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92화 (92/293)

<-- 92 회: 3-11 -->

-뭐? 당해 보면 안다? 크하하하, 재미있는 인간이구나. 감히 나 수탄왕령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무례한 말을 할 정도면 아직 끝은 아니로군. 인간, 난 네 소환을 거절한다. 거기서 살아남아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만약 네가 살아남지 못한다면, 나 수탄왕령은 네가 조금 전 머릿속으로 떠올린 자들, 가족과 네가 아끼는 사람들을 찾아가 너로 인해 그들이 죽는다고 알린 다음, 하나씩 고통스럽게 죽일 것이다. 나는 내 말을 반드시 이룰 것이다.

‘……정령은 계약자를 도와야 하잖아요.’

단태는 당황했다.

-난 내 방식대로 돕는다, 인간.

기이한 느낌이 사라졌다.

정령왕은 소환을 받아 이곳에 나타나는 대신, 단태를 협박하고 가 버렸다!

황당한 단태는 입을 열 수 있었다면 수탄왕령에게 한바탕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도움을 주기는커녕 무조건 살아나라고, 죽어 버리면 아끼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죽인다니. 만약 여기서 살아 나간다면 다시는 소환하지 않으리라! 아예 잊어버리고 말리라!

그 분노가 죽고 싶은 마음을 물리쳤다.

그때, 수탄왕령이 했던 말의 일부가 생각났다. 정령왕은 수석 수련사 당원일이 사람들 보는 앞에서 자신을 때리고, 발로 찼을 때를 언급했다. 당시에도 저항할 방법이 없어서 얻어맞기만 했는데, 명국영의 충고 덕분에 당원일의 약점을 중점적으로 건드릴 수 있었다. 또한 단태는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도 그때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바로 끈기였다. 당원일이 먼저 포기하도록 약점을 계속 찌를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이야말로 그 문제를 해결한 열쇠였다.

‘저 재수 없는 수탄왕령의 말이 옳아. 내겐 시간이 필요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

단태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입을 열었다.

“……자백……할……게요.”

그 말에 고문실에 남았던 사내가 다가왔다.

“정말이냐?”

“……네.”

“자식, 겁먹었구나. 좋다.”

“……피가 머리에 몰려 말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

사내는 다가와 칼로 밧줄을 잘랐다. 단태가 정수리부터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그 사내는 발로 추락하는 단태를 밀어 버렸다. 바닥을 뒹군 단태는 숨을 헐떡거렸다. 고통으로 몸이 비명을 내질렀지만, 상대적으로 깊이 생각할 여유가 느껴졌다.

사내는 단태를 끌어다가 의자에 억지로 앉혔다. 동료에 대한 복수를 위해 온갖 종류의 고문 도구를 가져온 방단의 단원들은 단태가 자백하기로 했다는 말에도 그 도구를 돌려놓지 않았다. 자백이 끝나는 대로 새로운 고문을 시작하겠다는 뜻이었다.

단태는 그 광경을 다 보면서 속으로는 어떻게 오늘 밤을 넘길까 고민했다. 가파른 산을 올라가는 방법은 단 하나, 한 걸음씩 꾸준히 걷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지금 이 순간의 위험을 직시하고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단태는 생각했다.

“자, 시작하자. 그 책은 누가 준 거지?”

“……잠깐만요. 아직 머릿속이 웅웅거려서…… 무슨 말인지 잘 안 들려요.”

“좋아. 잠시 쉬어라.”

사내는 마치 자신이 관대한 사람인 것처럼 부드럽게 말했다.

단태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명국영은 ‘생각’을 ‘한 사람이 그 자신이 포함된 세계 전체를 파악하는 방식’이라고 정의했었다.

처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단태는 뜬구름 잡는 느낌을 받았으나 명국영의 논리적이며 예리한 설명을 듣자 머릿속까지 시원해져 평소 얼마나 멍청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었다.

≪무무비경≫을 교과서로 삼은 명국영은 짧은 구절로부터 시작해서 생각이 무엇인지를 단태에게 철저히 가르쳤는데, 핵심은 자신을 아는 것과 세계를 아는 것이었다. 모든 지식은 이 두 가지를 위해 존재한다는 게 명국영의 지론인데, 단태는 실제적인 사례로 가르치는 명국영 특유의 방법 덕분에 하늘의 구름을 보고 씨 뿌리는 시기를 결정하는 시골의 전통적 방식 역시 생각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감탄했었다.

명국영이 생각하는 방식을 알려 주면 단태는 자기가 기존에 알고 있던 것 중에 그 방식과 관련된 지식을 찾아냈는데, 그것 역시 명국영이 고안한 교육 방법이었다.

단태는…… 안 맞은 곳이 없을 만큼 고통스럽고 저절로 몸이 떨릴 만큼 두려운 이 방에서 ‘생각’하려 애를 썼다.

쉽지는 않았다.

명국영은 명경지수를 강조했었다. 감정의 요동이 가라앉아 마음이 거울처럼 변한 상태에서야 완전한 생각, 즉 자신과 세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다.

단태는……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혼란스러운 장소에서…… 그 거울 같은 마음의 상태를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다 썼다. 어릴 때부터 무섭고 기이한 장소를 자주 드나들었던 경험이 이 순간 크게 도움이 됐다. 고통은 여전히 그를 물어뜯고 있지만, 서서히 그는 고통에서…… 소용돌이치는 두려움의 감정에서…… 복수를 꿈꾸며 단태를 노려보는 사내들의 시선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살아남으려는 절박함과 저 악한 놈들을 향한 분노, 그리고 물의 도시에서 몸으로 겪은 조직적인 악에 대한 증오가 단태로 하여금 명경지수의 마음을 이루도록 돕고 있었다. 어느 순간, 단태는…… 고통 대신…… 고요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찰나였지만 바로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세계를 파악해 냈다.

‘……그래!’

단태는 눈을 뜨고 자백을 기다리던 사내를 쳐다봤다. 사내가 반색하며 의자를 앞으로 당겨 앉았다.

“이제 준비가 됐지? 책은 누가 줬지? 륜사가 준 거지? 그렇지?”

사내의 의도가 드러났다. 이번 사건을 이용하여 륜사까지 도시의 적으로 엮어 넣으려는 것이다.

그때, 단태는 있는 힘껏 입을 벌렸다.

맞은편에 앉은 사내는 물론 고문 도구를 들고 장난을 치던 남자들까지 동작을 멈추고 단태를 쳐다봤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그들의 시선을 본 단태는 죽을힘을 다해 혀를 깨물었다. 반쯤 잘린 혀에서 피가 쏟아지자, 사내들은 깜짝 놀라 단태에게로 달려왔다.

“이 새끼!”

“당장 의원 불러!”

사내들 중 하나가 당장 밖으로 튀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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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면산맥이 달빛에 비쳐 은색으로 빛났다.

거무스름한 구름이 걸려 있어 산봉우리만 간헐적으로 구름 위로 솟아난 운면산맥은 제국 동남부에 자리 잡은 고산준령으로 워낙 높고 험해서 동쪽의 계림과 남쪽의 평야지대를 나누는 자연 방벽이었다. 그 때문에 운면산맥 북동쪽과 남서쪽은 완전히 다른 지역으로 발전해 왔다.

북동쪽의 계림은 워낙 울창한 숲 때문에 사람이 살기가 어려워 맹파루체, 파림루체의 두 도시에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사는 반면에 남서쪽의 평야지대에는 수백 개의 마을들이 잘 발달된 도로를 따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운면산맥 위는 거친 용병들의 세계였고, 아래는 비교적 유약한 마법사들의 세계로 굳어졌다.

“아름다워요.”

여화는 정신없이 운면산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저 높은 산맥, 거칠어서 용이 없다면 넘기가 어려운 저 거대한 지형을 이런 곳에서 보게 되다니.

“가까이 가면 생각이 달라질걸.”

륜사는 분위기 깨는 데는 선수였다.

“단태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요.”

“다 자기 복이지 뭐.”

그렇게 말했지만 륜사도 용이 좀 더 컸다면…… 하고 아쉬워했다.

밤은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곧 해가 뜨면 운면산맥은 또 다른 매력을 보여 줄 것이다. 산맥 전체가 보석으로 박힌 듯 햇살을 받아서 반짝이는 그 모습은 평생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텐데, 단태 그 녀석에게도 언젠가는 기회가 있을 터였다.

그때, 여화가 가방을 뒤적거렸다.

“왜 그래?”

“……진동이 느껴져서요. 아, 수정구예요!”

여화는 수정구를 꺼내어 륜사에게 건넸다.

륜사가 손을 얹자 시꺼먼 수정구 표면에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끔 이런 식의 장난을 치는 마법사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륜사가 연결을 끊으려 하자, 그 사람이 급히 말했다.

“종자장 단태가 시청에 잡혀 갔습니다.”

여자 목소리였다.

륜사는 깜짝 놀랐다.

“……뭐라고 했지?”

“방단이 탑에 들이닥쳐서 종자장 단태의 침대 아래에서 문제가 되는 서적과 서류를 발견했습니다.”

“……!”

륜사는 더 이상 저 멋진 운면산맥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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