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02화 (102/293)

<-- 102 회: 3-21 -->

육체에 고통을 가하지만 결국 목표는 그 육체 너머에 있는 정신이었다. 육체와 연결된 정신은 결국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을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기 마련이다.

정신은 그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고상한 실체지만, 그래 봐야 육체 없이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철무는 잠시 고문이 멈출 때마다 그 선택을 생각했었다. 윤강과 추명의 전사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미끼가 된 그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통이 극심하자 그보다 더 효과적인, 그래서 자신도 잡히지 않을 선택은 없었을까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라도 해야 미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때, 쾅 굉음과 함께 바닥과 벽 그리고 천장이 진동했다. 채석장에서 견고한 바위를 터트릴 때 나는 소리 같았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르겠구나.’

철무는 이를 악물고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아무도 이곳으로 찾아오지 않는다면, 이 망가진 몸을 이끌고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사악한 방단의 단원들마저 고문실을 비우게 만든 무언가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다고 확신한 철무는 손목에 힘들 주고 다리를 위로 들어 올렸다. 자세를 바꾸려니 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 고통을 참자 발이 천장에 닿았다.

마음을 가다듬은 철무는 있는 힘껏 발로 천장을 찼다. 특수한 재질에 마력석을 섞어서 만든 이 밧줄은 대마법사라고 해도 풀 수가 없는 반면에 천장에 고정된 부분은 비교적 약했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철무는 언젠가 있을지 모를 탈출 기회를 위해 모든 것을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이다.

손목이 뻐근했다.

아니,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밧줄과 천장의 연결 부분이 떨어지거나, 손목이 찢어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일곱 번째 발을 구르자, 툭 소리와 함께 철무는 거꾸로 떨어졌다. 워낙 고통이 심해서 추락의 충격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벽에 어깨를 기대면서 겨우 일어선 그는 핏자국이 선명한 의자를 밀치며 고문실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문은 열려 있었다.

복도로 걷는데…… 또 한 번 굉음이 들렸다.

이번에는 천장에서 흙먼지가 떨어졌다.

‘……추명은 아니야. 추명 전체가 나섰다고 해도 이런 일은 할 수 없어.’

이 건물이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철무는 비틀거리면서도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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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마탄의 저택 안으로 뛰어든 여화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가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사람들이 빠져나간 휑한 저택 곳곳을 찾아다녔다. 단태의 어머니가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을 가능성은 충분했지만 여화는 만에 하나 그렇지 못했을 경우 때문에 저택 곳곳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하늘과 땅을 울리는 포효가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갔다.

고개를 든 여화는 시청 상공에서 맞붙은 두 마리 용을 올려다보았다.

천마룡이 수룡의 등을 공격했으나 몸집이 큼에도 민첩한 수룡은 몸을 틀어 방어했을 뿐 아니라, 그 막강한 꼬리로 천마룡의 옆구리를 강타했고, 그 때문에 천마룡이 시법원 위로 떨어졌다. 시법원은…… 당분간 편파적인 재판을 열지 못할 만큼 파괴되었다. 시법원의 상징이었던 천평칭은 천마룡의 발로 깔려 박살이 나고 말았다.

“……살아 생전에 저런 광경을 보다니.”

이제 막 하늘로 날아오른 천마룡을 넋 놓고 쳐다보던 여화는 정신을 차리고 저택을 돌아다녔다.

하인, 하녀 그리고 노예를 거느린 이 거대한 저택은 평소와 달리 혼란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래지 않아 여화는 이 저택에서 벌어진 일을 추측해 냈다.

약탈이었다.

저택의 주인, 즉 누마탄이 저택을 부탁한 집사와 관리자 들이 수룡에게 겁을 먹어 먼저 떠나자, 남아 있던 하인, 하녀 그리고 노예 들이 순서대로 미처 옮기지 못한 저택의 보물, 돈, 예술품 따위를 훔쳐서 달아난 것이다. 아무리 규율이 잡혀 있다고 해도 순식간에 질서가 무너지면 이런 약탈은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인간의 본능이었다.

잠겨 있어야 할 창고 문이 열려 있었다.

반쯤 불에 탄 어음도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단태 어머니!”

여화의 목소리는 아무도 없는 폐가에서처럼 메아리가 되어 몇 번이나 울려 퍼졌다.

저택의 본채 깊숙한 곳에 이른 여화는 열린 문 너머에 서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서재에는 각종 책과 서류들이 가득했는데, 관공서 특유의 인장이 찍힌 서류들이 바닥에 쏟아져 있었다. 그중 하나를 들어 올린 여화는 노예 매매 기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예들은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서류를 훔쳐서 달아났는데, 그 과정에서 이런 서류들이 바닥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평생 노동과 폭력에 시달려야 할 노예들에게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을 터, 여화는 노예들이 이곳에 들어와 자신의 노예 매매서를 찾으면서 느꼈을 흥분을 떠올렸다. 자유를 향한 열망이었으리라.

그때, 서류 중에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양지란?”

깜짝 놀란 여화는 그 서류를 집어 자세히 살폈다. 단태 어머니의 노예 매매 기록이었다!

여화는 급히 구매자를 찾았다.

탑의 계승자 누천파였다!

누천파가 단태 어머니를 노예 매매소에서 돈을 주고 구입한 장본인이라니. 여화는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단태를 알아요?”

너무 작아서 집중하지 않았다면 스치고 지나갔을 목소리였다.

여화는 즉시 몸을 돌려 그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살폈다. 쓰러진 탁자 뒤 공간에 떨리는 손이 보였다. 여화는 그 탁자를 옆으로 치웠다.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린 단태의 어머니가 거기 앉아 있었다. 두려움에 찬 표정을 지으며.

“단태 어머니.”

“……우리 단태를 어떻게 알아요?”

“단태가 절 보냈어요. 어머니를 모셔 오라구요.”

“…….”

어머니는 눈물만 흘렸다.

“저와 함께 가요.”

“……단태는 어디 있어요?”

“……곧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 매매서를 챙긴 여화는 어머니를 부축해서 서재 밖으로 나왔다. 구매자를 찾았으니 자유를 되찾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확신한 여화는 그 잠깐의 방심 때문에 머리 위로 떨어지는 천마룡의 그림자가 그 건물 전체를 덮을 때까지 아무 낌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림자를 확인했을 때는 이미 피할 수 없었다.

여화는 마지막 순간에 기지를 발휘하여 어머니를 잡고 우물로 뛰어들었다.

그 위로 천마룡이 쿵 소리를 내며 누천파의 저택을 뭉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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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태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자신이 갇힌 탑을 스치듯 지나가면서 두 마리의 거대한 용이 공중에서 싸우고 있었다. 발톱을 세워 할퀴고, 이빨로 상대를 물어뜯으면서. 수룡에겐 꼬리라는 유리한 점이 있었다. 천마룡은 벌써 세 번이나 수룡의 꼬리에 맞아 상아별로의 저택 위로 추락했다. 그중 세 번째는 누천파의 저택 위였으나 단태가 있는 곳에서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여기 있다가는…… 죽어.”

단태는 다시 한 번 문으로 가서 두들겼다. 역시 반응이 없었다. 용들의 전투에 이곳을 지키던 그 용감한 당용파의 용병들조차 도망친 것이다.

망설였던 단태는 침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침대 옆에 놓인 그릇에 담긴 물이 저절로 움직여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덩어리를 이룬 채 단태 앞으로 다가온 그 물은 단태의 의지에 따라 묵직한 도끼로 바뀌었다. 단태는 그 형체를 유지하는 동시에 손을 뻗어 물로 만든 도끼의 자루 부분을 잡고 문의 손잡이를 내리쳤다.

도끼의 날 부분은…… 신경 써서 압축하고 회전까지 걸어 놓았기 때문에 진짜 도끼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견고했다. 다섯 번이나 내리치자 손잡이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단태가 예리한 칼로 변형시킨 물로 손잡이 안쪽을 찌르자, 문이 열렸다.

“휴우.”

이 다락방에 갇혀서 혼자 지낼 수밖에 없었던 단태가 그동안 전력을 다해 물을 특정한 형체로 만드는 기술을 연마했는데, 단점은…… 극심한 체력, 정신력의 소모였다. 한 번 물로 도끼 따위를 만들면 두통과 오한에 시달렸던 것이다.

겨우 몸을 추스른 단태는 주머니에 물을 담은 후에 다락방 밖으로 나왔다.

저 아래로…… 나선형의 계단이 뻗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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