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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 중 다행이구먼.”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게 시작이라는 거지.”
“맞네.”
“아무래도 나 혼자서는 저 교활한 시장을 상대하기 어려울 것 같아. 도와줄 거지?”
“그 때문에 이곳으로 온 걸세.”
명국영은 애써 웃었다. 계단을 뒹군 터라 그 아픔이 아직도 몸을 괴롭히고 있었지만 저기 고문실에 있을 단태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
륜사와 썰매를 타고 이동하던 명국영이 물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네. 어떻게 여기 사정을 알았나? 수정구란 수정구는 몽땅 시장의 손아귀에 들어가 버려 연락할 수가 없었는데.”
“……이 도시에 시장을 엿 먹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제법 많은 모양이야.”
륜사는 그 수정구에 나온 여자를 떠올렸다. 누군지 몰라도 시장의 적이니, 한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륜사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자 명국영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시장이 저딴 짓이나 하니 적이 많이 생길 수밖에.”
“그보다, 오늘 새벽에 추명이 단태를 구하기 위해 시청을 습격했다더군. 알고 있나?”
“소문은 들었네.”
“추명이 대체 왜 그랬지?”
“……알아봐야지.”
명국영은 이미 몇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아직 뚜렷한 확신이 없어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사실, 추명은 이 시점에서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핵심은 시장이 관례를 깨고 마둔수탑을 건드렸으며, 그 과정에 탑교하 같은 고위 마법사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건 곧 시청과 마둔수탑의 본격적인 충돌을 의미했다.
륜사는 탑에 도착하자마자 탑교하를 불러 그 지위를 빼앗았다. 탑교하는 실실 웃으며 부탑주에 대한 예의도 무시한 채 탑을 나가 버렸다. 륜사에게 두려움 따위 느낄 이유가 없다는 태도였다.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명국영은 최악의 상황을 직감했다.
“……표정이 왜 그래?”
륜사가 물었다.
“용금탄의 누마탄 탑주에게 연락해 봤나?”
“이제 하려고.”
“기대하지 말게.”
“왜?”
“누마탄 탑주와 시장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네.”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 담긴 말투였다.
“……뭐?”
“자네를 부탑주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누마탄이 시장과 손을 잡았다는 걸세. 지난번에 말하지 않았나? 누마탄은 자네에게 부탑주의 자리를 권했지만, 그건 시늉에 지나지 않았다고. 자네가 그 자리를 덥석 받아들이는 바람에 누마탄은 적잖이 당황했을 테고, 그 때문에 자네의 행보를 주시했을 텐데, 요즘 자네가 내리는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야. 그게 아니라면 탑교하 같은 자가 자네 앞에서 저렇게 방자한 태도를 보일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일세.”
“…….”
륜사는 말이 없었다.
탑교하는 11인위원회를 구성하는 가문 중 하나인 탑가 출신이지만, 탑가 자체가 영향력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믿을 만한 배경 없이 저런 행동을 할 수 없다는 점을 륜사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형인 누마탄이 시장과 손을 잡고 비열한 짓을 했다고 인정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나 륜사는 적응력이 빠른 사내였다.
“내가 누마탄과 손을 잡은 시장을 물리치고 단태를 무사히 구해 낼 방법, 있을까?”
“……없네.”
명국영은 솔직하게 답했다.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없나?”
“미약하지만 추명과 손을 잡는다면 가능할지도 모르네.”
“그건 안 돼.”
륜사가 즉각 반응했다. 륜사에게 추명은 끊임없이 도시의 안전을 위협하는 조직이었다.
“자네에게 연락한 그 여자, 어쩌면 추명 쪽 사람일지도 모르네.”
“……그래도 안 돼.”
륜사는 기준이 분명했다. 목적을 위해 과정을 희생할 수는 없다. 추명의 도움을 받아 단태를 구해 낸다면, 그 일로 추명의 더러운 부탁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 보주관 중문석이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야?”
“……마영국에 속한 마법사들 중 절반이 강마 탑교하와 함께 탑을 빠져나갔고, 재마국와 형마부, 연마국 그리고 결마국의 마법사들 중 일부도 짐을 싸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가 봐. 곧 알려 주지.”
중문석이 나가자, 륜사는 눈을 감았다. 명국영의 추측이 옳았다. 시장의 도발은 문제가 아니었다. 탑주 누마탄의 은밀한 지시가 없다면 이런 대규모 하극상은 불가능할 것이다.
륜사는 사형의 행동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차라리 터놓고 이야기를 했다면 마음을 돌려 부탑주 대신 다른 방법을 찾았을지도 몰랐다. 사형은 일언반구 속내를 내비치지 않고 있다가 용금탄의 마둔수탑이 안정을 찾아 가자, 비로소 륜사를 내치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그런 사람을 사형으로 생각하며 그동안 받들었다는 사실에 륜사는 기가 막혔다. 확실히 바다의 깊이는 잴 수 있어도 사람의 깊이는 잴 수 없다는 옛말이 옳았다.
“어떻게 할 텐가?”
“……한 가지 방법뿐이야.”
고심 끝에 륜사가 말했다.
“혹시 부탑주 자리를 내놓고 혈혈단신으로 시청에 쳐들어가서 단태를 구하려는 건가?”
“어떻게 알았나?”
륜사는 깜짝 놀랐다.
“단순하기는.”
명국영의 말에 륜사는 머리를 긁었다.
“맞아. 난 단순해. 그러니 머리가 복잡한 자네가 방법을 말해 봐. 답답해서 죽을 것 같으니 말이야.”
“누마탄은 큰 실수를 범했네.”
명국영이 낮게 속삭였다. 확신과 의지에 찬 목소리였다.
“……실수?”
륜사도 덩달아 낮게 말했다.
“자네가 날 동지로 받아들인 순간부터 어떻게 하면 이 탑을 자네 구미에 맞는 조직으로 바꿀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놀랍게도 자네의 사형이 그 기회를 만들어 줬네. 얼핏 보면 지금 상황은 백척간두의 위기지만, 잘만 들여다보면 전화위복의 순간이라네.”
“난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탑교하를 비롯해서 탑을 떠난 마법사들만 누마탄의 은밀한 지시를 받았다고 생각하나?”
“…….”
륜사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난 좀 놀랐네. 열에 아홉은 탑을 떠날 줄 알았거든. 한데, 탑을 운영하는 부서에 속한 마법사들, 그래서 비교적 마법 자체를 중시하지 않는 마법사들 중 절반이나 탑에 남았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 누마탄의 지시에 불복하고 자네를 선택한 마법사가 절반이나 된다는 뜻일세. 어쩌면 더 될지도 모르네.”
“아!”
륜사는 탄성을 터트렸다.
“누마탄은 용금탄으로 옮겨 가면서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마법사들을 대거 데려갔네. 반대로 이곳에는 자네의 실력과 그 일관성 있는 성향을 지지하는 마법사들이 많이 남은 셈이지. 그런 사정을 누마탄은 미처 생각지 못한 걸세. 아마도 용금탄에 있다 보니, 이곳의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게지.”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그릇을 보여 주게.”
명국영이 힘주어 말했다.
“그릇?”
“원래 이런 상황이라면 자네는 탑교하는 물론 거기에 동조하여 탑을 나간 자들을 파문시켜야 하네. 그게 규율이니까. 허나, 자넨 그들을 파문시키지 말고 지방지에 글을 싣게. 문은 열려 있으니까 언제든 돌아오라고.”
“그러면 탑교하가 날 바보로 알고 비웃을 텐데?”
“그 글은 탑교하가 아니라 이곳에 남아 있는 마법사, 수련사, 종자를 향한 걸세. 믿고 끝까지 따라갈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그릇을 보여 주는 거지. 그러면 나간 자들은 돌아오지 않더라도, 여기 탑에 남은 자들은 자네를 신뢰하여 단단하게 결속하게 될 걸세.”
“……자네, 정말 무서운 사람이군.”
륜사는 왜 황제가 마법사보다 용문거 출신의 인재들을 두루 등용하는지 알 것 같았다. 마법사, 특히 천마의 경지에 오른 대마법사는 웬만한 군대를 능가할 만큼 막강한 힘을 발휘하지만 명국영이 보여 준 것처럼 불리한 형세를 뒤집어 순식간에 유리하게 만드는 지혜는 부족했다. 어쩌면 세상은 마법사들보다 이런 인재를 더 필요로 하는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