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98화 (98/293)

<-- 98 회: 3-17 -->

‘나만 이 꼴이야…….’

종자장이 되고 나서 고생은 끝났다고 생각했었다. 비록 풀어야 할 복잡한 문제가 있지만 직접 부딪혀 애를 쓰면 해결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세상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광활했다.

고향 울담반에서 단태에게 세계는 엄마, 설희 그리고 그 자신으로 구성된 좁은 관계였다. 그 돌팔이 의사 정도가 세계의 경계를 살짝 넘었을 뿐, 단순한 관계여서 복잡한 고민으로 머리를 싸맬 필요는 없었다. 가끔 찾아오는 아버지라는 작자만 사라진다면 고민조차 사라져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물의 도시에 들어선 그날부터 단태에게 세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도록 커졌다. 노예 상인, 노예 매매소 그리고 마둔수탑이 단태의 세계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세계가 커질수록 단태는 거기서 작아졌다.

다행히 운 좋게 용마 륜사의 종자가 되었고, 노예등록대장을 읽기 위해 노력한 끝에 종자장이 되었다. 단태는 이 광활한 세계도 애를 쓰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몹시 기뻤다. 아무것도 못하는 것만큼 비참하고 무력한 상태는 없기 때문에.

‘난 우물 안 개구리였어.’

단태는 여기 중앙탑에 갇힌 이후로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었다. 은연중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더 큰 세계, 륜사와 시장 사이의 갈등 따위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또 한 번 몰라서 당하고 만 것이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문을 열고 륜사와 명국영 그리고 여화가 들어왔다. 짧은 면회지만 하루 중 유일하게 단태가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사부님, 스승님, 누나.”

“……어제 법정에서는 좀 놀랐지?”

여화가 다가와 단태의 손을 잡아 주었다.

“고문실에 비하면 훈훈하던데요.”

단태가 농담을 던졌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교수형이다. 너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륜사였다.

“……네.”

“방법을 강구 중이니까, 너무 걱정 마라. 넌 잘 먹고 잘 쉬기만 하면 돼. 나와 네 스승이 기필코 널 빼낼 테니까.”

“고맙습니다, 사부님.”

“사부로서 마땅한 거지.”

륜사가 손을 뻗어 단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거린 그가 말했다.

“너, 키가 컸다.”

“……조금요.”

웃기는 일이지만 고문실에서 몸이 엉망진창이 되었다가 이 높은 다락방에서 회복되는 동안에 키가 자랐다.

잠자코 있던 명국영이 말했다.

“단태야, 난 내일 용금탄으로 떠난다.”

“……왜요?”

단태는 깜짝 놀라 명국영을 쳐다봤다.

그런 단태에게 명국영은 어사대부 패환에게서 받은 편지를 보여 주었다. 패환은 명국영의 연락을 받자마자 즉시 편지를 보냈는데, 당장 용금탄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대국을 살펴서 돌파구를 찾아낼 인재를 찾고 있던 패환에게 명국영은 사막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잘된 일이네요.”

단태는 애써 웃었다.

“반드시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버텨라.”

“네, 스승님.”

“그리고 이건 내가 없는 동안에 네가 소화해야 할 책이다.”

명국영이 눈짓하자 여화가 밖으로 나가서 책을 한 더미 가져왔다. 무무가 남긴 또 다른 걸작인 ≪정심경≫, 탄수의 ≪복갑화서≫, 방전직의 ≪법술서≫, 도안집의 ≪역사≫, 도랍의 ≪생사경≫, 장투의 ≪정전서≫였다. 한 권을 읽고 그 내용을 파악하는 데만 줄잡아 1년은 걸리고, 깊은 뜻까지 파악하려면 10년도 부족한 책이었다.

그 책을 받아든 단태가 쳐다보자 명국영이 한 마디 덧붙였다.

“외워라.”

“……이 책을요?”

“전부.”

“…….”

“자다가 벌떡 일어나도 술술 욀 수 있을 만큼.”

“……너무하세요, 스승님.”

억울해 하는 단태의 표정에 웃음이 터졌다. 륜사가 박장대소하자, 여화가 입을 가리고 웃었고, 명국영과 단태도 낄낄 웃었다. 그 순간만큼은 절망적인 재판 상황을 잊어버린 것이다.

갑자기, 명국영이 단태를 안았다.

단태는…… 눈물이 핑 돌았다. 노예로 팔린 이후 한동안 누구도 믿지 않았다. 친절했던 여화조차도 의심의 눈으로 쳐다봤었다. 그러다 륜사와 여화의 진심을 알게 되었고, 평생의 스승인 명국영이라는 사람도 알 수 있었다.

‘어차피 4년이면 난 죽어. 짧은 삶이지만 이런 분들이 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행복한 거야.’

순간, 단태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재빨리 자신은 엄포윤이 구입한 노예이며, 엄마와 여동생을 찾기 위해 종자장이 되었노라고 밝혔다. 그리고 엄마는 현재 누마탄의 저택에서 노예로 일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알고 있었어.”

여화가 말했다.

“네?”

“음, 엄밀히 말하면 넌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륜사였다.

“……노예가 아니라니요?”

“내가 엄포윤으로부터 널 사서 자유인으로 해방시켰거든.”

이번엔 명국영이었다.

단태는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사정을 다 알면서도 지금까지 곁에 있어 주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데, 게다가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니! 게다가 엄포윤으로부터 자신을 사서 자유까지 주었다니!

그때, 용병이 들어와서 면회 시간이 끝났다고 말했지만 륜사가 그 용병의 키보다 길고 예리한 물의 칼을 만들자 용병은 주춤거리더니 오늘은 조금 더 있다 가도 된다고 말하고는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륜사는 낄낄 웃으며 칼을 없앴다.

단태는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륜사와 명국영이 단태의 손을 하나씩 잡고 일으켰다. 여화는 한 걸음 뒤에 서서 그런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다 네가 스승을 잘 만난 덕이다. 난 아무것도 몰랐다. 게다가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난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니었지. 내가 아끼는 종자가 노예라니! 이 친구가 아니었다면 난 나를 속인 내 제자이자 종자인 널 용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륜사의 말에 명국영이 이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네 사부는 정이 많은 사람이야. 그러니 평생 사부로 모셔야 한다.”

“죽더라도 사부님을 따라다니겠어요!”

“……뭐? 난 유령은 싫은데.”

륜사의 말에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단태는 더 이상 재판의 분위기와 과정, 그 결과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건 아무 문제도 아닌 것 같았다. 물론 법정에 서서 분노한 방청객의 광기 어린 눈을 마주한다면 절망이 스멀스멀 피어나겠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누구보다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숨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 순간, 단태는 이 높은 다락방에 갇힌 채 혼자 있는 동안 생각하다가 알아낸 사실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스쳐 지나갔는데, 명국영이 가르친 대로 ‘생각’을 하다 보니까 수상한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단태는 그 음명석, 란조, 은색 망토의 마법사와 관련된 내용을 륜사, 명국영, 여화에게 알렸다.

그들의 반응은 단태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 새는 백관조다.”

륜사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여화가 단태에게 재빨리 백관조가 무엇인지 알려 주었다. 백관조는 소리 마법사가 승급 시험을 통과하면 증표로 받는 특별한 새로 평생 그 마법사만을 따라다닌다고 알려져 있었다.

“소리 마법사가 왜 세관국장 평굉의 저택 지하에 있었던 거지?”

명국영도 심각했다.

“……저는 조율진 마법사님이 감옥에 갇힌 이유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단태였다.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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