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84화 (84/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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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노예가 자유인 흉내를 내는 것, 즉 노예가 그 본분을 잊고 자유인 행세를 하는 것은 상당한 중죄였다. 신분 제도 자체를 무너뜨리는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탑에서 쫓겨난 단태는 이제 시법원에 끌려가 재판을 받을 텐데, 그와 유사한 사례를 찾아본 명국영은 종신노역이라는 판결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죽을 때까지 강제노동에 시달릴 텐데, 아마도 단태가 얼마 전에 직접 봤던 그 간척장에 있던 노예의 신세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고심 끝에 명국영은 한 가지 해결책을 생각해 냈다. 완벽하진 않지만 최악의 상황에서 단태를 구해 낼 방법이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단태가 현재 노예라는 사실이었다. 노예가 종자가 되었다? 더군다나 종자장이? 그 사실이 알려지면 단태는…… 괘씸죄로 종신노역이 아니라, 사형을 받을 수도 있었다. 원래 재판은 법률에 의해 판결이 내려지지만, 사람이 개입된 터라 도시의 여론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노예라는 꼬리표를 떼 내야 한다!

명국영은 결심을 굳히고 즉시 엄포윤을 찾아갔다. 연구실에서 논문 작성에 여념이 없던 엄포윤은 륜사의 친구이자 단태의 학문 스승인 명국영을 보고는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명 선생께서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소?”

“손자분에 대해 의논드릴 일이 있어서요.”

명국영은 약재 냄새로 그득한 연구실을 둘러보며 답했다.

“아, 그렇소? 그러면 뭐든 말해 보시오. 손자를 위해서라면 난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말이오.”

“단태, 내게 넘겨주십시오.”

명국영은 핵심을 찔렀다.

“…….”

할 말을 잃은 엄포윤.

“당신이 단태를 실험 재료로 사들였다는 것, 알고 왔습니다. 그러니 단태를 내게 파십시오.”

“나, 나는…….”

“지금은 나 혼자만 알고 있지만, 곧 세상이 알게 될 겁니다. 륜사가 이 일을 알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당신도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난 단태가 다치는 걸 원치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내게 돈을 받고 단태를 넘긴다면, 그래서……”

“명 선생이 단태를 자유인으로 풀어 준다면 문제가 없을 거라는 뜻이군.”

엄포윤은 어느새 평정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명국영이 왜 찾아왔는지까지 알아차렸다.

“노예 매매는 워낙 다양하고 많아서 매매 기록은 뒤늦게 추가될 경우도 많습니다.”

명국영의 뜻은 명백했다. 단태가 종자가 되기 전에 이미 명국영이 엄포윤으로부터 단태를 구입했을 뿐 아니라, 단태를 자유인으로 풀어 주었다면 진실이 알려져도 비난만 받을 뿐 단태가 탑에서 쫓겨나거나 시법원으로 끌려가서 다치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게 명국영의 생각이고, 이곳에 온 이유였다.

“소문대로 똑똑한 분이시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좋은 해결책이오. 허나, 한 가지가 부족하군요.”

“……뭐가 부족하다는 겁니까?”

명국영은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을 노려봤다.

“난 거금을 들여, 사실 횡령이라고 해도 좋을 거액을 투자하여 단태를 데려왔소. 단태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말이오. 만약 내가 단태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단태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오. 노예의 운명이라는 게 그렇지 않소? 또한 원치는 않았지만 난 단태를 손자로 받아들였고, 오늘날 종자장이 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소. 이런 상황에서 대체 얼마를 받고 단태를 명 선생에게 넘겨야 할지 모르겠군요.”

“……얼마면 되겠습니까?”

분노를 억누른 명국영이 물었다.

“어허, 왜 이리 서두르는 거요? 찬찬히 따져 봐야 하지 않겠소? 명 선생께서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단태는 기이한 체질을 타고났소. 바로 풍혈지체요. 역시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소. 풍혈지체는 대단히 위험한 체질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마법의 재능은 상상할 수도 없소. 단태 그 아이라면 풍혈지체의 단점을 충분히 극복하리라 나는 믿고 있소. 아무것도 없는 아이가 스스로 종자장이 된 것만 봐도 믿을 만하지 않소?”

“뭘 말하고 싶은 겁니까?”

“천린풍탑.”

“…….”

명국영은 눈을 감았다. 이 늙은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제야 깨닫다니. 이렇게 멍청할 수가 없었다.

“만약 명 선생께서 그 아이가 날 도와서 천린풍탑을 찾는 데 전적으로 찬성하신다면 난 당장이라도 단태를 선생께 넘기겠소. 돈 한 푼 받지 않아도 좋소.”

“……반대한다면?”

“안타깝지만 난 그 아이의 할아버지 노릇을 계속할 생각이오. 아니, 본격적으로 할 생각이오.”

“본격적으로? 무슨 뜻입니까?”

“아직 몰랐소? 노예 등록소를 뻔질나게 드나들기에 알고 있는 줄 알았더니만. 단태는 가족을 찾고 있소. 엄마와 여동생이라지, 아마? 난 내 나름대로 그 가족을 찾는 중인데, 다행히 얼마 전에 단태의 엄마가 어디 있는지 알아냈소.”

엄포윤은 느긋하게 말했다.

“그래서 뭘 어쩌려는 겁니까?”

“내가 엄마를 찾아 준다면 단태가 날 어떻게 생각하겠소? 의심이 남아 있다고 해도 은인으로 날 대하지 않겠소?”

그 말에 명국영은 달려들어 저 노인의 입술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겨우 충동을 참아 낸 그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저 교활한 늙은이를 상대하려면 혈기를 죽여야 한다. 상대는 지혜로운 인물이었다.

순간, 저 노인이 왜 이리 당당할까 의문이 생겼다. 단태가 노예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평생 마둔수탑에서 살았던 저 노인도 탑에서 쫓겨나고 말 텐데. 무언가 믿는 배경이 없다면 저런 태도는 불가능할 텐데. 대체 저 노인 뒤에 누가 있을까?

말도 안 되지만, 명국영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맞아. 그는 젊은 시절에 천린풍탑을 찾아서 대륙을 헤맨 적이 있었어. 그라면 저 노인을 도와준다고 말했을지도 모르지.’

명국영은 이 추측을 발설하여 저 노인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만 꾹 참았다. 이런 비밀은 나중을 위해 아껴야 한다. 언젠가 급소를 단번에 물어뜯어 죽여야 할 때를 위해서.

“좋습니다. 단태가 천린풍탑을 찾는 데 힘을 보태겠습니다.”

“말이 아니라, 증표를 주셔야겠소.”

엄포윤은 붓과 종이를 가져왔다. 각서를 쓰라는 것이다.

명국영은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일필휘지 써내려갔다. 용문거 수석다운 글에 엄포윤은 탄성을 터트렸다. 글이 살아 있어서 움직이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한 배를 탔소.”

엄포윤이 손을 내밀었다.

“……그렇습니다.”

그 손을 잡은 명국영은 활짝 웃었지만, 언젠가 이 배에서 저 교활한 늙은이를 던져 버릴 생각이었다.

언젠가는.

명국영은 엄포윤과 노예 등록소로 가서 그 담장자를 통해 장부에 기록을 추가했다. 엄숭이 구매한 노예 장융은 이제 명국영의 소유가 되었다. 명국영은 자신의 이름이 처음으로 노예등록대장의 구매자 명단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평생 노예를 거느리지 않겠다고 한 맹세를 이런 식으로 깨뜨리게 되는군.’

이제 단태에 관한 진실이 알려진다고 해도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면 맹세를 깨뜨린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명국영은 애써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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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째 시간이 날 때마다 물에 손을 담그고 집중에 집중을 거듭했던 단태는 결국 지치고 말았다.

사람이 한 가지 일에 정신을 쏟아부어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피부가 물에 불어 주글주글했는데, 살짝 건드려도 피부가 너덜너덜해지며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얼마나 들락거렸는지 이 창고는 답답하고 지루한 공간으로 낙인이 찍혔다. 진절머리가 날 만큼 이 창고가 싫었다.

쳐다보기도 싫을 만큼.

“대체 언제까지 이걸 해야 하는 거야……?”

바닥에 앉아 발로 툭툭 나무통을 건드리자, 나무통이 쓰러지며 물이 흥건히 고였다.

물을 다시 떠 오는 것도 귀찮았다. 답답한 마음에 사부님을 찾아가서 조언을 구하고 싶지만 그동안 세 번이나 찾아갔고, 노력만이 한계를 뚫을 수 있다는 냉정한 충고만 들었기에 더 이상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었다.

지친 단태는 누워 버렸다.

팔베개를 하고 올려다보니…… 천장은 시꺼먼 어둠이었다. 가져온 횃불의 빛이 저 위쪽까지 닿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어둠을 올려다보니 마치 높은 곳에서 까마득히 깊은 계곡을 내려다보는 것 같기도 했다.

위와 아래가 뒤집힌 기이한 착각이었다.

순간, 몸이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질 리는 없지만 마음만은 천장에 등을 붙이고 있다가 추락하는 사람처럼 속이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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