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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국영 선생이신가요?”
“그렇습니다만.”
“방단을 이끄는 백율운현이라고 해요.”
그 이름을 듣자마자 앞이 캄캄해진 명국영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방단의 수장을 쳐다봤다.
“……무슨 일입니까?”
“최근에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여기 마둔수탑 내부에 추명의 끄나풀이 있다는 정보입니다. 추명이 물의 도시의 적이라는 사실은 선생도 알고 계시죠? 그러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시기가 참으로 공교롭군요. 책임자인 부탑주 륜사께서 출타하자마자 이곳으로 찾아오니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워낙 중요한 일이라서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백율운현은 몸을 돌려 단원들에게 지시했고, 방단의 단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명국영은 저 여자가 단태로 인해 종자장이 되지 못한 백율가진과 같은 가문 출신이라는 점을 생각하며, 당원일 곁으로 걸어가서 속삭였다.
“단태는 어디 있는가?”
“……찾아봤는데,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알겠네.”
명국영은 단태가 어디 있을지 알 것 같았다. 맹파루체로 간다고 기대하다가 용이 작아서 탑에 남게 된 단태는 필시 지하 창고에서 륜사가 내준 과제를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주위 분위기를 살핀 명국영은 서고에 가 봐야겠다고 중얼거리면서 지하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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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물로 만들어진 두 마리의 개와 썰매가 떠 있었다. 단태의 의지와 손짓에 따라서 그 개는 부자연스럽지만 그런대로 움직였고, 썰매는 개가 이끄는 대로 공중을 미끄러지듯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집중력이 흔들리자 개와 썰매는 물이 되어 바닥에 쏟아졌다.
주저앉은 단태는 헐떡거렸다.
“미칠 것 같다…….”
물을 움직일 수는 있지만, 마치 바위를 밀어 올리는 것처럼 힘이 들었다. 있는 힘을 다 쥐어 짜내어 만든 개와 썰매는 실제 크기보다 훨씬 작았다. 손바닥만 한 인형 크기도 지금의 단태에게는 힘겨웠던 것이다.
그래도 물로 원하는 형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게 어딘가?
사부님이 돌아오시면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그때, 쾅쾅 누군가 창고 문을 두드렸다.
깜짝 놀란 단태는 즉시 바닥에 흥건한 물을 움직여 나무통에 옮긴 다음, 문을 열었다.
“……여기 있었구나.”
“스승님?”
“당장 이곳을 벗어나서 몸을 숨겨라.”
“네?”
“자세히 설명할 수 없어. 그러니까……”
말하던 명국영은 뒤에서 내려오는 요란한 발소리가 들리자 창고 안으로 들어와 문을 잠가 버렸다.
“스승님, 왜 그러세요?”
“잘 들어라, 시간이 없으니까. 방단은 시장 직속 조직으로 도시의 안전을 위해 온갖 더러운 짓을 다 한다. 여기저기서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도시의 적을 잡아들이는데, 거기 끌려가면 사람 취급을 기대해선 곤란해. 내가 보기엔 시장과 11인위원회가 륜사의 기세를 꺾기 위해 널 택한 것 같다. 탑에서 종자는 죽어도 상관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넌 최대한 버텨라. 어떤 고문을 당해도, 어떤 고통에 시달려도, 절대 자백해서는 안 돼. 그러면 륜사가 돌아와서 널 구해 줄 거다. 알겠느냐?”
“…….”
당황한 단태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때, 문이 박살이 났다.
방단의 단원들이 빠르게 들어와 단태와 명국영을 에워쌌다. 그 사이로 백율운현이 걸어와 단태 앞에 섰다. 그녀는 명국영을 쳐다봤다.
“또 뵙네요.”
“무슨 일입니까? 난 개인적으로 부탑주의 종자와 할 이야기가 있는데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아쉽지만 나중으로 미뤄야겠네요. 방단이 이 종자에게 볼일이 있거든요.”
백율운현이 손을 내밀자 가까운 단원 하나가 낡은 책 두 권과 서류 뭉치를 가져왔다. 백율운현은 그 책과 서류를 단태 앞으로 가져와 쑥 내밀었다.
“이 책, 기억하겠지?”
“처음 보는데요.”
철썩.
백율운현의 손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소리와 함께 단태는 뺨을 맞아 허공에서 한 바퀴 돌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네놈의 침대 밑에서 발견되었는데도 부정하다니, 간이 배 밖에 나왔구나. 저 불온한 녀석을 체포해.”
그 말에 단원들이 달려들어 단태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단숨에 몸에 힘이 빠져 버린 단태는 고통도 잊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명국영을 쳐다봤다.
명국영이 나섰지만 백율운현이 앞을 가로막았다.
“한 번만 더 방해하면 누마탄 탑주께서 모셔 온 선생이라도 봐주지 않을 겁니다.”
“…….”
명국영은 여자가 내뿜는 살기에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백율운현은 피식 웃으며 앞서 걸었고, 단원들이 단태를 끌고 탑을 빠져나갔다.
겨우 정신을 차린 명국영은 륜사에게 연락하기 위해서 수정구를 찾았으나, 이미 시장과 한통속인 마영국의 탑교하가 탑에 있는 수정구를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모조리 압수한 후였다. 탑의 운영, 관리를 맡는 부서인 마영국의 수장이 시장의 수족이나 다를 바 없는 상황에서 명국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떻게든 륜사에게 알려야 해.’
명국영은 탑 밖으로 나갔다. 마둔수탑 외에도 이곳 물의 도시에는 열 개 이상의 탑이 있었다. 그 탑들을 찾아가면 수정구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정이 되도록 얼어붙은 도시를 헤맸지만 그 어떤 탑도 명국영에게 수정구를 사용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제야 명국영은 깨달았다. 저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다는 사실을. 시장이 명령을 내렸다면 이 군소탑들이 시장의 뜻을 어기고 외부인에게 수정구를 빌려 줄 리가 없었다.
‘이거 너무 비열하잖아.’
화가 난 명국영은 시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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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태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밧줄에 묶여 있지 않는데도 이 지하 석실 특유의 차갑고 피 말리는 분위기 때문에 몸이 떨렸다. 거기 앉아서 명국영이 했던 말을 생각하는데, 조금씩 이번 일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사부님이 도시를 떠나자마자 방단에 속한 사람들이 탑에 왔다는 게 심상찮다는 증거였다.
침대 밑에서 발견되었다는 그 책…… 본 적도 없었다. 서류도 마찬가지였다.
‘함정이야. 하지만…….’
단태는 이곳에서는 진실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애초에 자신을 잡기 위해서 그 책과 서류를 탑으로 가져왔을 테니까. 스승님의 말이 옳았다. 사부님의 기세를 꺾기 위해서 마음대로 처리해도 상관이 없는 종자를 잡아 온 것이다.
알면 알수록 떨림이 커졌다.
생각해 보니, 이 방에서는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잡아와서 고문을 했을까? 도시의 적을 색출해 내는 시장 직속 조직 방단이 온갖 핑계를 대고 잡아들인 사람들 중에 정말 도시의 적은 얼마나 될까?
서서히 분노가 공포를 집어삼켰다.
저들에겐 이런 짓을 할 권리가 없다!
그때, 문을 열고 백율운현이 들어왔다. 묵직한 서류 뭉치를 손에 들고서. 그녀는 단태 맞은편에 앉았다.
“기분이 어떠니?”
“…….”
“아깐 좀 아팠지? 네가 미워서 그랬던 건 아니야. 보여 줘야 했거든. 사람이든, 짐승이든 첫인상이 중요하잖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거기 있는 사람들이 봐야 하니까.”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무슨 뜻이니?”
백율운현의 표정이 돌변했다.
“아실 텐데요.”
단태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상대를 건드리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이렇게라도 분을 풀고 싶었다.
“참 재미있는 아이구나. 내 인상이 그렇게 더럽니? 그런 연출을 하지 않아도 다들 알 만큼? 건방진 륜사의 종자라 그런지 간이 배 밖에 나왔구나. 그렇다면 거기에 걸맞은 대접을 해 줘야지. 참고로 넌 내가 방단의 단장이 된 이후 처음으로 맞은 손님이란다. 그러니 최대한의 솜씨를 발휘할 생각이야. 기대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