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06화 (106/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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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은 당연히 기뻤다. 그러나 수룡이 내뱉은 그 가공할 액체, 모든 것을 다 녹여 버리는 그 액체의 웅덩이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서도 멀쩡했던 단태와 그런 단태를 데려간 수룡을 생각하면 그 기쁨은 사소한 감정에 불과했다.

철무는 끓어오르는 피를 느꼈다.

몸이…… 흥분하고 있었다.

아내와 딸을 잃은 이후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에게 꿈은 추명이었다. 추명의 일원이 되어 학대받고 폭력에 시달리며 착취로 고통당하는 동족을 위해 한 몸 바치리라 마음먹었다. 그게 소원이자 꿈이었는데, 철석같이 믿었던 동료의 배신으로 가족을 잃자 모든 것이 달라져 버렸다.

여전히 추명의 부름을 받으면 꾸역꾸역 나가서 힘을 빌려 주곤 했지만, 이전의 열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번운재와 윤강 등 믿을 만한 사람들이 찾아와서 조언을 해 주었지만 철무는 억지로 열정을 끌어낼 수는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말라 버린 우물을 아무리 판다고 해도 물은 나오지 않는다.

철무는 새로운 우물, 물이 콸콸 솟아나는 우물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 녀석이었다!

단태라는 녀석.

생각해 보면 기이한 일이 이 도시에서 벌어졌다. 150여 년간 지속되던 불편한 균형이 요즘처럼 크게 흔들린 적도 없었다. 용혈로 간 두 명의 계승자가 용의 유산을 받았다는 이유로 도시의 힘은 둘로 나뉘었다.

마둔수탑의 수장 누마탄은 실질적인 전력을 이끌고 수도 용금탄으로 가서 팔마탑의 일원이 되었고, 그 아들 계승자 누천파는 황궁에 머무는 특권을 누리며 용의 유산을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도시의 계승자 반우현도 보다 넓은 세계인 용금탄과 황궁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쌓으며 또 다른 용의 상속자로서 살고 있는데, 그 때문에 물의 도시가 자랑하는 인재들이 대거 용금탄으로 옮겨 간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권력과 담 쌓고 살던 륜사가 마둔수탑의 부탑주, 유타루체에 있는 마둔수탑의 수장이 되었고, 변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륜사로 인해 마둔수탑이 달라지자, 도시의 군소탑들도 바뀌었고, 그 영향력은 하층민에까지 내려왔다.

륜사는 공정함을 강조했을 뿐이지만, 바로 그런 일관성 있는 조치로 인해 그동안 시청, 시법원, 노예 등록소 등 도시를 지배하는 관공서의 정책이 얼마나 편향적이며 즉흥적이었는지 사람들은 깨닫게 되었다. 하층민뿐 아니라 중류층이라 할 수 있는 도시의 대다수 시민들도 조금씩 륜사 같은 지도자가 도시를 다스린다면 훨씬 더 살기 좋을 거라는 농담을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위기감을 느낀 시장은 륜사를 제거하기 위해서 계획을 세웠고, 실행에 옮겼다. 그게 바로 마둔수탑의 종자장이자 륜사의 종자인 단태를 잡은 이유였다. 그러나 륜사가 예상을 깨고 빨리 돌아왔을 뿐 아니라 단태가 혀를 깨물어 자백하지 않고 시간을 번 까닭에 시장의 계획은 삐걱대기 시작했다.

여기서 시장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소리 마법사를 고용해서 하층민과 추명의 관심을 수룡에게로 돌리려 했는데, 그 수룡은 이전과 달리 시청으로 날아와 버린 것이다.

‘시장도 지금쯤 그 이유를 찾고 있겠지.’

철무는 윤강이 내민 육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먹을 게 들어가자 마음까지 든든해졌다.

사실상 륜사와 시장의 싸움이었다. 단태는 그 사이에 끼어 피해를 입었을 뿐인데, 철무는 륜사와 시장보다 단태에게 주목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눈길을 끄는 녀석이었다. 아직도 그 녀석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녀석이 종자장이 된 방식도 굉장히 신선해서 인상적이었다. 수석 수련사 당원일은 승급 시험을 통과해서 봄이 되면 타마의 자리에 오를 예정인데도, 단태에게 복수하기는커녕 오히려 단태와 자주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거기에 수룡이라니…….’

순간, 철무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떨림이 심해서 육포를 떨어뜨렸다.

“왜 그러나?”

윤강이 육포를 집어 내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육포를 받아든 철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는데, 속으로는 흥분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단태는 누천파, 반우현과 함께 고룡 암탄주에게서 선택을 받은 최후의 세 명 중 하나였다. 누천파, 반우현과 달리 단태는 상상을 초월하는 용의 유산을 거절했다. 나중에야 단태에 대한 소문을 들은 철무는 암탄주가 용족의 부활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소문으로 알았다. 소문은 믿을 게 못 되지만 소문을 철저히 무시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었다.

철무는 번운재의 집에 밥을 먹으러 갔다가 단태와 친한 종자 창수에게서 그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후에야 소문에 포함된 진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단태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이라 용의 유산을 거부한 것이다.

‘내가 암탄주라면…… 그 두 계승자보다는 단태에게 유산을 남겼을 거야. 왜? 탑의 계승자는 탑에 관심이 많고, 도시의 계승자는 도시에 관심이 많으니까. 그러니 유산을 받는다고 해서 약속을 지킬 보장은 없는 거지. 차라리 솔직한 단태에게 용족의 부활을 맡겼을 거야. 물론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겠지만.’

철무는 ‘암탄주가 용의 유산을 단태에게 전했다면’이라는 가정을 두고 그동안의 일을 새롭게 구성해 봤다. 확실한 판단을 위한 근거가 부족하지만, 조금 전에 두 눈으로 목격했던 단태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접근법이었다.

용의 유산을 이은 자라면…… 수룡이 무언가를 느끼고 데려갔을지도 모른다.

이게 철무의 추론이었다.

“갈까?”

윤강이 일어섰다.

“그래.”

두 사람은 손에 칼을 쥔 채 흑야궁을 달리기 시작했다.

@

거미 세 마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여화는 단태의 어머니 앞에 서서 겨우 만들어 낸 ‘광양체’로 거미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 우물은…… 지하 미로의 입구였다. 천마룡의 추락을 피해 우물로 몸을 날린 여화와 단태의 어머니는 우물 아래쪽의 물살에 휘말려 어디론가 떠내려갔는데, 여화가 지친 어머니의 손을 꽉 잡고 겨우 그 물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여화는 동굴 같은 통로를 보고는…… 흑야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마법사는 물론 용병까지 발을 들여놓기를 꺼리는 흑야궁에 내려올 기회가 딱 한 번 있었다. 륜사가 흑야궁에서만 자라는 ‘흑문세초’를 채취하려고 지하로 내려왔던 것이다. 당시 막 수련사가 되어 마음이 들떴던 여화는 혼자 다니지 말라는 륜사의 충고를 잊어버리고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횃불 하나 들고 어둠에 잠긴 통로를 헤매니……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륜사와 함께 있을 때는 전혀 무섭지 않았던 모든 어둠이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그때, 흑천주 한 마리가 여화에게 몰래 다가왔다. 꼬리의 독침이 여화의 배를 찔렀다. 마비된 여화는 꼼짝 없이 체액을 빨릴 상황이었는데, 륜사가 나타나 그 거미를 거대한 물방울에 가둬 익사시켰다. 여화는 륜사의 등에 업혀 탑에 돌아갈 때까지 마비된 채로 있어야 했다.

그때의 기억으로 거미라면…… 질색인 여화는 뒤에 서 있는 단태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빛을 싫어하는 거미를 막고 있던 광양체가 사라졌다. 마력 공급이 끊어진 것이다. 지친 여화는 더 이상 마법을 펼칠 힘이 없었다.

이제 남은 건…… 희미한, 거의 다 타 버려 꺼져 가는 횃불뿐이었다.

거미들이 노골적으로 다가왔다.

악취가 코를 찔렀다.

저 추악한 생명체가 발을 딛는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때, 천장에 있던 거미가 여화를 노리고 내려왔다.

“위쪽이에요!”

단태 어머니가 경고했지만 이미 늦었다.

흑천주의 독침이 여화의 목덜미를 찌르기 직전, 화살 일곱 대가 날아와 흑천주의 급소 일곱 군데에 박혔다. 흑천주는 그 화살에 담긴 힘에 밀려 또 다른 흑천주의 몸을 깔아뭉개며 죽었다. 다른 거미들은 새로운 적의 등장에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주저앉았다가 어머니의 도움으로 겨우 일어선 여화는 뒤쪽으로 돌아섰다.

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는 하겠지만, 흑야궁은 워낙 불법과 폭력이 자행되는 곳이라서 여화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깨끗이 죽는 게 나은 상황도 세상에는 있는 법이니까.

“안심하세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자들이었다.

“안심해요. 우린 여자의 적은 아니니까요.”

정확한 발음에 견고한 의지가 담긴 그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나이 든 사람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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