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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만약 나를 실망시킨다면 나는 수족을 잘라내는 아픔을 감수하서라도 너를, 너와 관계된 자들을 파멸시킬 것이다. 나 수탄왕령은 말에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어떻게 해야 실망시키지 않는 건데요?”
겁을 먹은 단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내가 듣고 싶은 질문이었다. 잘 들어라. 넌 진정한 용의 유산을 이은 인간이다. 다른 두 인간은 거짓으로 암탄주를 속이려 했고,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넌 용의 유산을 앞에 두고도 진실을 고수했고, 바로 그 때문에 진정한 용의 상속자가 된 것이다. 넌 앞으로 그 두 사람이 가진 용의 유산을 빼앗아야 한다. 바로 언마와 연금술이다. 그 유산은 네 것이며, 네 것이어야 한다. 넌 그 유산을 네 것으로 한 후에 진정한 목표를 이뤄야 한다. 바로 용족을 되살리는 것이다. 용의 부활이야말로 암탄주가 네게 원하는 것이다. 넌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유언을 거절했기 때문에 바로 그 유산을 상속받은 것이다.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네 능력이며, 암탄주가 남긴 언마와 연금술이 네 힘이 될 것이다. 넌 네가 아니다. 넌 나다. 그러니 스스로 절망하지 마라. 주눅들지도 마라. 네가 이 기이한 경험을 받아들인 것처럼, 나를 받아들여라. 너는 나로서 살아가거라. 이게 바로 나의 대답이다.
“…….”
단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명히 그 용 앞에서 할 수 없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용의 유산을 받지 못했다고,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저 목소리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내 말이 사실임을 네게 보여 주겠다. 이 시간 이후로 네게 물은 이전과 다를 것이다. 물이 네 뜻을 따를 것이다. 어리석지만 대담하고 진실된 인간, 부디 그 목표를 이루어라.
목소리를 이루던 진동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때, 천장까지 올라갔던 물방울들이 우수수 아래로 떨어졌다. 흡사 비가 내리는 것처럼. 내리는 위치를 차별하지 않는 보통의 비와 달리, 그 신기한 비는…… 나무통만 사랑하는 모양이었다. 단태가 발로 건드려 쏟아졌던 물은 모두……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나무통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바닥은 말라 있었다.
겨우 일어나서 나무통 안을 쳐다본 단태는 팔뚝을 어루만졌다. 소름이 돋았던 것이다.
심호흡을 하고서 뺨을 철썩 때렸다. 뺨에서 불이 났다. 꿈이 아니었다. 정말 그 목소리가 들려준 이야기가 사실일까? 내가 진정한 용의 상속자일까? 그러면 마둔수탑의 계승자이자 황제로부터 인정을 받아서 황궁에 머무는 누천파와 유타루체의 계승자인 반우현으로부터 그 유산을 빼앗아야 한다는 건가?
한참 동안 나무통을 응시한 단태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고, 곧 너무도 쉽게 물의 막이 만들어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가느다란 비단 같은 물의 막이 손을 따라 올라와 공간에서 너울지고 있었다. 횃불에 비쳐 움직일 때마다 여러 각도로 무지개 색깔을 만들어 내는 그 물의 막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단태가 별로 한 것도 없는데도 나무통 안의 물은 모조리 막이 되어 허공을 수놓았다.
거대한 비단이 공중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대체…….”
단태가 입을 연 순간, 물의 막은 방울이 되어 아래로 떨어져 다시 바닥을 적셨다.
다시 한 번 손을 뻗자, 그 물이 허공으로 올라와 막을 이루었다. 미풍에 날리는 비단처럼 허공에서 춤추는 물의 막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이게 정령왕이 말한 증거인가?’
단태는 륜사가 내준 숙제를 해냈다는 생각에 기쁘면서도 정령왕이 들려준 이야기의 무게에 마음이 짓눌렸다. 저 공중에 떠 있는 물의 박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정령왕의 존재와 그가 한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용족을 부활시켜야 한단 말인가?
노예 신세인 자신이?
가족도 지키지 못한 자신이?
앞으로 길어야 4년밖에 못 사는 자신이?
어차피 짧은 삶, 무엇이든 해 보리라.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한다면 적어도 자신에게만은 떳떳할 테니까.
일단, 엄마와 설희 그리고 위연미를 찾아야 한다. 그게 제일 중요하다. 그 문제가 해결되면…… 정령왕이 말한 것처럼, 용족의 부활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목표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순간, 황궁에서 열심히 용의 유산을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누천파와 반우현을 떠올린 단태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진실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들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단태는 똥 씹은 얼굴의 누천파, 반우현을 떠올리며 지하 창고를 벗어났다.
처음으로 그들이 두렵지 않았다.
*방단
“무슨 일입니까?”
륜사는 시장실로 들어서면서 물었다. 도시의 지배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서였다. 잡담은 명국영과 술 한잔 하면서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아직도 날 싫어하나?”
책상 뒤쪽 딱딱한 철제 의자에 앉아 있던 반명이 일어나 탁자와 푹신한 의자가 놓인 쪽으로 걸어왔다.
“좋아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앉지.”
그 말에 륜사는 상대의 위치를 감안해서 의자에 앉았지만 이곳에서 노닥거릴 생각은 없었다.
“저를 부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격 급하구먼. 좋아. 시간 절약해서 나쁠 건 없지. 계림의 남부 지역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고, 그로 인해 맹파루체에 홍수가 났네. 맹파루체의 시장이 직접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네. 바로 오늘 오전에. 홍수를 다스리는 기술은 마둔수탑을 따라갈 곳이 없기 때문이겠지. 나는 자네가 맹파루체로 가서 홍수를 잡는 데 손을 보태 주기 바라네.”
“……제가요?”
“이건 시장으로서 명령하는 걸세.”
“제가 없으면 탑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텐데요.”
“그게 사실이라면 자넨 부탑주로서 자격이 없네. 조직은 수장이 없을 때에야 비로소 그 가치를 드러내니 말일세.”
“…….”
시장의 지적이 옳았기에 륜사는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사실, 농담을 던졌는데 저 딱딱하고 재미없는 양반이 진지하게 받아치는 바람에 괜한 말을 꺼냈다고 생각했다.
“용을 준비해 뒀네. 자넨 원래 용을 타고 비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지난번 용혈에 무사히 다녀온 것을 보니 이번에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네.”
“……그러죠.”
륜사는 시장의 지시를 거절한 명분이 없었다. 용까지 준비되어 있는 걸 보면 확실히 그쪽 상황이 다급한 모양이었다. 대륙 최대의 숲인 계림은 그 지형상 폭우가 자주 내리는데, 그 때문에 계림을 관통하는 두 개의 강은 자주 범람했다. 그 강 옆에 자리 잡은 맹파루체와 파림루체는 홍수로 자주 피해를 입었는데, 이번 홍수는 제법 규모가 큰 것 같았다.
“오늘 저녁에 출발하게.”
“그럼, 저는 가서 준비하겠습니다.”
“그러게나.”
륜사는 고개만 살짝 숙인 다음, 시장실 밖으로 나왔다. 그를 쳐다보는 시장 비서관들의 시선이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시청과 탑은 전통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서로를 존중하며 관계를 지켜 왔는데, 유독 륜사는 관례를 깨뜨릴 때가 많았다. 시청의 편의를 봐주던 관례 중 상당 부분을 륜사가 부탑주가 된 이후로 없애 버린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 개의치 않고 밖으로 나온 륜사는 썰매에 올랐다. 여섯 마리의 개들이 륜사를 보고는 반가워서 짖어 댔다. 륜사는 직접 줄을 잡고 썰매를 움직였다. 칼바람을 뚫고 달리는 기분은 최고였다. 눈에 덮여 하얗게 반짝이는 도시는 넉넉하게 모든 것을 품고 있었다.
어머니처럼.
마둔수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가는 썰매에 탄 사람들이 륜사를 보고는 손을 흔들자, 륜사도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드는 대신 눈을 뭉쳐서 그 사람들에게 던졌다. 그 사람들도 륜사에게 눈뭉치를 던졌는데, 곧 한바탕 눈싸움이 벌어졌고, 다들 웃으면서 자기 갈 길로 갔다. 이런 엉뚱함 때문에 륜사는 물의 도시에게 가장 유명하고, 가장 인기 좋은 마법사였다.
탑에 도착한 륜사는 썰매를 담당자에게 넘기고 곧장 탑주실로 올라갔다. 보주관 중문석이 다가왔다.
“종자장이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륜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주관, 수련사 그리고 종자가 머무는 공간을 가로질러 탑주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창가에 서서 새하얀 도시를 내려다보던 단태가 황급히 몸을 돌려 륜사 앞으로 다가왔다.
“거기서 보니까 죽이지?”
“……너무 멋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