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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경로로 가자, 반우현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정말 용금탄으로 갈 거야?”
누천파가 물었다.
“내가 여기 있어 봐야 별로 도움이 되지 않거든.”
“시장님께서 힘드실 텐데.”
“이깟 일로 흔들릴 분은 아니셔.”
반우현의 말투에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존경심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건 그래.”
“그보다, 륜사 오라버니에게 저 탑을 맡기고 가도 돼? 나중에 빼앗을 자신이 있는 거야?”
“……그렇게 보이냐?”
속이 뜨끔한 누천파.
“그냥 넘겨줄 생각은 아니잖아.”
“당장은 부탑주님을 상대해서 내가 이길 수는 없으니 도리가 없지. 힘을 기른다면 언젠가 해 볼 만하지 않겠어?”
“우와, 제국에 여덟 명밖에 없는 천마를 상대로 한번 해 보시겠다? 대단한걸.”
반우현이 휘파람을 불었다.
“빨리 가자. 황궁에 도착해서 용의 유산에 몰두하고 싶으니까.”
“내 생각도 그래.”
두 사람은 준비를 마친 용의 등으로 올라갔고, 잠시 후 그 용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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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허연 뼈로 만들어진 우리에 갇힌 단태는 거대한 두 마리 용이 공중에서 발톱을 세워 서로를 할퀴고, 두툼한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러 시청 건물, 특히 탑을 날려 버린 날, 벽돌과 나무 그리고 땅바닥까지 녹이는 기이한 액체에 빠졌던 바로 그날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가까운 곳에서 보았고, 누구보다도 직접적으로 겪어 낸 사건이었다. 머리보다 몸이 그날의 압도적인 충격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극도의 흥분은 익숙한 감정으로 바뀌었다.
절망 그리고 좌절로.
애를 쓸수록 상황은 나빠지기만 하는 것 같았다. 물의 도시로 들어선 이후, 아니,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 계속 깊은 구덩이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태어나지 말아야 할 운명이 아닐까 여러 번 생각했었다. 륜사의 종자가 되었을 때도, 종자장으로 결정됐을 때도 이 뿌리 깊은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었다. 몹시 기쁜 일이었지만 그다음에 찾아올지도 모르는 더 큰 실망과 낙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부푼 꿈을 안고 물의 도시 안으로 들어온 그 순간부터 단태는 많은 것을 배웠다.
무조건적인 신뢰가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았다. 또한 ‘할아버지’와 ‘어르신’ 같은 단어가 특정한 상황에서는 어떤 마법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점도 알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자존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깨우쳤으며 ≪무무비경≫의 첫 번째 문장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도 느꼈다. 고룡 암탄주로부터 선택을 받았으며, 그 화려한 황궁에 들어가서 황제를 만났다. 노예 등록소의 장부를 보기 위해 종자장이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당원일이라는 수련사와 친해지기까지 했다. 적을 굴복시키는 것보다 감동시키는 게 훨씬 낫다는 지혜도 배운 셈이었다.
그러나 그동안의 모든 배움이…… 저 거대한 용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수룡 유천주는 상식을 뛰어넘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이제 어떻게 하지?’
그때, 수룡이 재채기를 했다.
거대한 몸이, 특히 그 굵고 기다란 푸른색 목이 요동을 쳤다. 자연스럽게 초대형 목걸이가 철렁거렸고, 그 목걸이에 보석 장식품처럼 걸려 있던 하얀 우리는 돌풍에 낙엽이 이리저리 날리듯 허공에서 춤을 추었는데, 그 우리에 갇혀 있던 단태는…… 천지가 뒤집혀 위로, 아래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날아가 그 단단한 뼈에 부딪혔다.
목걸이의 요동이 멈추자 단태는 그 뼈와 뼈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샛노란 액체를 토해 냈다. 위액과 침이 뒤섞인 그 액체는 한참이나 추락하여 황금이 깔린 바닥에 떨어졌다. 노련한 뱃사람이라 해도 여기서는 멀미를 할 수밖에 없으리라.
한동안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 현기증과 찌르는 복통이 사라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서서히 속이 가라앉자, 단태는 이곳으로 끌려온 이후 계속 고민했던 두 개의 질문을 떠올렸다.
‘왜 수룡 유천주는 나를 죽이지 않고 잡아왔을까?’
첫 번째 질문이었다.
용에게 붙잡혀 끌려간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제법 많았다. 이유는 제각각이었지만 크게 본다면 목적은 단 하나였다. 바로 용의 요구 때문이었다. 소문난 대장장이, 솜씨 좋은 악기 연주자, 목소리로 사람들을 감동시킨 가수 등 뛰어난 재주를 지닌 사람들이 용에게 잡혀갔다고 숱한 이야기는 말하고 있었다.
‘내겐 그런 재주가 없어…….’
여기에 단태의 고민이 있었다.
‘쥐와 나무, 벽돌 그리고 땅바닥까지 녹인 그 액체 안에서 왜 나는 멀쩡했을까?’
두 번째 의문이었다.
추측은 가능했다. 단태는 수탄왕령의 이야기를 기억해 냈다. 진정한 용의 유산을 이어받은 사람은 바로 단태이며, 누천파와 반우현은 암탄주에게 속았다는 내용이었다. 혹시 용의 유산 덕분에 그 액체 안에서도 무사하지 않았을까?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질문의 답이 될 수는 없다. 명국영이 몇 번이나 강조한 부분이었다. ‘명료한 생각’은 가능성을 높이는 정밀한 과정으로 하나의 답이 남을 때까지 나머지 경우를 제거해 나가는 작업이라고 명국영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가르쳤던 것이다. 더 깊이 생각하고 싶지만, 이 새장 같은 우리에 갇힌 채로는 불가능했다.
그래도 어두컴컴한 천장에 박힌 빛나는 돌은 별처럼 반짝이고 있어서 이제는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행복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물론 추억이라고 할 만한 기억은 흔치 않았다. 그 돌이 뿌린 빛이 바닥에 깔린 황금을 더 ‘황금스럽게’ 만들었다. 용이 금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그때, 묵직해서 내장까지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죽지는 않았군.”
단태는 고개를 돌려 허공에서 빛을 발하는 푸른색 눈을 쳐다봤다. 깊은 우물에 고인 물이 새파란 하늘을 담고 있는 듯한 눈이었다.
몸이 떨렸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키가 작아서 근육질 몸매에 체구가 큰 사람 앞에서는 자연스레 기가 죽는데, 저 용 앞에서는 아예 몸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압도적인 크기에 주눅이 든 것이다.
산더미 같은 몸집 때문만은 아니었다. 설명이 쉽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뱀을 보면 본능적으로 소름이 돋는 것처럼.
문득 아버지의 술 심부름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고양이의 눈이 생각났다. 달도 없는 밤이었다. 돌담 위에 앉아 있던 고양이의 눈은……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주인도 없는 들고양이라는 사실, 발로 차면 끙끙거리며 달아날 크기라는 사실을 아는데도 어둠 속에 둥실 떠 있는 그 기이한 눈을 보는 순간,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술병마저 놓쳐 박살 나는 바람에 그날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았다.
단태는 용에게 무언가 대답해야 한다는 점을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거친 숨만 흘러나올 뿐, 성대가 있는 목이 꽉 막혀 정작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단태는 겨우 목소리를 입 밖으로 밀어냈다.
“……아직은요.”
목구멍과 혀, 입술이 뻣뻣해서 목소리는 비틀려 있었다. 한 마디 했을 뿐인데, 목 놓아 노래를 부른 것처럼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의외로 질기군.”
저 목소리,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다. 듣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마법이라도 걸려 있을까?
엄마와 여동생이 이웃 마을로 가서 하룻밤 자고 오는 바람에 혼자 집을 지키는데, 한밤중에 저절로 열리고 닫히면서 삐걱대는 문소리처럼 어딘지 모르게 비정상적인, 소름이 돋게 하는 무언가가 용의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목소리를 들으면…… 눈앞에 유천주가 있는데도 혼자 있는, 그래서 또 어딘가의 문이 저절로 열리고 닫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깊은 공포에서 벗어난 후에야 단태는 유천주가 말을 한다는 사실에 또 다른 의미로 놀랄 수 있었다. 고룡 암탄주가 지성을 갖춘 마지막 용이라고 철석같이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천주는 말투에서 오랜 세월과 깊은 지혜가 은연중 배어 나오는, 노골적으로 인간을 깔보는 용이었다.
수룡의 눈이 다가왔다. 시퍼런 등불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었다. 눈동자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실핏줄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보였는데, 전부 파란색이었다.
옛이야기를 통하여 막연히 느꼈던 용에 대한 호감은 이미 깨진 지 오래였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저 눈앞에 서느니 차라리 벌거벗은 채로 마을 사람들 앞에서 춤이라는 추는 게 낫다고 단태는 생각했다. 목소리뿐 아니라 눈빛에도 용 특유의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