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81화 (81/293)

<-- 81 회: 2-40 -->

륜사는 몇 년 전부터 마법의 경지가 정체되었고, 더 이상 발전이 없다는 점을 느끼고 있었다. 일사천리, 파죽지세로 용마까지 올라온 천재 마법사에게도 한계가 느껴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개인적인 질문이었다.

“시야를 넓히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천마는 하늘이 내려 준다네. 그러니 그 하늘의 마음에 들어야 받을 수 있지 않겠나? 일년 동안 할 이야기를 오늘 다 해 버렸군. 다시는 연락하지 말게.”

진극명은 그대로 사라졌다.

시야를 넓혀라?

하늘이 내려 준다?

하늘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뜬구름 잡는 충고지만 없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한 륜사는 평소 생각한 바를 틈틈이 기록하는 수첩에 진극명의 조언을 써넣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어도 언젠가 무릎을 치고 탄성을 터트릴 날이 올지 누가 알까?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는 모조리 연락했다. 그 때문에 무려 1천 마전이라는 거금을 써 버렸다. 륜사는 더 이상의 연락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정보를 모았으니, 이제는 행동할 차례다.

목표는 황당하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음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 다행히 단태에겐 타고난 재능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하랑처럼 행운이 따라 준다면 죽음보다 먼저 천마의 경지에 오를 수 있으리라.

순간, 륜사는 그 행운이 이미 찾아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녀석, 하랑처럼 될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차 버렸어! 고룡 암탄주의 유산에는 분명 하랑을 대마법사로 만든 현룡 무한주의 지혜도 들어 있었을 텐데…….’

정말 안타까웠다.

아무것도 모르고 보물을 발로 차 버렸다니.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다.

륜사는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

사흘 연속 마법진 설치가 중단되었다.

첫 번째 날은 여분의 두루마리 부족으로, 어제는 종자가 건넨 음식을 먹고 수련사 하나가 복통으로 빠지는 바람에, 오늘은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마법진 설치는 불가능했다.

수석수련사 당원일은 이 모든 게 종자장 단태 때문이라고 단언하며 폭언을 하고 손찌검을 일삼았다. 부탑주 륜사는 공식적으로 단태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없고, 단태의 할아버지 타마 엄포윤에게는 힘이 없었다. 당원일은 단태를 지지할 배경이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노골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빗물 웅덩이에 처박힌 단태는 겨우 일어섰다. 종자들 앞에서 사흘 연속 이런 수모를 당하니 분이 치밀어 올랐지만 흥분 상태로 당원일에게 달려드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그건 당원일이 원하는 행동이었다. 어쩌면 그런 행동을 유도하기 위해 이렇게 비열하게 나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종자장이 된다고 해서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전보다 삶이 어려워질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 사흘은 지옥 같았다. 종자들은 힘없는 종자장을 은근히 무시하고, 수련사들은 대놓고 경멸을 드러냈다. 이 모든 게 배경 없는 사람이 겁 없이 종자장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이다가 란조의 노랫소리에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고,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아 며칠 만에 볼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비를 맞고 선 단태 앞에 당원일이 다가왔다. 종자가 당원일이 젖지 않도록 우산을 들고 따라왔다.

“내일이 마지막 기회다. 내일도 이런 식이면, 넌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당원일은 히죽 웃고는 수련사들을 데리고 중마선으로 가 버렸다.

첫날과 달리 종자들은 단태에게로 오지도 않고 주섬주섬 짐을 챙겨 배로 향했다. 그들은 단태가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단태는 때린 수석수련사보다 그 종자들의 행동이 더 섭섭했다. 한편으로는 저들을 탓할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런 횡포를 이겨 낼 만한 힘이 있었다면 저 종자들도 사흘 연속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자업자득인가?’

단태는 피식 웃고 말았다.

종자장이 된 이유는 엄마, 설희 그리고 위연미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는데, 인구등록대장을 보고도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11인위원회 중 누가 데려갔는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열한 개의 가문을 다 뒤지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일이 더 크게 꼬일 것이다. 게다가 요즘엔 그럴 시간도 없었다.

오늘은 여화도 오지 않았다. 부탑주 륜사가 지시한 일 때문이었다. 홀로 간척장 입구에 남은 단태는 비를 맞으며 저 멀리 간척장 끝자락에서 일하는 노예들을 쳐다봤다. 언제 어디서 악어가 나타나 공격할지 모르는데도 그들은 꾸역꾸역 일할 수밖에 없었다. 꾸물거렸다가는 감독관의 채찍에 살점이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때, 빗줄기가 멈췄다.

아니, 누군가 우산을 씌워 주었다.

“……스승님?”

“보기 좋구나.”

명국영이었다.

단태는 자신의 꼴이 어떻게 보일지 잘 알았다. 그래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왜 그렇게 미련한지 모르겠다.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느냐? 길이 막히면 돌아갈 줄도 알아야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언제까지 당하고만 있을 거냐?”

“수련사들의 지시를 거부할 수는 없어요.”

“누가 거부하라고 했느냐?”

“전 제가 뭘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싸움에도 기술이 필요하단다. 그 기술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바로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거지. 물론 상대가 뭘 가지고 있는지도 알아봐야 한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절대 질 수 없어. 자, 넌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단태는 생각에 잠겼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부분을 들여다보면 길이 나타날 게다. 무엇보다 항상 ‘생각’하거라.”

명국영은 단태에게 우산을 쥐여 주고 자신은 비를 맞으며 선착장으로 걸어갔다.

우산을 쓴 채 단태는 작업 중인 노예들을 쳐다보았다. 마치 거기에 답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러나 노예들을 묶고 있는 쇠사슬만 유독 도드라졌다. 단태는 자신도 모르게 발목을 내려다봤다. 자신을 묶고 있는 쇠사슬 따위는 없는데도, 왠지 저 노예들처럼 어딘가에 묶여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뭔가가 자신을 묶고 있었다.

답답한 나머지 우산을 놓치고 그대로 주저앉은 단태는 비를 맞으며 흥건히 물이 고인 조그만 웅덩이를 내려다봤다. 순간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없다는 이유로 놀리는 아이와 맞붙었는데, 그때도 비가 많이 왔었다. 덩치 큰 녀석인데 힘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녀석을 물고 늘어졌고, 결국 그 녀석은 울면서 놔 달라고, 다시는 놀리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했었다.

그때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단태는 무엇이 자신을 묶고 있는지 깨달았다.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11인위원회의 일원인 당현추가 이끄는 당가라는 힘 있는 가문 때문에 위축된 것이다. 수석수련사라는 그 지위에 겁먹고 만 것이다.

‘난 노예가 아니야.’

단태는 몸을 돌려 선착장으로 향했다.

@

“……뭐야?”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승급 시험을 위해 연구실에서 공부에 여념이 없던 당원일은 쟁반을 들고 연구실로 들어선 단태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동탄은 복통으로 누워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단태는 음식이 놓인 쟁반을 책상 옆에 내려놓았다.

“왜 하필…….”

“다른 종자들은 바빠서요. 그나마 제가 여유가 있는 편이라서 왔는데, 불편하십니까?”

“불편? 흥, 좋아.”

배가 고팠던 당원일은 요리를 먹으면서도 방 한쪽에 서 있는 단태를 힐끔거렸다. 사람들 앞에서 무참히 짓밟은 상대가 저기 말없이 서 있으니 음식이 어디로 넘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무시하고 먹는 데 열중했다.

밥을 다 먹은 당원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약제실장님께 가 봐야 하니까 돌아올 때까지 청소나 깨끗이 해 둬. 알겠나?”

“네, 수석수련사님.”

“먼지 하나라도 있으면 죽을 줄 알아.”

“알겠습니다.”

얌전하게 대답한 단태는 당원일이 연구실을 나가자 청소를 시작했다. 그러나 곧 동작을 멈춘 그는 승급 시험을 위해서 당원일이 오랫동안 정리해 둔 공책, 수첩 등을 찾아내어 미리 준비해 온 가방에 넣었다. 가방을 종자방의 창고로 내려가서 숨기고 올라온 그는 품에서 소족 하나를 꺼냈다.

“날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단태는 그 두루마리를 찢었다.

섬광과 함께 불길이 연구실 책상에 쌓인 책과 서류에 옮겨 붙었다. 그 화염은 게걸스럽게 종이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불꽃이 책상은 물론 서류와 벽까지 번진 후에야 단태는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고는 복도로 달려 나갔다.

“불이야! 불이야!”

그 소리에 지나가던 종자들이 몰려들었고, 수련사들도 하나 둘씩 다가왔지만 정작 그 방의 주인 당원일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화재 때문에 수계 마법이 담긴 두루마리를 들고 다니는 수련사 몇 명이 뻘건 화염으로 가득한 연구실로 들어가 그 두루마리를 찢었다. 그러자 차가운 물이 연구실로 쏟아졌다. 불에 타 버린 종이와 책은 이제 거센 물살에 찢어졌다.

그때야 당원일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불길은 잡혔지만 연구실은 엉망진창이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죄송합니다, 수석수련사님. 청소를 하는데 갑자기 불길이 치솟아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당원일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주먹을 휘두르고 쓰러진 단태를 짓밟았다. 승급 시험을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준비한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려 정신을 잃은 것이다. 이 순간 당원일은 이 재수 없는 종자 새끼를 죽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 때문에 누군가 어깨를 잡자 팔꿈치를 휘둘렀다. 그러나 팔꿈치는 상대의 턱을 강타하지 못했다. 오히려 관절이 시큰거렸고, 힘이 빠져 주저앉고 말았다.

팔이 꺾인 채로 얼굴이 피범벅인 단태 옆에 앉은 후에야 당원일은 자신의 어깨를 잡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바로 부탑주 륜사였다. 륜사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 저는…….”

“탑이 잘 돌아가는군.”

“부탑주님의 종자가 일부러 제 방에 불을 질렀습니다. 제가 그동안 승급 시험을 준비했는데, 그게 다 불타 버렸습니다. 대체 관리를 어떻게 하신 겁니까?”

당원일은 흥분한 나머지 해서는 안 될 말을 해 버렸다. 그것도 수십 명이 몰려든 상황에서. 상대는 이 탑의 수장이었다. 용금탄의 마둔수탑을 이끄는 누마탄 탑주가 있지만, 이곳의 책임자는 분명 륜사였다. 그런 륜사를 걸고넘어진 셈이다.

일개 수련사가 용마의 경지에 오른 탑 최강의 마법사를 건드린 것이다.

평소 당원일을 도와주던, 당원일 편을 들던 수련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당가의 위세가 아무리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지만 저 상황은 되돌릴 수 없었다. 당장 수련사 지위를 잃고 탑에서 쫓겨나도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정신이 아니군. 자네 이름이 뭔가?”

“나, 나는…….”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당원일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사부님.”

그때, 단태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던 그를 창수가 다가와 부축했는데, 눈두덩이 부어 엉망진창이었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감은 것처럼 주위가 부어 있는 채로 단태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당원일과 차갑게 그를 노려보는 륜사를 번갈아 쳐다봤다. 힘을 내어 홀로 선 단태가 륜사 앞에 섰다.

“제 실……수로 연……구실이 불타…… 버렸습니다. 그러니 벌을 주신다면 제게 주십시오.”

그 말에 륜사도, 당원일도 깜짝 놀랐다. 륜사는 이미 한 번 겪은 터라 금세 평정을 찾았지만 당원일은 달랐다. 대체 단태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단태가 어쩌면 순진하고 착한 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당원일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한 번쯤은 실수할 수도 있지만, 반복된다면 용납할 수 없어. 알겠나?”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당원일은 목이 쉴 정도로 외쳤다.

륜사가 당원일을 두고 가 버리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씩 자리를 떴다. 당원일과 가까운 수련사들도 가 버렸고, 단태의 눈짓에 창수도 그곳을 떠났다.

당원일과 단태만 남았다.

“너 덕분에 살았다.”

“……제 실수인걸요.”

“맞아. 애초에 불을 내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을 거다.”

위기에서 벗어나자 당원일은 오만한 평소 태도를 되찾았다. 몸에 밴 분위기였다.

그러나 곧 현실을 깨닫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당원일은 물로 흥건한 연구실로 들어가서 자료를 찾아봤다.

다 타 버렸다!

비록 핵심 사항은 머릿속에 구겨 넣었지만 승급 시험은 결코 암기력만으로 통과할 수 있는 간단한 시험이 아니었다. 수많은 자료를 체계적으로 요약하고도 서너 번은 떨어질 만큼 난해한 시험이었다. 다른 수련사들의 요약본은 소용이 없었다. 오직 자신만의 자료가 없으면…… 끝이었다.

‘난 망했어…….’

이 모든 것이 저 조그만 종자 새끼라는 생각이 들자 당원일은 조금 전 그 큰 실수도 잊어버리고 몸을 돌려 단태를 노려봤다. 살기가 담긴 시선이었다.

단태는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콧등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당원일을 도발했다.

“그만 쳐다봐. 눈깔 빠지겠다.”

“…….”

당원일은 귀를 의심했다.

“날 무시했지? 저게 그 결과야.”

단태는 손등으로 피나는 입술을 훔치고는 손가락으로 불타 버린 연구실을 가리켰다.

“이 새끼!”

당원일이 주먹을 앞세우고 다가왔다.

“자료, 내가 따로 보관해 뒀어.”

“……뭐?”

“앞으로 한 달 남았는데 그 시간으로는 승급 시험을 통과하기 어렵겠지? 그 자료가 반드시 필요할 거야. 안 그래?”

“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내일 간척장 마법진 설치.”

“…….”

“싫으면 말고.”

“……알았다.”

“종자들은 아무도 따라가지 않을 거야. 당신이 나서서 수련사들을 데리고 배급실에 가서 직접 두루마리를 챙겨. 그리고 간척장으로 가서 설치를 마쳐. 그러면 자료를 돌려줄 수도 있어.”

그 말에 당원일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단태를 노려봤다. 그래, 일단은 저 녀석의 말대로 하리라. 자료를 확보한 다음에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도 늦지 않는다. 하루에 끝내지 않게 천천히 자근자근 밟아서 말려서 죽일 것이다.

“좋다. 그렇게 하지.”

“수고해.”

단태는 돌아서서 최대한 비틀거리지 않으려 애쓰며 복도를 걸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당원일의 시선이 느껴졌다. 당원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잘 알았다. 내일 마법진은 수련사들이 알아서 설치하겠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둘 중 하나가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단태는 끝까지 버틸 자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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