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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주는 명룡으로서 잠룡인 단태, 아니 료마주를 가르치겠다고 말한 셈이었다.
왜 용수 안에서 녹지 않았는지, 물속으로 내려와도 왜 숨이 막히지 않았는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단태는 자신이 용이라는 유천주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있는 힘껏 그 말에 저항하고 있었다. 만약 그 말을 인정한다면……?
‘아니, 난 용이 아니라, 인간이야.’
마음을 가라앉힌 단태는 이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수룡이 자신을 용으로 여긴다면, 그런 ‘착각’을 굳이 바로잡을 필요는 없다. 이용하면 그만이다. 동족이니…… 잡아먹힐 염려도 없고, 이곳을 빠져나갈 가능성은 이전보다 훨씬 높아질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본격적으로 널 가르치겠다.”
유천주가 푸른 눈을 감고 낮고 빠르게 중얼거리자, 거대한 몸 전체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 빛이 섬광처럼 터지자 단태는 고개를 돌렸다. 유난히 강렬한 빛에 눈이 아팠던 것이다.
그때, 어깨에서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눈을 뜨기도 전에…… 사람의 손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사부님이 날 구하려고 왔을까?’
그런 기대로 눈을 뜬 순간, 단태는 너무 놀라서 뒤로 물러서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저 앞에…… 허연 수염을 가슴팍까지 늘어뜨린 백발의 노인이 서 있었던 것이다.
“어떠냐?”
노인이 말했다.
“설마?”
평범한 시골 노인 같지만, 눈이 달랐다. 유천주처럼 광기가 어려 있어 마주 보기가 두려운 눈이었다.
“그래, 나다. 오랜만에 몸을 바꾸었더니 좀 낯설군. 거기 멍청하게 주저앉아 있지 말고 따라오너라.”
“……네.”
무기력한 허벅지를 꼬집어 겨우 일어난 단태는 노인의 뒤를 따랐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용이 가끔 마법으로 몸을 바꾸어 인간 행세를 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게 사실이었다니! 그 거대한 몸이 저 허약한 노인으로 바뀌다니! 누가 저 노인을 보고 그 거대하고 흉폭한 수룡 유천주를 떠올릴 수 있을까?
유천주는 거대한 공간을 벗어나 좁은 통로로 접어들었다. 본체로는 들어서지 못할 통로였다.
‘아! 원래 인간의 몸에 맞게 만들어진 곳이야. 그러면 인간의 몸으로 지내기도 했다는 뜻인데.’
단태는 성인 남자 세 명이 한꺼번에 걸을 수 있는 통로를 걸어가며 용이 왜 인간의 몸으로 생활하는지 깨달았다. 그 거대한 몸에 걸맞은 공간을 만들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테지만, 인간의 체구라면 어렵지 않게 이런 통로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다.”
유천주는 석실 앞에 멈춰 섰다.
“……여기가 어딘데요?”
“용옥간.”
“용옥간?”
“안으로 들어가거라.”
유천주가 손짓을 하자 돌문은 저절로 드르륵 바닥을 끌며 위로 올라갔다.
조심스레 석실로 들어선 단태는 벽과 바닥, 천장 곳곳에 박힌 돌에서 은은한 빛이 내려오는 가운데, 기다란 선반 위에 놓인 크고 작은 수천 개의 구슬을 발견했다. 크기만큼 색깔도 다양했다. 새하얀 백색에서부터 어둠과 분간할 수 없는 흑색까지 세상의 모든 색을 모아 놓은 것만 같았다.
유천주가 다가와 옆에 섰다.
“이건 용옥이다. 인간은 우리 용족이 오만하여 협력을 모른다고 지껄이는데, 이걸 본다면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주장인지 알게 되겠지. 자, 이걸 쥐고 마력을 흘려 보아라.”
유천주는 청색의 조그만 구슬을 단태에게 내밀었다.
“……여기에 마력을 흘리라구요?”
단태는 난감했다. 수막을 만들어 내고, 물의 덩어리로 특정한 형체를 구성하는 방법은 익혔지만 아직 마력을 섬세하게 다루는 부분은 몰랐던 것이다.
“집중하면 된다. 넌 용족의 일원이니까.”
유천주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그 눈빛과 말투에서 단태는 저 용이 자신을 의심한다고 확신했다. 어쩌면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가 용인지 인간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서인지도 몰랐다.
만약 유천주의 말대로 집중했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저 오만한 용은 자신을 속인 인간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속일 의도는 없었다고 말해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으리라.
“……알았어요.”
구슬을 쥐면서 단태는 불안으로 몸을 떨었다.
다행히, 구슬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청색의 빛이었다.
단태는 기뻐해야 할지, 실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빛은 안개처럼 퍼지더니 단태를 에워쌌다. 놀란 단태가 쳐다보자 유천주는 흐릿한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단태는…… 섬광에 휩싸였다.
눈을 뜬 단태는 천마룡은 물론 수룡 유천주까지도 참새나 까치 정도로 보이게 만들 만큼 거대한 용을 하늘에서 발견했다. 단태가 서 있는 곳은…… 절벽 끝자락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숲 사이로 돌출된 잿빛 암벽이 산 정상까지 이어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난 호수 지하에 있었는데.’
“여긴 용옥의 내부다.”
옆에서 들린 목소리였다.
단태는 유천주를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음, 설명해 주마. 용옥은 기억을 담는 구슬이다. 기억뿐 아니라 상상까지도 담아 낼 수 있지만, 용족에게 기억과 상상은 다를 바가 없으니 단순하게 기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지금 네가 보는 저 용은 그 유명한 현룡 무한주다. 용족 역사상 손꼽히는 용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런 존경을 받을 만한 위대한 용이었다. 나 유천주조차 무한주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으니까.”
현룡 무한주?
어디선가 들은 이름인데.
‘아! 맞아. 대마법사 하랑에게 마법을 가르친 용이 바로 현룡 무한주였어! 그렇다면 용령 제국이 건국되었을 때인데…… 거의 150년 전이잖아. 내가 그걸 보고 있는 거야?’
“아쉽게도 무한주 역시 저주로 인해 죽고 말았다. 그 현명한 용도 결국 저주를 풀지 못한 게지.”
유천주는 혀를 찼다.
단태는 유천주에게 왜 고룡 암탄주는 자신이 마지막 용이라고 생각했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직은 유천주의 반응을 예상할 수 없었다.
유천주가 손을 흔들자, 단태는 그 절벽이 아니라 용옥간 안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건 마치…… 몸이 순식간에 이동한 것만 같았다. 그만큼 그 절벽, 하늘에 뜬 거룡이 생생했던 것이다.
유천주가 구슬을 가리켰다.
“넌 지금부터 여기 있는 용옥을 모조리 경험해야 한다. 잠룡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과정이니 그런 표정은 짓지 마라.”
“……얼마나 걸릴까요?”
“네가 하기에 달렸다. 다 경험하면 밖으로 나올 방법도 알 수 있을 테니, 그때 보자꾸나.”
유천주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석실 밖으로 나갔다. 곧 쿵 소리를 내며 돌문이 내려와 닫혔다.
유천주로부터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혼자라는 외로움이 동시에 가슴 안쪽으로 파고들자, 단태는 주저앉고 말았다. 처음 마둔수탑의 종자가 되어 눈앞에서 펼쳐진 마법을 목격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이 어마어마한 격차. 뛰어넘을 자신이 없었다.
‘용이라니…….’
누워 버린 단태는 별이 박힌 듯 반짝이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웠다. 이곳에 엄마와 설희가 함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로.
잠시 아무 생각이 없이 시간만 보낸 단태는 충동적으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정신 차려야 돼!”
뺨을 때린 그는 ‘생각’을 시작했다.
명국영에게서 배운 그 생각에 대한 가르침은 이미 몇 번이나 위력을 발휘했다. 생각은 둘로 나누어진다. 세상을 알아내는 생각, 그리고 자신을 알아내는 생각. 단태는 그중 전자에 집중했다.
이곳은 어떤 세계일까?
답은 금세 나왔다.
용의 보금자리, 즉 용이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운면산맥 끝자락에 위치한 시골 마을에서 살다가 물의 도시로 들어섰을 때의 마음속 충격도 극심했지만, 물의 도시 역시 울담반처럼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었다.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 그러나 이곳은…… 말이 통할지는 모르나 용의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