 남일 같지 않아서였다.

그때, 갈대로 덮인 늪지대에서 불쑥 커다란 악어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말뚝에 매달린 노예 한 명의 허리를 덥석 물었다. 근처 노예들은 비명을 질렀다. 감독관들은 채찍까지 버리고 달아났다. 악어에게 물린 노예와 쇠사슬로 연결된 대여섯 명의 노예들은 늪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바동거렸지만 악어의 거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단태는 이미 거기로 달리고 있었다.

여화가 금세 단태를 쫓았고, 추월해서 앞으로 나갔다.

여화는 허리띠에 찬 조그만 주머니에서 꺼낸 푸른색 구슬 한 줌을 던졌다. 허공으로 퍼져 나간 그 구슬들이 팡팡 터지자 악어들이 기겁하는 냄새가 흘러나왔는데, 사람에게는 오히려 상쾌한 향기였다. 악어는 반쯤 잘린 노예를 버리고 늪 아래로 사라졌다.

살아남은 노예들은 쇠사슬을 당겨 그 죽은 노예의 시체를 끌어 올렸다. 악어의 이빨 자국이 시체의 허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안 그래도 여윈 몸이 축 늘어져 있자, 단태는 지옥에 와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깨달았다. 노예 신세가 되었지만 이런 곳으로 끌려오지 않았다. 또한 평굉의 저택에서 악어에게 물렸지만 저렇게 허리에 구멍이 난 채로 죽지 않았다. 여전히 그 악어들이 왜 자신을 먹어 치우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자. 감독관들이 알아서 수습할 거야.”

여화가 단태의 어깨를 잡고 종자들이 기다리는 배로 걸어갔다.

“이 도시에 노예들은 얼마나 있나요?”

단태가 물었다.

“대략 5만 명은 될 거야.”

“5만 명…… 많네요.”

“그만큼 노동력이 필요하니까. 이런 간척장만 해도 열 군데가 넘고, 위험하고 더러운 일에도 노예가 필요하고.”

그 말에 단태는 처음으로 여화가 싫어졌다. 그러나 곧 노예에 대한 이곳 도시 사람의 평범한 생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바꾸었다. 그렇다고 그런 생각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탑으로 돌아오는 동안, 단태는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 점점 조급해졌다. 엄마와 설희도 저런 곳에 끌려갔을지 모른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그런 생각을 하자 서둘러야 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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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천마가 된다면 적문공추지체의 치명적인 단점을 스스로 이겨 낼 수 있다는 뜻입니까?”

륜사는 수정구 표면의 곡률 때문에 왜곡되어 우스꽝스러운 노인에게 물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 진극명은 제국에서도 알아주는 마법사였다. 비록 실력은 진마에 불과하지만 지닌 바 마법에 관한 학식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천마의 일곱 조건 중 하나인 ‘교감’을 이룬다면 결코 단명하진 않을 걸세. 세계 최고의 생명력을 자랑하는 철계목과 교감을 이루면 적문공추지체보다 더 사악한 체질이라고 해도 이겨 낼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철계목은 제국 동쪽의 거대한 숲 계림에서만 자란다는 전설의 나무였다. 워낙 단단해서 도끼로도, 심지어 어떤 마법으로도 잘라낼 수 없는 그 나무는 용령 제국의 태조 연마편이 손에 쥔 ‘천곤’ 때문에 존재가 알려졌다. 연마편이 함정에 빠져 추격을 당하다가 살아남기 위해 계림을 헤맬 때, 우연히 보게 된 철계목이 스스로 가지 하나를 내주었는데 연마편은 그 무거운 나무 몽둥이를 손에 쥔 이후 승승장구 해서 부패로 얼룩진 가파랑 연방을 무너뜨리고 용령 제국을 세웠던 것이다.

황제가 된 연마편은 다시 그 철계목을 찾으려고 사람을 보냈는데, 아무리 숲을 뒤져도 철계목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도 인상적인 내용이었다.

“어르신은 참 농담도 재미있게 하십니다. 대체 누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천마의 경지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대마법사 하랑이 있지 않은가?”

“…….”

하랑은 용령 제국의 건국 당시에 활동했던 대마법사로 그 행적이 보통의 대마법사와는 시작부터 달랐다.

하랑은 어릴 때 부모에게 버려졌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몸도 마음대로 가누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하랑을 불쌍히 여긴 기루의 주인이 주워다가 키웠는데, 하랑은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말을 배웠고 몸동작도 익혔다.

그 결과 열 살쯤 되어서야 보통 아이들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있었다.

열두 살쯤, 불행으로 점철된 하랑에게도 드디어 행운이 찾아왔다. 지금은 죽어서 사라진 현룡 무한주를 만나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현룡 무한주는 당시 마법을 펼쳐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다가 하랑을 만났다. 무엇이든 하나에 꽂히면 진득하게 그것만 하는 하랑은 성인이 되기 전날 밤을 지새운 끝에 천마의 경지에 올랐다.

그 이야기는 장차 마법사를 꿈꾸는 소년, 소녀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륜사 역시 어린 시절에 그 이야기를 듣고 언젠가 하랑 같은 마법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자네가 아는 그 적문공추지체를 가진 아이는 몇 살인가?”

“올해 열여섯입니다.”

“앞으로 4년 남았구먼. 서둘러야겠어.”

“……차라리 그 아이를 어르신께 보낼까요?”

“내게? 그 아이에게 원한이 있다면 보내게. 내가 죽여 줄 테니까. 그 누구도 그 아이를 가르쳐서 천마로 만들 순 없네. 잠적해 버린 지 수십 년이 지난 백휘섬선 광오선이 그 아이를 받아 준다고 해도 어려울 거야. 천마는 가르침을 받아서 오를 경지가 아니라는 점은 자네가 더 잘 알겠지. 그러니 누가 그 아이를 가르치는 게 중요하지 않네. 그 아이 스스로 얼마나 절박하게 한계를 돌파하는지가 중요하지. 물론 세상에는 의지만으로 해결 못하는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말일세.”

“그래도 천마의 자리에 오른 분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한번 천마에 오른 마법사에게 물어보게. 어떻게 천마가 되었는지. 다들 모르겠다고, 고민하다가 어느 날 징조도 없이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할 테니까. 천마는 이전의 경지와는 질적으로 달라. 노력으로 밀고 나간다고 해서 올라갈 수 있는 경지가 아닐세. 자네가 만약 그런 마음을 계속 품는다면 그토록 꿈꾸는 천마는 자네와 영영 관계가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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