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회: 3-12 -->
그 말만으로도 탑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던 것이다.
‘빌어먹을 반명! 이 개자식! 감히 이런 짓을 하려고 날 맹파루체로 보낸 거냐?’
“단태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지?”
“추명입니다.”
“추명? 도시를 뒤집어엎으려는 조직이 왜 나를 돕는 거지?”
“당신도 추명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군요.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허나, 추명은 빚을 잊지 않고 갚는다는 점은 기억하십시오.”
“빚?”
“그럼.”
연결이 끊겼다. 상대가 끊은 것이다.
륜사는 표정이 무거운 여화를 쳐다보다가 용마사 옆으로 이동했다.
“당장 유타루체로 돌아간다.”
“안 됩니다! 시장님께서 직접 저에게……”
“죽고 싶나?”
륜사는 어느새 단검을 꺼내어 용마사의 목에 갖다 댔다.
“…….”
“용을 체질적으로 싫어하지만, 너 따위 죽여 버리고 유타루체로 돌아갈 수는 있다. 나도 용을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이야. 내가 누군지는 알지? 그래도 괜찮나?”
“……돌아가겠습니다.”
용마사는 용을 조종해서 크게 선회했다. 이제 운면산맥 대신 저 멀리 넓은 들판에 점점이 흩어진 마을들이 반딧불처럼 보였다. 륜사는 제발 늦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
철무는 낡은 지도를 훑었다.
대략 10년 전에 만들어진 그 지도대로 시청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통로 자체는 있을지 몰라도 시청 놈들이 곳곳에 마법진을 설치해서 쥐 새끼 한 마리 통과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추명이 결정을 내렸으니 따르는 수밖에 없다. 최선을 다해서 피해를 줄이는 수밖에.
그는 정보의 달인이었다.
타고난 재능인데, 도시 곳곳의 길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을 뿐 아니라 언제, 어디로 가야 가장 빨리 갈 수 있는지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어린 철무를 눈여겨 본 번운재의 추천으로 추명이 돈을 부담해서 용금탄으로 유학까지 갔다 온 이후에는 세상을 보는 눈 자체가 달라졌다. 철무는 사소한 정보를 바탕으로 거대한 규모의 계획을 간파해 내는 재주를 지녔다. 그 덕분에 추명이 시장의 덫에서 빠져나온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윤강보다는 철무가 추명의 지도자로 적격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능력의 소유자였기에 철무는 이번 임무가 부담스러웠다. 악어의 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지도를 다 외운 그는 다른 물건을 챙겼다. 단검 일곱 자루, 공기 중에 퍼져서 들이마시면 몸이 일시적으로 마비되는 가루, 환상 마법이 담긴 두루마리, 상처에 바르는 외상약, 밧줄, 필요할 때 적의 눈을 멀게 만드는 섬광탄 등이었다. 그 두루마리는 용금탄에서 공부할 때 우연히 평환탑 출신 마법사에게서 얻은 중족이었다.
한 번 더 물건을 확인한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밖으로 나가자 흐릿한 달빛 아래 그를 기다리는 추명의 전사들이 보였다. 저들 중 얼마나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복귀할 수 있을까? 철무는 유령을 보는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경비대원들이 짝을 지어 순찰을 돌고 있었다. 빛을 흡수하는 검은색 옷을 입었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시청 건물 전체는 마법진으로 둘러싸여 있어 들키지 않고 들어가기가 굉장히 까다로웠다.
오래전에 이 점을 고민한 추명은 운하 아래에 굴을 팠다. 수십 년에 걸친 그 은밀한 공사를 통해 탄생한 통로는 도시의 지하 깊은 곳에 뻗어 있었는데, 지진으로 일부가 무너지는 바람에 입구가 드러나자 도시의 빈민들이 지하로 내려와 추명과는 독립적으로 굴을 파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지하 통로는 미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로 전체의 지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략 백 년 전부터 이 지하 통로는 ‘흑야궁’으로 불렸다. 황궁처럼 거대하고, 짙은 밤처럼 어둡다는 의미로 붙여진 흑야궁은 대규모 미로에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당연히 시청도 흑야궁의 존재를 눈치챘다. 용병과 마법사를 동원하여 흑야궁에 대한 수색을 시작했으나 워낙 그 규모가 방대할 뿐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흑야궁 아래쪽에서 올라온 흑천주, 백오공, 양각서 등 괴물들이 출몰해서 공격하는 바람에 수백 명의 용병, 마법사 들이 지하에서 실종되기도 했다.
몇 번의 시도가 물거품이 되자, 당시 시청이 취한 조치는 흑야궁 입구를 마법진으로 봉인하고 절대 열리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뿐이었다.
횃불을 든 경비대원들이 지나가자 철무가 먼저 움직였다.
“이쪽으로.”
어두워서 어디가 어딘지 알기 힘든데도 철무는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암방거로, 즉 노예 매매소가 밀집된 지역에 있는 흑야궁의 입구를 찾아가고 있었다.
“여기다.”
철무는 아직도 사용되고 있는 우물 앞에 서서 주위를 살폈다. 추명의 전사들은 우물 곁으로 다가와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둠뿐이었다.
“우물 바닥으로 내려가면 수로가 있는데, 그 수로를 따라가면 흑야궁이 나와.”
“내가 먼저 들어가겠네.”
윤강이었다.
철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윤강은 밧줄을 아래로 늘어뜨리고는 훌쩍 몸을 날려 밧줄을 잡고 능숙한 동작으로 내려갔다. 소리도 없이 우물물 아래로 잠수한 그는 좁은 수로를 따라 헤엄을 쳤다. 여기저기 물살이 거센 곳이 있어서 빠르게 나갈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숨이 막혀 몸에 경련이 일어날 무렵 수로가 끝나고 공기로 채워진 구멍이 나타났다. 거기까지 밧줄을 가져간 윤강은 숨을 헐떡이면서 밧줄을 뾰족한 바위에 묶고 당겼다. 이제 우물로 들어올 추명의 전사들은 밧줄을 잡고 비교적 편하게 이곳으로 올 수 있을 것이다.
횃불에 불을 붙이는 대신 기름종이에 싸서 가져온 두루마리를 찢자, 하얀빛의 덩어리가 나타나 주위를 밝혔다. 윤강은 빛이 어둠을 밀어내고 보여 준 벽에서 흑야궁의 입구를 발견했다. 불길하도록 짙은 어둠이 거기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밧줄이 팽팽해지더니, 곧 추관구가 나타났다.
“……숨 막혀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어서 올라오게.”
윤강은 손을 잡아끌어 당겼다.
노련한 추관구는 투덜거리면서도 칼을 꺼내어 혹시 모를 흑천주 따위의 공격에 대비했다. 흑천주는 사람까지 잡아먹는 거미로 어두운 통로의 천장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방심한 인간을 사냥했다. 추관구는 몇 년 전에 흑야궁에 볼일이 있어 들어갔다가 천장에 매달린 시체를 발견했는데, 흑천주에게 체액이 다 빨려 쭈글쭈글해진 상태였다.
열 명의 전사들이 밧줄을 통해 흑야궁 입구에 도착했고, 마지막으로 철무가 밧줄을 풀고 윤강처럼 헤엄쳐서 물 밖으로 나왔다. 윤강은 힐끔 철무를 쳐다봤다. 자신은 힘이 들어서 숨을 헐떡거렸는데 철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단검을 꺼내어 양손에 쥐고 있었다.
철무가 앞으로 나섰다.
“삼 보.”
“…….”
“내가 앞장설 테니, 적어도 삼 보 이상 떨어져서 날 따라와.”
그렇게 말한 철무가 단검을 쥐고서 흑야궁으로 들어가자, 등을 맞대고 옆에 있는 동료를 보호하는 전투 방식에 익숙한 전사들은 독단적인 철무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추관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윤강을 지지하는 전사들이어서 철무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여기서는 저 친구의 말이 무조건 옳아.”
윤강은 세 걸음 거리를 띄우고서 철무를 뒤따랐다.
전사들이 그 뒤로 바짝 쫓았다.
백오공이 철무를 덮쳤다.
윤강 등 추명의 전사들이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철무는 몸을 옆으로 비껴서면서 지네의 하얀 눈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거대한 지네가 몸부림을 치자 뒤로 몸을 날렸던 철무는 또 다른 단검을 손에 쥐고 지네의 배에 꽂고는 단검의 자루를 잡고 지네의 꼬리 쪽까지 잘라 버렸다. 몸이 반쪽으로 갈라진 지네는 허연 독을 내뿜었지만 이미 위력은 없었다. 철무는 지네의 등을 밝고 머리 쪽으로 가서 단검을 찔러 넣어 백오공을 깨끗이 죽였다.
전사들은 할 말을 잃었다.
철무의 실력을 예상했던 윤상까지도.
천장에 구멍을 파고 먹잇감을 기다린 터라, 백오공은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기척으로 알아낼 수가 없다. 윤상은 철무를 쳐다봤다. 어떻게 알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