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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율운현은 가져왔던 서류 뭉치를 들고 밖으로 나갔고, 곧 건장한 사내들이 들어왔다.
손에 갖가지 도구를 들고.
단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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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국영은 계단을 굴렀다.
시청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이 밀어 버리자 그는 두 팔로 허우적거리며 겨우 균형을 찾았으나 험상궂은 인상의 병사 하나가 다가와 어깨로 명치를 치자 명국영은 70개나 계단을 굴러서 떨어졌다. 손가락이 뒤로 꺾이고, 발목이 접질렸으며, 계단 모서리에 턱이 부딪혔다. 입고 있던 옷이 찢어졌고, 등이 부서진 것처럼 아팠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굴러떨어진 후에야 명국영은 바닥에 누운 채 하늘을 쳐다볼 수 있었다.
항의하러 온 시민을 병사들이 이런 식으로 대하다니.
처음부터 이런 대접을 받을 거라는 사실, 알고 있었다. 그래도 올 수밖에 없었다.
용금탄은 물론 칠성시를 두루 돌아다녔던 그는 방단과 같은 조직이 어디에나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서쪽의 활화산에 자리 잡은 불의 도시 방염루체에서는 정체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잡혀서 지하 감옥에 갇힌 적도 있었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하루 만에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 공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도시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방단 같은 조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적을 사전에 색출해서 피해를 줄이겠다는 의도로 만든 그 조직은 사실 도시의 적이 아니라, 도시를 지배하는 자들의 적을 잡아서 족치고…… 죽이는 조직이었다.
마둔수탑의 부탑주이자 최강의 마법사인 륜사를 직접 건드릴 수 없으니까 단태처럼 힘없는 사람을 잡아가서 고문하고 죽여서 간접적으로 륜사에게 경고하려는 의도는 너무나 명백해서 말할 가치조차 없었다. 계속 뻣뻣하게 나온다면 더한 짓도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단태를 통하여 륜사에게 전하려 한 것이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내려서 세상을, 도시를 덮는 그 눈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 용문거에 합격한 후에 꾹 참고 관리가 되었을 텐데. 그랬다면 시민을 가파른 계단 아래로 밀어 버리고도 시시덕거리는 놈들은 물론 저 위압적인 건물을 책임지는 시장까지도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그 구정물 같은 세계가 더러워서 아예 시작하지도 않았었다. 이 순간, 더러움을 피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절박하게 깨달았다. 때로는 더러워도 꾹 참고 그 안에 뛰어들 필요도 있는 것이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명국영은 마둔수탑보다 훨씬 높은 시청의 탑을 올려다봤다.
“……고맙군. 내게 이런 깨달음을 줘서.”
돌아선 그는 무엇을 할지 생각하며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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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운재의 소집 명령에 추명의 사람들이 은밀한 장소에 모여들었다.
그 지하 석실로 걸어가던 철무는 이미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하층민에게 유독 우호적인 결정을 내려온 마둔수탑의 부탑주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시장의 직속 조직 방단이 움직여 마둔수탑을 덮쳤고, 아무 잘못도 없을 어린 종자를 시청으로 끌고 갔다. 그 의도는 불 보듯 뻔해서 세상 이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혀를 찰 일이었다.
철무는 번운재의 소집이 바로 그 일과 관련이 있다고 확신하며 석실로 들어섰다.
윤강이 그를 쳐다봤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한때는 추명의 다음 지도자가 되기 위해 경쟁을 했으나 철무가 스스로 포기하는 바람에 윤강이 유력한 차기 지도자로 부상한 터라, 두 사람의 관계는 어색하고 불편한 부분이 있었다.
추관구가 들어와 철무 곁에 앉았다.
“모인 이유, 방단 때문이겠죠?”
“아마도.”
“끌려간 종자가 지난번에 어르신의 손자를 구해 낸 그 종자라면서요?”
“……그래.”
철무는 자신을 찾아왔던 종자를 떠올렸다.
기이한 궁금증을 자아낸 녀석이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과거의 흔적들을 함께 지니고 있는 녀석에 대한 관심을 술로 끊어 버렸는데, 이런 식으로 그 고리가 다시 연결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순간, 그는 단태라는 녀석과 자신이 운명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했다. 물론 고개를 흔들며 그럴 리는 없다고 되뇌었다.
곧 번운재가 들어왔다.
사내들은 일제히 일어나서 추명 지도자에 대한 예의를 표했다.
“앉게. 눈치채고 있겠지만 시장이 움직였네. 방단을 통해서 말이야. 마둔수탑의 부탑주 륜사는 개인적으로 추명에 호의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일 처리가 공평해서 알게 모르게 우리 추명을 도와주었다네. 그런 성향은 시장에겐 골칫거리였지. 그런데 오늘 륜사가 맹파루체로 갑자기 출타하자마자 방단이 마둔수탑을 수색해서 단태라는 종자를 잡아갔네. 그 의미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걸세.”
번운재는 잠시 믿음직한 사람들을 쳐다본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내 손자를 구했네. 허나, 개인적인 감정으로 이번 일을 결정한 건 아닐세. 추명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네. 그 아이를 시청에서 빼내야겠네.”
“……쉽지 않을 겁니다.”
윤강이었다.
“알고 있네. 원치 않는 희생이 생길 수도 있어. 그렇다고 해도 반드시 데려와야 해. 륜사가 돌아오고 있을 테니 그 종자의 안전만 확보하면 우리는 뒤로 물러나면 돼. 륜사가 시장과 담판을 지을 테니 말이야. 시장은 이번에 단단히 실수를 했네. 알아봤더니, 단태라는 종자를 륜사가 아끼는 모양이더군. 륜사는 일단 받아들인 아랫사람을 챙기기로 유명하지. 그러니 시장은 한동안 륜사와 싸우느라 다른 일에는 신경도 쓰지 못할 걸세. 그건 바로 우리 추명의 기회라고 볼 수 있네.”
“…….”
사내들은 말이 없었다.
방단의 고문실은 시청 지하에 자리 잡고 있어서 접근이 까다로웠다. 각고의 노력 끝에 시청 내부에 성공적으로 잠입한 첩자가 있지만 이번 일을 위해서 그 정체를 드러내게 해야 할지도 고려의 대상이었다. 6할에 달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이번 일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 점을 눈치챈 번운재가 철무에게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다들 철무를 쳐다봤다. 실제로 적과 맞서 싸우는 능력은 윤강이 위일지도 모르나 전체적인 상황 판단이나 예리한 통찰력은 철무가 한 수 위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었던 것이다.
헛기침을 한 철무가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 말에 번운재는 고개를 끄덕였고, 몇 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추명은 위계질서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조직이라 반대 의견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었다.
“허나,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철무의 말에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설명해 주게나.”
“……어르신 말씀처럼, 륜사는 오랜만에 나타난 공평한 마법사입니다. 융통성이 없는 편이지만, 원칙에 근거해서 일관성 있는 판단을 하는 것만으로도 추명뿐 아니라 하층민 모두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뿐 아니라, 륜사로 인해 다른 마법사들도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륜사의 결정은 이 도시에 존재하는 군소탑의 결정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마법사들의 결정은 상업조합에도 영향을 줍니다. 그런 식으로 도시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는데, 바로 그 때문에 시장이 무리수라고 해도 좋을 방법을 동원한 겁니다. 그러니 그 단태라는 아이는 앞으로 도시가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한 시금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장이 방단을 앞세워 그 아이를 고문하고 죽인다면…… 이 도시는 여전히 11인위원회의 가문들이 통치하는, 그래서 썩어 가는 그들만의 세상이 될 겁니다. 반대로 그 아이가 멀쩡히 살아서 나온다면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기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반드시 그 아이를 구해야 합니다.”
“반대쪽 설명도 부탁하네.”
번운재가 말했다.
“문제는 시장은 멍청한 놈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생각한 부분을 그 녀석이 고려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시장은 추명이 움직일 거라고 예측할 테고, 그러면 이번 일은…… 제 발로 함정 안으로 걸어가는 꼴이 될 겁니다.”
“함정이라…….”
번운재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