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85화 (85/293)

<-- 85 회: 3-4 -->

단태는 무서운데도 한편으로는 이 기이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두 번 다시 이런 순간을 경험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혼자 있는데도 누군가, 아니 무엇인가가 함께 있는 듯했다. 바람 부는 날 대나무 숲에 들어가면 강풍에 흔들려 서로 부딪치는 대나무 때문에 혼자가 아니,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근처에서 돌아다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데, 단태는 그런 현상을 은근히 좋아했다. 바람이 불 때를 기다려 혼자 대나무 숲에서 시간을 보낸 적도 많았다.

‘그때보다 더 무섭고…… 더 신기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곤두섰다.

팔과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도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비범해지는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누구나 두렵고 무서워서 달아나는 순간에 혼자 남아서 그 공포를 버티고 또 버티면 가슴 안쪽에서 이상하면서도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는데, 그건 무언가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뿌듯함 같은 것이었다.

단태는 다른 조건으로는 또래 아이들과 경쟁 자체가 불가능했다. 아버지는 술꾼에 도박에 미쳐 집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가 아무리 애를 써도 혼자 아들딸을 키우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굶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단태는 평범한 환경, 아니 평범보다 못한 조건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공포에 직면함으로써 자신도 비범해질 수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증명했던 것이다.

처음엔 두려움으로 몸이 마비되기도 했다. 그러나 조금씩 익숙해지자 단태의 가슴 안쪽 깊은 곳에는 서서히 자부심이 생겨나서 쌓였다. 단단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가 흔들려도 나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가슴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경험은 단태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라게 만들었다. 난처하고 때론 수치스러운 상황에서도 감정적으로는 견고하면서도 온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고, 태어나서 처음 겪는 상황 앞에서도 두려움에 먹히지 않고 차분한 눈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었다. 아이 특유의 충동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가끔 드러나는 이 독특한 분위기 덕분에 단태는 또래의 아이들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느낌을 주었고, 그 때문에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어?”

그 이상하고 특별한 순간, 바닥에 고였던 물이…… 아래로 떨어졌다. 아니, 실제로는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처음엔 한 방울이었다. 그러다 곧 물방울 수백, 수천 개가 마치 천천히 내리는 빗방울처럼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팔베개를 푼 단태는 할 말을 잃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자, 손가락 끝에 닿은 물방울이 둘로, 셋으로 갈라지며 여전히 위로 올라갔다.

그제야 단태는 공간 전체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빛의 밝기, 바닥과 벽의 질감, 어둠의 색깔까지 평소와 달랐다. 훨씬 깊고 풍부한 색깔이어서 현실보다 더 생생한 느낌이었다. 이 어두침침한 지하 창고가 비 온 뒤에 화창하게 갠 숲보다 더 선명한 느낌이랄까.

낮고 거대한 진동이 공간 전체에서 시작되어 단태의 몸으로 천천히 들어왔는데, 단태는 그 기묘한 경험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때, 진동이 점점 잦아지더니 실체를 갖춘 목소리가 변했다.

-그대가 그 인간이로군.

지하 창고를 울리는 진동은 단태의 머릿속에서도 울리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창고는…… 그 기이한 감각을 품었을 뿐 그대로였다. 문을 잠근 터라 따로 들어온 사람도 없었다. 어디서 들린 목소리인지 몰라서 허둥대는데,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지하 창고 전체가 울리며 그 목소리를 만들어 냈다.

-암탄주의 말대로 조그만 인간이야.

단태는 깜짝 놀랐다.

암탄주?

용혈에서 봤던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 아닌가? 혹시 꿈을 꾸고 있을까? 물의 막을 만들다가 지쳐서 쓰러져 자고 있는지도 몰랐다.

-인간, 꿈은 아니다.

또 다시 공간이 울렸다. 웅웅대는 소리와 흡사한 이 묵직한 음성에 단태는 화들짝 몸을 떨었다.

“……누구세요?”

-나는 수탄왕령이다, 인간.

“그게 누군데요?”

단태가 물었다.

-암탄주가 그대를 정확히 파악했군. 무식하나 진실된 인간이라고. 나는 물의 정령왕이며, 넌 나의 계약자이자 대리인이다. 자, 이 계약을 받아들이겠느냐?

정령이라는 말에 단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종자장 필기 시험을 준비하면서 독파한 여러 권의 책에는 정령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경지가 높아질수록 마법의 깊이도 달라지는데, 마법사들 중 일부는 정령과 계약을 맺어 차원이 다른 마법을 펼치기도 했다. 계약을 맺은 정령은 소환이 가능한데, 마법사를 통하여 이 세상에 나온 정령은 독특하면서도 강력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계약은 위험한 면도 가지고 있었다. 정령은 독립적인 존재여서 자칫 잘못하면 마법사의 몸이 고갈되어 미라가 될 가능성도 있고, 정령이 통제에서 벗어나 멋대로 행동해서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무엇보다 정령이 왜 마법사의 요구에 따라 이 세상으로 나와서 마법사를 도와주는지 그 이유와 목적에 대해 알려지 있지 않아서 지혜롭고 신중한 일부 마법사들은 정령마법 자체를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단태는 대충 그 내용을 알고 있어서 스스로 정령왕이라 밝힌 목소리를 듣고 겁을 집어먹었다. 그와 동시에 이 기이한 목소리의 주인이 진짜 정령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고룡 암탄주를 아시나요?”

-내 친구였다.

용과 정령왕이 친구라니!

단태는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암탄주가 제 이야기를 했어요?”

-널 내게 맡겼다. 못 들었느냐? 암탄주답군. 나와의 계약은 네게 주어진 용의 유산이다.

“네? 전 용의 유산을 거절했는데요.”

-역시 재미있군. 감히 누가 용의 유산을 거부할 수 있느냐? 심지어 용조차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마법의 유산을 인간이 어떻게 거부할 수 있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면 왜 그 용은 저를……”

-말이 많구나. 난 물의 정령왕이다. 나와 계약한다면 넌 나를 비롯하여 물의 정령 전부를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자, 묻겠다. 나와의 계약을 받아들이겠느냐?

“아니오.”

단태는 스스로 놀랄 만큼 쉽게 답했다. 용의 유산을 거절했을 때와 달리, 이번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유는?

낮고 묵직해서 두려움을 자아내는 목소리.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크하하하하.

창고 전체가 흔들렸다. 바닥도.

두려웠지만 단태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정령왕이 가진 힘이 얼마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힘이 없다고 해도 종자장이 되어 엄마가 계신 곳을 알아냈다. 노력한다면 설희와 위연미가 있는 곳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괜히 위험천만한, 그 결과를 알 수 없는 계약 따위는 맺을 생각이 없었다.

“……그보다 물의 막을 어떻게 만드는지 혹시 아세요?”

-나 물의 정령왕 수탄왕령은 지금 이 시간부터 인간 단태의 정령이 되었음을 하늘과 땅 앞에서 선언하노라.

그 묵직한 음성에 공간이 부르르 떨었다.

단태는 깜짝 놀랐다.

“전 계약하고 싶지 않아요!”

-평범한 정령은 인간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난 그렇지 않다. 내 오랜 친구인 고룡 암탄주의 부탁을 받아들여, 나는 너의 정령이 되었다. 이제부터 너는 언제든지 나를 소환할 수 있다. 허나, 네가 날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는 날 부르지 마라. 내가 이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넌 죽을 것이다.

“……절대 부르지 않겠어요.”

단태는 속으로 다짐했다. 계약을 맺든 말든 소환하지 않으면 안전할 테니까.

-계약을 맺고도 정령을 소환하지 않은 인간이 한 명쯤 있는 것도 나쁘진 않지. 세상을 가득 채울 힘을 접하고도 사용하지 않는 인간이라, 암탄주가 사라지기 전에 날 위해 재미있는 선물을 준 셈이야. 그를 만날 수 있다면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겠군. 인간, 오늘부터 너는 나의 대리인이자 나의 계약자다. 나의 품위에 맞게 행동해라. 나 수탄왕령의 계약자답게 살아라.

“……알았어요.”

단태는 이 비정상적인 대화를 끝내고 싶어서 대충 대답했지만, 정령이 계약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난 너의 보호자이자 감시자, 너를 도와주는 동시에 너를 파멸시킬 수 있는 존재다. 너는 나를 속일 수 없다. 난 너의 일부이기 때문에. 너 또한 나의 일부이다. 너와 내가 맺은 계약은 존재가 겹쳐지는, 최고의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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