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88화 (88/293)

<-- 88 회: 3-7 -->

보라색과 검정색이 섞인 그 용은 날개가 몸보다 더 컸는데, 새까만 눈은 송아지의 눈처럼 맑고 깊었다. 그 용을 보니…… 수탄왕령이 한 말이 생각났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등에 고정하는 작업이 끝나자, 용이 날개를 펼쳤다. 보라색과 검정색이 교차된 그 날개가 햇빛을 받아 기이한 색깔로 변했다. 단태가 감탄하는 순간, 용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갔다 올게.”

여화의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혼자 남은 단태는 짐을 가지고 여화의 썰매가 묶여 있을 선착장으로 향했다. 그동안 저 썰매를 타고 엄마를 보고 싶을 때마다 누마탄의 저택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았다.

짐을 썰매 뒤 칸에 넣고 줄을 잡고 달리니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시청이 보였다. 도시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일하는 건물이었다. 노예 매매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지도록 결정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저 사람들의 머릿속에 뭐가 있기에 그 지옥 같은 노예 제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이 노예가 되어 봐야 심정을 알겠지…….’

순간, 단태는 저 시청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잡아다가 노예 매매소에서 노예로 팔아 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했다. 힘 있는 자들이 그런 일을 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상상은 자유니까.

마둔수탑은 밤의 어둠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썰매를 반납하고 올라온 단태는 짐을 숙소에 두고서 바로 지하 창고로 내려갔다. 사부님이 내준 과제를 해내기 위해서였다. 또한 집중을 해야 마음이 잡힐 것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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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맛이 기가 막혔다.

간소한 안주에 마시는 술인데도 취하지 않고 오히려 그 맛을 깊이 음미할 수 있었다. 명국영은 혼자 방에 앉아 술을 잔에 따르고 연거푸 마셨다. 오늘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까 급히 불러서 올라갔더니 륜사가 들려준 이야기 때문이었다.

“수탄왕령이라니…….”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는…… 맨 정신에 소화하기 어려운, 너무나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고룡 암탄주는 세상을 속일 만큼 교활했고, 그 속임수에 누천파와 반우현을 비롯하여 세상 전체가 춤을 췄다. 세상은 용의 유산을 잘생기고 예쁜 데다 배경까지 좋은 두 사람의 남녀가 차지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단태라는 아이, 노예였다가 얼마 전에야 자유인이 된 아이, 그런데도 그 자신은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가 진정한 용의 상속자였다. 게다가 고룡 암탄주는 수탄왕령이라는 물의 정령왕을 단태에게 붙여 주었다. 유언을 확실히 집행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는 대담한 조치였다.

보통 마음이 상해서 답답함을 이기려고 술을 마시는데, 오늘은 술을 마시는 기분을 본인조차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마음의 한쪽은 기뻐하고 있었다. 자신이 삶 전부를 걸고 제대로 된 인물로 만들고자 맹세까지 했던 아이가 용의 유산을 받을 진짜 상속자일 뿐 아니라, 물의 정령왕과 계약까지 했다니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로 인해서 마법의 성취가 빨라졌으니 풍혈지체로 인한 단명의 위험을 극복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당장 단태를 만나서 축하한다고 말해 주고 싶을 만큼 좋은 소식이었다.

그런데 그 마음의 반대편에는…… 이 상황을 대단히 불편해하고 있었다. 계획에 없던, 난데없이 끼어든 마차 같은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명국영은 단태가 스스로의 힘으로 역경을 뚫고 천천히, 그러나 점점 더 빠르게 목표를 이루었으면 했다.

용문거를 수석으로 합격한 이후 수도 용금탄에서 재능을 자부하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 중 다수가 부족함 없이 자라는 바람에 타고난 재주를 망치고 말았다. 빛나는 재능을 시궁창에 처박고도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서 명국영은 태어날 때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의 성장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가혹한 진실을 깨달았었다.

단태도 그런 길을 걷지 않을까?

명국영은 진심으로 걱정했다.

어쩌면 그 아이의 장점은…… 잔인한 환경을 극복하면서 얻어 낸 진주 같은 것일지도 모르는데.

문이 열렸다.

색색의 비단옷을 입은 소영이 들어왔다.

“오랜만에 오셨어요.”

“……그런가?”

“오늘은 무슨 일로 술을 마시는지 궁금하네요. 얼굴을 보니…… 슬픈 일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축하할 일도 아닌 것 같고. 신기하네요. 이런 표정은 자주 보기 어렵거든요.”

소영은 예리했다.

“이 시간이면…… 바쁘지 않나?”

“아무리 바빠도 선생께서 오셨는데 어떻게 들르지 않을 수 있겠어요?”

소영은 맑게 웃었다. 웃음을 파는 기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싱그러운 미소였다.

“감당하기 어려운 황금이 덩어리째로 주어진 기분이야. 이 기루를, 아니 이 도시 전부를 다 사 버릴 수 있는 황금 덩어리 같은 거. 한 사람이 감히 가질 수 없는 부를 손에 쥔 느낌인데,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 이런 마음, 이해할 수 있을까?”

“……조금은요.”

소영의 눈이 빛났다.

“자세한 건 물어도 대답할 수 없어.”

“여쭐 생각, 없어요.”

그 말에 명국영은 다시 술을 한 잔 마셨다. 저 소영의 기분 좋은 배려 때문에 여기로 술을 마시러 오는지도 몰랐다.

소영이 앉아 있는데도 명국영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명국영은 단태의 스승이었다.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하는 스승인데, 제자의 능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고룡 암탄주의 유언 때문에 정령왕과 계약에 성공한 단태는 정령과의 친화력만 따진다면 제국 최고일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천마의 경지에 오른다고 해서 모두가 정령왕과 계약할 수 있지는 않았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 제자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과연 자신에게 단태를 가르칠 자격이 있을까?

보다 훌륭한 스승을 찾아 줘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잠자코 있던 소영이 말을 걸었다.

“선생님은 충분해요.”

“……뭐?”

“무슨 일인지 몰라도 선생님은 할 수 있어요.”

“…….”

명국영은 감동을 받았다. 이보다 더 위로가 되는 말은 없을 것이다.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데, 바깥이 시끄러웠다.

소영이 문을 열자 아는 얼굴이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단태와 갈등을 빚었다가 오히려 가까워진 수석 수련사 당원일이었다.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명국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방단이 탑으로 들이닥쳤습니다.”

“방단?”

명국영은 그 말을 듣자마자 술잔을 놓고 벌떡 일어섰다. 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그려졌던 것이다. 소영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온 명국영은 아무 썰매가 잡아타고 탑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주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명국영은 들을 수가 없었다.

탑에 도착하자마자 안으로 뛰어든 명국영은 달라진 분위기에 숨이 덜컥 막혔다. 종자들, 수련사들 그리고 마법사들까지 모두 복도로, 계단으로 나와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들 사이로 청색 옷에 머리띠를 착용한 방단의 단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뒤이어 도착한 당원일이 숨을 헐떡거렸다.

“……부탑주의 허락이 없으면 방단이 이곳으로 들어올 수 없을 텐데, 아닌가?”

“그게, 마영국의 통윤이신 강마 탑교하 님이 허락을 한 모양입니다. 탑 내부 규율에 따르면 부탑주의 부재 시에는 마영국의 수장이 탑의 출입권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통윤은 하나의 부서를 이끄는 책임자의 호칭이었다.

“…….”

명국영은 이 모든 게 조직적인 계획이라고 확신했다. 당장 륜사에게 알려야 한다. 시장은 일부러 륜사를 운면산맥 너머 맹파루체로 보내 버리고, 방단을 탑으로 보낸 것이다. 대체 시장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순간, 단태가 떠올랐지만 시장이 직접 나서기엔 단태는 아직 어리고, 존재감도 없는 편이었다.

그때, 젊을 때는 아름다웠으나 나이가 들면서 어딘지 모르게 신경질적인 면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여자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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