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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날 만큼 예쁜 여자가 다가와 있었다.
“……네.”
“저는 기루를 운영하는 소영이라고 해요. 여화 수련사님이시죠?”
“제가 여화예요.”
“양지란 언니처럼 좋은 분을 소개시켜 줘서 정말 감사드려요.”
“아, 네.”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인 소영이 취영로 본채로 걸어가자, 여화는 잠시 술에 취한 것처럼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마법을 익히느라 죽을힘을 다한 나머지 여자로서의 매력을 잃은 게 아닌가 싶었던 여화는 같은 여자가 봐도 우아한 태도와 말씨여서 솔직히 부러웠다. 그래도 저 여자의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썰매가 있는 선착장으로 가려는데, 술 취한 남자가 별채에서 나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여화는 보는 순간 그 남자가 바로 강마 탑교하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어? 이게 누구신가? 륜사 부탑주의 수련사가 아니신가? 이곳엔 웬일이지? 아하! 알았다! 이 탑교하 어르신이 추락하는 꼴을 직접 확인하라는 지시를 받은 모양이구먼. 좋아. 화끈하게 보여 주지.”
탑교하는 그 자리에서 바지춤을 풀더니 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재빨리 고개를 돌린 여화는 시장과 탑주 누마탄의 은밀한 지시에 용기를 내어 륜사를 배신한 탑교하가 갈 곳 없어진 불쌍한 신세가 되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탑교하는 마둔수탑 마영국의 수장이었으나 자존심 때문에 복귀할 수가 없었다. 은근히 부탑주가 직접 찾아오기를 기다렸는데, 천마가 되어 위상이 대륙 전체로 뻗어 나간 륜사는 탑교하를 부르지도, 찾아가지도 않았던 것이다.
“실례하겠습니다.”
여화는 선착장으로 내려가 썰매를 타고 탑으로 향했다.
바지를 추스른 탑교하는 울고 싶었다. 이럴 줄은 몰랐다. 부탑주의 지위를 맡길 수도 있다는 편지 한 장을 믿고 마둔수탑을 걸어 나왔는데, 이젠 갈 곳이 없었다. 물론 그를 받아 준다는 군소 탑들은 몇 군데 있었다. 하지만 탑교하 자신이 싫었다. 금룡반침에 길들여진 입이 비린내 나는 생선 구이를 맛있어할 리가 없다.
“술이나 마시자.”
다시 방으로 돌아간 탑교하는 반쯤 정신이 나가 버려 방을 잘못 찾았다. 시끌벅적하고 엉망진창인 방이 아니라, 건장한 남자 두 명이 진지한 분위기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아, 미안하오.”
딸꾹질을 하면서 탑교하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불청객의 등장에 이야기의 맥락이 끊겼지만, 윤강은 개의치 않았다. 이미 마음으로 결정했던 것이다.
“자네가 추명을 맡아 주게.”
“……내가?”
철무는 깜짝 놀랐다. 윤강이 갑자기 이곳 추영루에서 만나자고 해서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여기까지는 추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난 행동대장으로서는 가치가 있지만, 대국을 파악하고 적절한 판단으로 조직을 이끄는 쪽은 영 아니야. 자네도 알지 않나?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네.”
“그래도……”
“자네가 추명을 맡지 않는다고 해도 난 곧 이곳을 떠날 생각이야. 번운재 어르신에겐 이미 말씀드렸네.”
“떠나다니?”
철무는 동료의 눈을 들여다봤다. 거기 말릴 수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남자의 결심이었다.
“당분간 이곳엔 내가 필요 없네. 시장이 자기 꾀에 빠져 시청을, 상아별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으니 몇 년 동안은 내가 없어도 추명은 위험하지 않을 거야. 난 그동안…… 어디 갈 데가 있네.”
“어디로 갈지 물어봐도 되겠나?”
“무영단.”
“…….”
철무는 신음을 내고 말았다. 윤강을 처음 본 어린 시절 이후로 오늘처럼 윤강 때문에 놀란 적은 없었다. 단단히 마음을 다잡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무영단이라니!
무영단은 대륙 최고의 용병단이었다.
용병단이라고 해도 소속 용병이 극소수여서 수천수만 명의 대규모 용병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최강의 용병단 하면 누구나 무영단을 떠올렸는데, 이유는 명백했다. 거기 속한 용병들 개개인의 실력이 타의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이었다.
과장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단 일곱 명의 무영단 용병들이 1만 명이 방어하는 요새를 하룻밤 만에 탈취했다는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했다. 게다가 누군가 한 사람의 무영단 용병을 공격하면, 무영단 전체가 나설 만큼 의리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래서 사내들 특유의 진짜 세계를 동경하는 남자들이 무영단의 일원이 되기 위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문제는 무영단이 각지에서 몰려드는 수백, 수천 명의 사내들 중에 극소수, 때로는 단 한 명만 뽑는다는 점이었다. 철무가 알기로 작년에는 합격자가 배출되지 않았다. 그 시험은 매우 혹독해서 죽어나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신을 믿는 강인한 남자들은 무영단에 입성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자네가 뭐라고 해도 난 갈 걸세. 거기 가서 나 자신을 갈고닦을 생각이라네.”
“아예 부서질 수도 있어.”
“그렇다면 그게 내 운명이겠지.”
윤강은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자네 덕분에 내 운명도 결정된 셈이군. 이거 너무하는 것 아닌가? 자넨 그 좋은 곳에 가서 더 강해져서 돌아올 텐데, 난 여기서 지루하고 복잡한 서류나 들여다보며 지내라니.”
“그래서 내가 자네를 여기로 데려온 게 아닌가? 앞으로 몇 년 동안은 못 볼 테니, 술이나 거하게 마시게.”
“술이 모자랄 거야.”
“하하, 우리 한번 술독을 다 비워 보지 않겠나?”
윤강은 필요 이상으로 호탕하게 웃었다.
철무는 그 태도에서 윤강 내부에 있는 절박함 심정을 눈치챘다.
단태를 구하기 위해 추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흑야궁을 통해 잠입하려다가 오히려 마뢰의 덫에 걸려 하마터면 전사들 모두를 잃을 뻔한 그 위기가 윤강을 더 강해지라고 채찍질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 때문에 자신의 그릇을 깨달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고, 그 때문에 무영단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윤강의 말이 옳았다. 앞으로 몇 년 동안은 눈에 띄는 충돌 없이 시간이 흐를 것이다.
두 사람은 마치 술 마시는 게 삶의 목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순식간에 술항아리를 다 비웠다. 술을 시킨 후에 윤강이 철무를 응시했다.
“그 아이, 살아 있겠지?”
철무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시청 공사 복구 작업에 투입된 추명의 사람들을 통해 알아낸 바에 따르면, 곳곳에 땅을 녹인 기괴한 액체의 흔적이 있었다. 그건 바로 용수였다. 용의 체액이라 할 수 있는 그 액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녹일 수 있는데, 오직 용만이 안전했다.
철무는 자기가 본 장면을 떠올렸다. 수룡의 앞발 발톱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아래를 보던 단태는…… 끈적끈적한 액체에 젖어 있었다. 또한 상체는…… 맨몸이었다.
‘정말 단태가 뒤집어쓴 그 액체가 용수일까? 그럴 리는 없어. 오직 용만이 용수에 닿아도 문제가 없는데.’
그 난점의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인정하기 어려운 결론이었다.
“그 아이를 구해 주게. 그건 아직 우리의 임무가 아닌가?”
윤강이었다.
“……그래야지.”
철무는 속으로 추명의 정보력을 총동원해서 단태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조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술항아리가 들어오자, 두 사람은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용옥
용의 일생은 인간과는 사뭇 달랐다.
인간은 부모가 아들딸을 양육하는 방식으로 도와주는 반면에 용은 부모가 누구인지 몰랐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알에서 깨어난 어린 용, 즉 잠룡이라 불리는 그 용은 용족 전체가 인정할 만한 훌륭한 용에게 맡겨진다. 교육을 담당하는 용이 바로 명룡이었다. 명룡은 잠룡이 독립하여 초룡의 단계로 올라서기 전까지 잠룡을 보호하며 기초적인 부분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오랫동안 보통 용오군이라 불리는 다섯 용이 명룡을 지목하거나 직접 명룡이 되어 잠룡을 맡았는데, 저주로 인해 용오군이 전멸하고 말았다는 게 유천주의 설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