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08화 (108/293)

<-- 108 회: 3-27 -->

[전음]-난 천마야. 누마탄 사형과 그 애송이 계승자는 오히려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을걸. 제발 탑에서 나가지 말아 달라고.

깜짝 놀란 명국영은 주위를 살폈는데 아무도 없었다. 문을 열고 병실로 돌아간 그는 활짝 웃는 륜사를 보았고, 그제야 륜사가 천마의 경지에 오른 마법사만 할 수 있는 전성을 통해 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륜사가 의식을 잃었던 지난 사흘 동안 그를 불면증으로 몰아간 염려와 걱정이 녹아내렸다. 륜사가 천마라면…… 누마탄, 누천파는 물론 시장 반명까지도 함부로 륜사를 내치지 못할 것이다. 천마를 보유한 도시는 제국 내에 단 일곱 개뿐이었는데, 오늘부로 유타루체가 여덟 번째 도시가 된 셈이었다.

륜사가 전성으로 말했다.

[전음]-자넨 이곳을 내게 맡기고 어서 용금탄으로 가는 게 좋겠어. 단태도 내게 맡겨. 당장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으니 말이야. 자넨 용금탄에서 힘을 길러 다시 돌아와. 그게 나와 단태를 도와주는 거야.

귓속에서 모기가 앵앵 날아다니는 듯한 그 목소리가 너무 신기한 명국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륜사의 안전이 확보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도시에서의 영향력이 이전보다 월등히 커졌으니 그에게 단태를 맡기고 수도로 떠날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래도 조심하게.”

“자네도.”

명국영은 그냥 밖으로 나갔다. 새삼 악수나 포옹 따위는 어딘지 좀 어색할 것 같았다.

그날 밤, 명국영은 짐을 챙겨 유염상으로 향하는 역마차에 몸을 실었다. 유염상은 유타루체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교통의 요충지로 명성이 높았다. 거기서 하룻밤 묵고 곧바로 용금탄으로 갈 계획이었다.

명국영은 신을 믿지 않고 믿어 본 적도 없지만, 불편한 역마차의 의자에 앉아 겨울 풍경을 바라보며 단태가 살아 있기를, 이번 고통과 시련이 단태에게 거름이 되어 더욱 성장한 단태를 언젠가 볼 수 있기를 빌고 또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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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천마의 탄생 소식은 물의 도시 전역으로, 그리고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제국 중앙의 용금탄은 금세 젊은 천마에게 적절한 별명을 붙였다. 바로 ‘용천마’였다. 본인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용천마 륜사라는 호칭이 곳곳에서 열리는 연회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륜사가 용의 상속을 받은 반우현, 누천파의 사부라는 이유 때문인데 사실 여부는 그들에게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황제가 대규모 연회에 참석하여 용천마 륜사를 입에 올리자, 이제 공식적으로 마법사들뿐 아니라 역사학자들까지 당대의 여덟 번째 천마의 호칭을 용천마 륜사로 결정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용천마의 명성은 곧 칠성시로 퍼져 나갔다.

불의 도시 방염루체, 바람의 도시 풍안루체, 숲의 도시 파림루체, 동물의 도시 맹파루체, 철의 도시 강성루체, 죽음의 도시 망혈루체 그리고 물의 도시 유타루체에서도 용천마 륜사를 여덟 번째 천마로 인정한 것이다. 특히 유타루체와 경쟁 관계에 있는 불의 도시 방염루체는 용의 유산을 이은 사람은 누천파, 반우현이 아니라 천마의 경지에 오른 륜사라는 거짓 소문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유타루체의 마둔수탑 탑주실을 차지한 누천파는 보주관 중문석이 가져온 수정구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축하 인사를 받아야 했는데, 매번 웃으면서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게 너무나 힘이 들었다. 그러나 이곳의 책임자로서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수정구를 건드리자 백발의 노인이 나타났다. 또 어딘가 궁벽한 촌동네에 처박혀 있던 늙은 마법사가 천마의 탄생 소식을 듣고 먼지에 쌓인 수정구를 닦아서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나는 진극명이오.”

“마둔수탑의 유타루체 지부를 임시로 맡고 있는 누천파입니다.”

“용천마 륜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만.”

“그분은 지금 여기 안 계십니다.”

누천파는 골치가 아팠다. 다들 륜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다들 륜사를 잘 아는 것처럼 친한 척했다.

“그러면 진극명이 연락했다고 전해 주시오.”

상대는 그냥 연결을 끊었다.

무례하게.

누천파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일어나 창가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노예들이 투입되어 잔해 제거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수룡이 박살 낸 시청은…… 아무리 빨라도 2년, 어쩌면 3년은 지나야 원래 규모로 복구될 수 있을 것이다. 시청뿐 아니라 부유층이 몰려 있는 상아별로 구역도 사정은 비슷했다. 수룡은 이번에 씻을 수 없는 피해를 도시에 입혔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층민 구역은 거의 건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상처 입은 맹수는 늑대 떼에 물려 죽기도 하니까.’

누천파는 앞으로 이 도시에서 벌어질 변화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적어도 몇 년은 시장과 11인위원회가 이전만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권력의 공백을 누가 차지할까? 아마 추명이 발 빠르게 움직여 도시의 영향력을 가져갈 터였다.

도시는 저 아래에서 급변하고 있었다.

륜사에게 수룡의 난입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 했던 시장의 계획은 사실상 좌절되고 말았다. 시장이 미치지 않고서야 천마 륜사, 수룡을 땅바닥에 처박은 최강의 마법사, 그로 인해 죽을 뻔한 영웅을 도시를 파괴한 장본인으로 몰고 갈 수는 없었다.

시기를 놓친 시장은 민심뿐 아니라 그를 지지하던 세력까지 일부 잃었다. 바로 이번 일로 상아별로 지역이 크게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11인위원회에 속한 가문들은 때로는 은근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이번 피해는 시장의 잘못이라고 내비쳤던 것이다.

도시가 완전히 회복하기까지 줄잡아 수 년은 걸린다. 그때까지 겉으로는 크게 변화가 없을지 몰라도 물밑으로 주도권을 쥐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질 터였다.

누천파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창가에 서서 곰곰이 생각했다. 한때는 저 도시를 내려다보며 가슴 벅찬 감동을 느끼기도 했다. 탑주실의 이 자리에 서서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는 게 꿈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용혈에서의 그 일이, 용금탄 황궁에서의 삶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여긴 너무 좁아.’

곧 용금탄으로 올라갈 마음을 굳힌 그는 이 탑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냥 가 버린다면 륜사가 천마로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릴 터였다. 아버지는 한사코 반대하겠지만 어쩌면 아예 륜사에게 탑을 맡겨버리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륜사라면 탑에 속한 마법사들의 실력을 최고로 끌어 올릴 것이다.

‘그래, 륜사에게 맡기자. 탑의 내실을 다져야 할 때니까.’

물론 륜사가 평생 이 탑을 움직이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몇 년 후에는 직접 탑을 가지러 내려올 생각이었다.

그때, 륜사가 탑주실로 들어섰다.

“아, 오셨습니까?”

“내가 없는 동안, 업무를 처리했다면서? 고맙다.”

“뭘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요.”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륜사는 그 성격대로 돌려 말하지 않고 핵심을 찔렀다.

“올라가야죠. 용금탄으로.”

“여기는?”

“부탑주께서 맡아 주셔야죠.”

누천파는 부탑주의 책상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연한 이야기를 왜 물어보냐는 느낌을 담았다.

“네 아버지의 생각은 다를 것 같은데.”

“제가 올라가서 설득할 생각이에요.”

“……그래?”

“그보다, 스승님께서 용금탄으로 올라가셨다면서요?”

“며칠 전에 출발했다더군.”

“아쉽네요. 천마…… 아니, 용을 타고 함께 가면 더 편하실 텐데 말이에요.”

누천파는 천마룡이라고 말할 뻔했다. 수룡과의 전투로 죽은 천마룡 대신 또 다른 용을 타고 용금탄으로 가는데, 아직 그 용의 이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 친구는 용보다는 마차가 편하다더구나.”

“……그래요?”

누천파는 륜사가 명국영과 상당히 친하다는 점을 깨닫고 크게 놀랐다. 륜사는 쾌활한 편이지만 평생 친구 없이 혼자 지내 온 마법사였다. 언제 명국영과 가까워졌을까? 물어보고 싶지만 그랬다가 륜사가 의심할까 싶어 포기하고 말았다.

“올라가면 탑주께 안부 전해 주려무나.”

륜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누천파는 탑주실 밖으로 나왔다. 오가는 말과 달리, 이제 서로가 진심을 알고 있었다. 아직은 예의를 차리지만 언젠가 발톱을 드러내어 상대를 할퀼 때가 올 것이다.

누천파는 륜사가 천마라는 사실 때문에 지금 여기서 결판을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제아무리 천마라고 해도 힘만으로 탑을 이끌 수 없다는 점을 용금탄에서 확인한 그는 원래 계획대로 밀고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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