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07화 (107/293)

<-- 107 회: 3-26 -->

그 순간, 앞에 서 있던 여자가 면사를 올렸다. 주름진 얼굴인데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있는 여인이었다.

“나는 용봉고의 소청대라고 해요.”

“……용봉고?”

여화는 륜사에게서 용봉고라는 조직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오직 여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그 조직은 광산 도시라 할 수 있는 강성루체에서 시작되었는데, 용금탄에도 용봉고의 지부가 있을 만큼 거대하다는 설명이었다. 물론 륜사는 비아냥거리는, 여자들이 어떻게 그런 조직을 유지하냐는 말투로 설명했었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여자를 내쫓는 법이 없답니다. 비밀만 지켜 준다면 그대들을 도와주겠어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태 어머니가 기절하고 말았다.

여화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다른 선택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명룡

륜사는 사흘 만에 깨어났다.

탄양극수를 펼쳐 수룡 유천주와 함께 추락했던 그는 수룡의 꼬리가 후려쳐서 부순 운하에 빠졌는데, 천마룡에 타고 있던 반우현이 얼음이 둥둥 떠 있는 운하로 몸을 던져 바닥에 가라앉은 그를 구한 지 사흘 만이었다.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몸 내부의 잠재력이 고갈되어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눈을 뜬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활력으로 그득한 몸 상태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상이 달라진 게 아니었다.

그 자신이 달라졌다.

륜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지만 할 수만 있다면 일어나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난…… 천마야!’

마법사라면 누구나 꿈꾸는 천마의 경지!

륜사는 그 천마의 경지를 다룬 책이나 글은 모조리 읽었다.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마법사라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랑의 일기, 아레마고의 제자들이 남긴 기록, 묘사탁의 대화집, 풍립의 노래, 청화의 비문 등 천마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 그 경지에 대해 묘사한 부분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떻게 천마의 경지에 올랐는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천마가 되는 순간 즉시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고 적어 놓았다.

천마는 일곱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마법사의 경지라고 알려져 있었다. 분신, 전성, 순간이동, 물질 변화, 비행, 교감 그리고 예지가 바로 그 일곱 조건이었다.

물론 일곱 분야에 모두 조예가 깊을 수는 없었다. 천마의 경지에 다다른 마법사들은 출신 탑의 마법 성향과 관련된 분야에 강점을 보이는 반면 다른 분야는 평범했는데, 그 평범의 수준조차 천마에 이르지 못한 대다수 마법사들의 실력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마법의 역사에 일가견을 지닌 역사학자이자 천마 전문 연구가로 명성이 높은 왜납은 한 명의 천마가 열두 명의 용마를 능가한다고 장담하기도 했다.

륜사는 분신은 ‘분형수체’를 통하여 이미 달성한 바가 있지만 나머지 천마의 조건은 접근도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이미 천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 확신은…… 근거나 논리를 능가하는 기이한 믿음이었다.

그토록 부러워했던 황명거사 석장명처럼 전성도 할 수 있을 테고, 백휘섬선 광오선처럼 순간이동도 가능할 것이며, 광마 종만추처럼 마음껏 하늘을 날 수 있고, 은림자 차명처럼 교감도 가능할 터였다. 그들처럼 능숙하고 위력적으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해도 천마로서 일곱 가지 분야를 섭렵할 기회를 갖춘 셈이다.

용령 제국이 건국된 이래 대마법사 하랑을 제외한다면 자신이 가장 젊은 나이에 천마의 경지에 올랐다는 점도 륜사에게는 충분히 기뻐할 만한 부분이었다. 천마로서 보내는 시간이 길수록 더 다양한 분야에서 강점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흥분이 서서히 가라앉자 륜사는 수룡 유천주가 죽었는지 궁금해졌다. 마침 명국영이 병실로 들어섰다.

“……일어났는가?”

“유천주는?”

“도망쳤네.”

“…….”

륜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탄양극수라는 최강의 마법을 펼쳤는데도 달아났다니.

“몸은 좀 어떤가?”

“입만 살았어. 나머진…… 아파서 죽을 것 같아. 도시는 어때?”

“시청이 파괴되었네. 잔해를 치우는 중인데, 수룡이 덮친 터라 돌무더기만 남은 모양이야.”

“……그 녀석은?”

륜사는 마음이 무거웠다. 수룡의 꼬리가 시청 중앙탑을 날려 버리는 광경을 봤기 때문에 이미 결과는 알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주위를 살핀 명국영은 병실의 문을 잠그고 침대 옆으로 돌아온 후에야 입을 열었다.

“수룡이 데려갔네.”

“……뭐?”

“내 눈으로 똑똑히 봤네. 수룡이 앞발로 단태를 잡아서…… 호수로 날아갔다네.”

놀란 륜사는 상체를 세웠다가 극심한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그런데도 명국영을 향한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다시 말해 봐.”

그 말에 명국영은 자신이 본 광경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했다. 어떤 이야기도 명국영의 입을 통하면 생명을 얻는데, 직접 본 장면이라 설명만 들었는데도 륜사는 사실이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만큼 자세했고, 진정성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한참 만에 륜사가 입을 열었다.

“시장은 알고 있나?”

“모를 걸세.”

“불행 중 다행이군.”

“아마도.”

륜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명국영은 생각에 잠긴 륜사를 방해하지 않고 기다렸다. 쉽게 소화할 수 있는 사실이 있는 반면에 시간을 들여 곱씹어야만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도 있는 법이다.

대신 륜사를 쳐다보던 명국영은 그 의원의 말대로 적어도 5년, 아니 10년 가까이 젊어진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의원은 륜사가 살아난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열 번은 죽어야 하는 상처인데 상상을 초월하는 회복력 덕분에 살아났다는 이야기였다.

륜사가 명국영을 응시했다.

“시장은 뭘 하고 있나?”

“복구 공사가 이미 시작되었네. 정확히 말하면, 잔해부터 치우고 있는 셈이지. 간척장에서 일하던 노예들이 모두 시청 작업에 투입되었네. 수룡 유천주가 난장판을 만든 시청을 치우는 데만 몇 달이 걸릴 거라더군.”

“잘됐군.”

륜사가 차갑게 웃었다.

“……누천파가 돌아왔다는 사실, 자네도 알고 있지?”

명국영은 조심스러웠다. 륜사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아직은 환자였던 것이다.

“모를 수가 없지. 천마룡을 조종해서 수룡을 괴롭힌 게 그 녀석의 공로니까.”

“그가 왜 돌아왔는지는 아는가?”

“…….”

륜사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확실치는 않네만, 시장은 이번 재앙을 책임질 희생양을 찾고 있을 걸세. 그 자신이 책임지지 않으려면 누군가 내세워야 하는데…….”

“그게 바로 나란 말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네. 황궁에 머물던 탑의 계승자가 갑자기 돌아온 것도 따지고 보면 탑주 누마탄이 자네를 끌어내리려는 의도가 아니겠나? 시장과 누마탄, 누천파가 힘을 합친다면 자네를 탑에서 쫓아낼 뿐 아니라 그보다 더 악한 짓도 할 수 있을 걸세. 그러니 우리에겐 힘겨운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고 봐야 하네.”

“아니, 그렇지 않아.”

륜사가 힘주어 말했다.

“무슨 뜻인가?”

“누마탄과 누천파는 절대 날 내치지 않을 거야.”

“……왜?”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야. 그보다, 배가 고프군. 고기를 먹고 싶은데.”

륜사는 배를 어루만졌다.

“의원 말로는 앞으로 열흘은 죽을 먹어야 한다던데, 아닌가?”

“그 의원 말은 무시해. 겉을 잘 익혀 속은 육즙으로 부드러운 그런 고기 요리 좀 갖다 줘. 이러다간 굶어서 죽을 것 같아.”

“……알겠네.”

고개를 갸웃거리며 병실 밖 복도로 나간 명국영은 의원에게 륜사의 머리에 이상이 있지는 않은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 순간, 륜사의 목소리가 귓속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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