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97화 (97/293)

<-- 97 회: 3-16 -->

“이런 말을 듣고 이해하는 자네도 무서운 사람일세.”

“그런가?”

웃음을 터트린 륜사는 명국영의 조언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글을 썼고, 명국영이 검토한 후에 신문사로 보냈다. 그 글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킬 터였다.

그러나 머리 좋은 명국영도 단태를 무사히 빼낼 방법은 찾아내지 못했다. 거의 모든 면에서 시장이 유리했다. 한 가지 방법은 단태가 아무런 죄도 없이 갇혀서 고문을 당했다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인데, 시장의 영향력 아래 있는 신문사들이 그런 글을 실을 리가 없었다. 수정구 하나 구하는 것도 그렇게 어려웠는데.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단태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흘러갈 터였다. 명국영은 시장이 륜사의 저항을 힘으로 억누르기보다는 법을 이용하리라 예상했다. 제아무리 륜사라고 해도 시법원에서 진행되는 재판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 재판에서 증거와 증인을 통해 유죄가 결정된다면, 단태는 꼼짝 없이 도시의 적으로 몰려 성난 군중에게 손가락질받으며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다.

명국영은 ‘생각’을 하기 위해 마음을 ‘명경지수’로 만들려고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걱정과 염려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결심을 한 그는 어사대부 패환에게 편지를 썼다. 정부의 감찰 역할을 책임진 패환은 몇 번이나 명국영을 불러서 관직을 제안한 바 있었다. 그때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는데,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패환의 힘을 빌려서라도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패환이 날 기억할지 모르겠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자주 안부 인사라도 해 둘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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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태는 시청 중앙탑의 꼭대기로 옮겨졌다.

당용파에서 파견된 용병 열 명과 륜사의 지시에 불복해서 마둔수탑을 빠져나온 마법사 중 두 명이 하루에 두 번씩 교대하며 지키는 그 좁은 다락방의 천장은 뾰족한 형태였다. 의식을 되찾지 못한 단태를 하루에 한 번 의원이 와서 상태를 확인했고, 그 자리에 륜사와 명국영 그리고 여화가 꼭 참석했다.

여화는 사람이라고 보기도 힘든 단태를 보며 눈물을 왈칵 쏟을 뻔했다. 시꺼먼 멍은 자줏빛으로 바뀌는 중이었고, 여기저기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져 있었는데, 우악스러운 손길에 뽑힌 듯했다. 무엇보다 실낱같은 호흡 때문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면회 시간은 짧았다.

매일 또 다른 상처가 생기지 않았나 확인하고 나면 거기서 나가야 했다. 시장의 명령이라 륜사도 도리가 없었다. 단태가 천천히 회복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현재로서는 다행이라고 여겨야 했다.

사람들이 모두 나가면 단태는 혼자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가끔 열린 창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는데, 이 방을 담당한 하인이 가져다 놓은 화로 덕분에 단태가 누워 있는 침대 쪽은 따뜻했다.

미동도 없는 단태 주위로 시간이 흘렀다.

아침이 되어 햇살이 다락방을 비추었고, 날이 저물면 달빛이 창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가끔 눈이 내려 눈송이 몇 개가 안으로 날아와서 단태의 이마에 내려앉았는데 화로의 열기로 금세 녹아 버렸다. 그런데도 단태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밤에 그 방으로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빨간 몸통, 새하얀 날개, 검은 부리.

란조였다.

단태의 어깨 옆 베개에 앉은 란조는 부리로 단태를 건드렸지만 아무 반응이 없자 구슬프게 울었다. 그 노랫소리는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힘 있게 단태의 몸 안쪽으로 파고들었고, 륜사가 강화시킨 회복력을 몇 배나 증강시켰다.

그때, 단태가 눈을 떴다.

“……꿈에서 널 봤는데.”

란조는 단태의 이마에 내려앉아 또 다른 노래를 불렀다. 그 선율에 단태는 힘이 나는 것 같았다.

란조의 노래 덕에 고통이 물러가자, 단태는 용기를 내어 상체를 일으켰다. 벽에 기대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란조를 제대로 볼 수가 있어서 마음이 기뻤다.

그러나 이 작은 방에 대한 기억이 없어서 불안해졌다.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여기 있는지도 몰랐다.

그때, 열려 있던 창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놀란 란조는 위로 날아올랐지만 달아날 곳은 없었다. 문이 열리며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이 들어왔다. 아, 그 사람이다! 란조를…… 아니, 그때는 이름이 용조였다. 아무튼 란조를 데리고 있던 그 마법사였다.

그가 다가와 란조를 향해 손을 뻗고 뭐라고 노래를 부르자, 란조는 날갯짓을 하면서 달아나려고 하는데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마법사에게로 다가갔다. 밧줄에 묶인 돼지가 도살장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버티는 것처럼 란조도 깃털이 뽑혀서 떨어질 만큼 버텼지만, 마법사의 노래에 담긴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란조는 은색 망토를 입은 마법사의 새장에 갇히고 말았다.

새장 속 란조를 보며 활짝 웃은 그 마법사는 몸을 돌려 단태에게로 걸어왔다. 이미 웃음기는 사라지고, 심술궂은 노인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름살이 그를 더욱 사악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어떻게 용조를 꼬드긴 거냐?”

“……나……는 그……런 적 없……습니다.”

단태는 겨우 말했다.

그 마법사는 손을 들어 올렸지만 단태를 때리지는 않았다. 시장의 지시를 떠올린 까닭이다. 생각 같아서는 저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이 도시에서 무사히 살아 나갈 수 없을 터였다. 나중에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꼬마야, 넌 끝이다. 생각해 보면 넌 불쌍한 아이야. 그 륜사라는 마법사와 시장 사이에 낀 신세니까. 쯧쯧, 그래도 너무 낙담하진 마라. 오늘의 불행이 내일의 행운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마법사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지만 단태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순간, 단태는 한 가지를 직감했다.

“……혹시 그 새……를 잡으려고 날 여기 둔 겁니까?”

“멍청이는 아니구나.”

“…….”

“왜 용조가 나 대신 널 따르기로 했는지 궁금하다만, 난 이곳에서의 볼일이 끝나서 말이다. 언젠가 알 수 있겠지.”

마법사는 새장을 들고 다락방을 빠져나갔다.

겨우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기억해 낸 단태는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그저 가족을 되찾으려고 애를 쓴 것뿐인데, 그래서 륜사의 종자가 되고…… 노예등록대장을 읽기 위해서 종자장이 되었을 뿐인데, 세상은 너무 가혹했다. 시장이라는 사람은 사부님의 기를 꺾기 위해 자신을 고문했고, 여기에 감금했다.

란조가 소리 마법으로 불어넣은 기운이 빠지자, 단태는 축 늘어졌다. 몸은 아직 정신을 차릴 정도로 회복된 게 아니었다. 잠시 란조의 기운을 빌려 깨어났던 것이다. 단태는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고문으로 망가진 몸은 휴식이 필요했다.

단태는 망각의 늪으로 다시 빠져들었다.

*유천주

해가 바뀌었다.

둘로 나뉜 마둔수탑과 억울하게 갇힌 단태를 제외한다면 도시는 축제로 들뜬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제국력 1490년의 시작을 축하하는 불꽃 1,490개가 하늘을 수놓자 사람들은 환호하며 새해에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빌었다.

그 소리는 단태가 갇힌 시청의 중앙탑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고문에서 해방된 단태는 시장의 결정에 따라 천장이 뾰족한 탑 꼭대기 다락방에 갇혔는데, 그곳은 물의 도시 전체를 통틀어 가장 높은 방이었다.

반쯤 잘린 혀는 빠르게 아물었고, 두들겨 맞아 생긴 멍도 옅어지고 있었지만 답답함은 오히려 더 커졌다. 하루에 한 번 사부님, 스승님 그리고 여화, 가끔은 창수까지 만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꽉 막힌 가슴이 시원해지진 않았다.

어제, 재판이 열렸다.

어처구니없는 재판이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책과 서류를 증거로 교수형을 운운하는 젊은 검사의 화려한 언변에 구경 온 사람들이 단태를 향해 찢어 죽일 놈, 똥물에 튀겨죽일 놈 등 온갖 욕을 다 했다. 반면에 말투가 어눌한 변호사는 몇 마디 하다가 방청객에게서 야유를 받고는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판사는 재판 진행이 힘들 정도로 소리치는 방청객을 나무라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고 있었다.

그런 재판이니…… 이미 판결은 나와 있었다.

교수형이었다.

단태는 창가로 가서 도시를 내려다봤다.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도시에는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썰매도 장식을 해서 오색으로 반짝거렸고, 시장의 특별 조치로 풀려난 순록들은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이렇게 억울하고 분한데, 세상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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