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15화 (115/293)

<-- 115 회: 3-34 -->

이제 뭘 해야 할까?

이번에도 답은 즉각 튀어나왔다.

이 세계, 용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

‘내가 마둔수탑에 종자로 들어가서 죽기 살기로 애를 썼던 것처럼. 그때와 다르지 않아. 그저…… 마법사 대신에 용이 있을 뿐이야.’

단태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탁자에 놓인 수천 개의 구슬을 쳐다보았다. 유천주의 그 무뚝뚝한 지시를 들었을 때는 저 구슬들이 부담으로 다가왔는데, 그저 생각을 바꾸었더니 같은 대상이 다른 느낌으로 찾아왔다. 역시 마음이 곧 세계였다!

이 구슬들은 지혜의 보고였다. 용의 세계를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심지어 유천주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당장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단태는 끙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키다 휘청거렸다. 그제야 배가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천주가 가끔 우리 안으로 밀어 넣는 맛없는 수초 따위를 억지로 밀어 넣은 게 이틀 전의 일이었다.

돌문으로 가서 두드렸지만 예상대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본체로 돌아가서 금이 깔린 공간에서 자고 있을 유천주는 이런 기초적인 부분에는 신경 쓸 용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현실을 깨달은 단태는 용옥간을 샅샅이 뒤졌지만 음식은커녕 물도 없었다. 화가 나서 유천주가 듣든 말든 신나게 욕을 하는데, 천장에서 딸깍 금속성 소리가 들렸다. 놀란 단태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거기 시꺼먼 무언가가 있었다.

별처럼 빛나는 돌을 막으면서 이동하는 어둠의 덩어리.

그 형체가 벽을 타고 내려오자, 단태는 주먹을 꽉 쥐며 뒤로 물러섰다.

‘……거미잖아.’

거미가 다가왔다. 탁탁, 소리를 내면서. 여덟 개의 무광택 재질의 다리는 유연하면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리 하나가 성인 남자의 몸보다 길었고, 몸통은 웬만한 마차보다도 컸다.

주위를 살피다가 큼지막한 붉은 구슬을 손에 들고 거미와 싸울 준비를 마친 단태는 그 거미가 앞쪽의 다리를 구부려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흑천지왕 흑마고가 인사드립니다.”

쉭쉭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섞여 있지만, 분명히 말을 하고 있었다.

거미가!

거미는 배쪽에서 황금색으로 빛나는 물고기 세 마리와 오색 빛깔의 수초를 꺼내어 단태 앞에 내려놓았다.

“용주님께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언제든 부르시면 이곳으로 달려오겠습니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네.”

“전 하족에 불과합니다. 말씀 낮추십시오.”

“그, 그래.”

단태는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을 듯한 거미의 짙은 눈과 무시무시한 턱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그럼.”

거미는 내려올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빠르게 천장으로 올라가더니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천장 어딘가에 거미가 드나드는 통로가 있는 모양이었다.

단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황금색 물고기가 튀어 올랐다.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 물고기 앞에 선 단태는…… 반우현이 취영루에서 맛보여 준 그 금룡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접시에 올랐던 금룡어보다 훨씬 크다는 점만 달랐다.

한참 동안 단태는 금룡어와 수초를 노려봤다.

‘이걸 나더러 먹으라는 건가? 생으로?’

곧 결론이 났다.

그는 수초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고, 기절시킨 금룡어를 물어뜯었다. 먹어야 힘을 내고, 힘이 나야 저 구슬을 손에 쥘 수 있으며, 용옥의 내용을 알아야 이 빌어먹을 세상을 알 수 있을 테니까. 이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다.

비늘과 뼈만 남기고 금룡어를 다 먹어 치운 단태는 구역질을 참고 아까 거미와 싸우기 위해 집어 들었던 붉은 구슬을 손바닥에 올렸다. 심호흡을 한 그는 구슬에 집중했다. 그러자 붉은빛이 안개처럼 흘러나와 그를 감쌌다.

곧 섬광이 터졌다.

@

그 거미는 하족이었다.

일곱 번째 용옥을 통해 단태는 용이 어떻게 하족을 거느리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검은 용옥은 제국력 1219년, 즉 가파랑 연방 시절에 만들어졌다. 따라서 용옥에 담긴 장면은 대략 250년 전의 기억이었다.

용옥의 주인 혈마주는 제국의 북동쪽 죽음의 도시 망혈루체 근처, 깊고 축축한 동굴에 자리를 잡았었다. 초룡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혈마주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일은 바로 하족과의 계약이었다. 몸이 새까만 젊은 용은 주로 지하 깊은 곳에서 살고 싶었기에 죽음의 땅 아래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거대한 두더지를 하족으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그 결정으로 두더지의 평화는 산산조각이 났다.

전쟁이 벌어졌다.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결국 두더지는 절대적인 혈마주의 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고, 그로 인해 자유를 잃고 하족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손해는 아니었다. 두더지는 계약을 통해 혈마주의 하족이 되는 대가로 생각할 수 있는 지능을 얻었다. 그 증표가 바로 ‘흑혈분’이라는 종족의 이름이었다.

혈마주와 계약을 맺은 덩치 큰 두더지는 곧 주변 두더지의 왕이 되었다. 몸집도 이전보다 커지고 지능까지 일부 갖춘 그 두더지를 상대할 다른 두더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곧 인근 지역의 두더지들이 혈마주가 자리를 잡은 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런 식으로 하족은 완성되었다.

흑혈분은 혈마주의 명령을 받고 거대한 지하 공동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필요한 구조물을 세웠는데, 그동안 혈마주는 손끝도 움직이지 않고 잠만 잤다. 하족의 역할은 용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었다. 가끔 혈마주는 눈에 띄는 두더지를 덥석 잡아다가 먹기도 했는데, 흑혈분의 우두머리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운 나쁜 동족의 수가 늘어나지 않도록 애를 쓰는 것뿐이었다.

단태는 용옥에 담긴 기억을 모조리 경험한 뒤에야 거기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직 중간에 용옥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숨이 가빴다. 250여 년 전의 기억, 그것도 혈마주라는 용의 기억을 들여다본 터라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새까만 구슬을 탁자에 내려놓은 단태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몸이 찌뿌드드해서 팔을 뻗어 손으로 발을 잡고 주물렀다. 오래전부터 고된 일을 해 왔던 엄마가 가끔 그런 식으로 피곤을 푸는 모습을 봤던 것이다. 발에서 다리로 찌릿찌릿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팔베개를 하고 누운 단태는 용옥에서 본 기억을 떠올렸다. 혈마주는 사악한 용이었다. 하족으로 삼은 흑혈분을 갖고 놀았고, 심심하면 잡아먹기도 했으며, 가끔은 그 깊은 용혈 밖으로 나와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했다.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사람들에게서 쾌감을 느낀 혈마주가 자주 인근 마을을 공격하자, 검은 망토를 걸친 마법사들이 나타나 용 앞에 섰다. 기이하게 꼬인 지팡이를 든 그 마법사들은 반원형으로 서서 혈마주를 올려다봤는데,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다 쓰고 있었다.

혈마주는 만만히 본 마법사들에게 당해 한쪽 날개가 부러지고 말았다. 겨우 달아났지만 자존심은 구겨졌고, 괜히 하족인 흑혈분에게 성을 냈다. 그날, 흑혈분 열두 마리가 혈마주의 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용은 마법을 펼쳐 날개를 치료하는 동시에 이를 갈았다. 다 낫기만 하면 밖으로 나가서 만나는 족족 인간을 죽이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그 혈마주가 복수에 성공했는지는 용옥에 나와 있지 않았다. 근처 지역에서 인간의 씨를 말렸는지, 아니면 마법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는지 용옥에 담긴 기억은 말해 주지 않았다.

“용도 다양하구나.”

단태는 사람만큼 용도 다양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사람 중에는 도양 같은 냉혹한 노예 상인도 있지만, 륜사나 여화 그리고 명국영처럼 좋은 사람도 있다. 용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단태가 손에 쥐었던 일곱 개의 용옥은 일곱 개의 기억을 담고 있었다.

유천주가 칭찬해 마지않던 현룡 무한주는 그 명성대로 위대한 용이었다. 무한주는 평생 ‘목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깊이 파고들었다. 왜 태어났는지, 왜 존재하는지 알고 싶어 대륙은 물론 바다 건너로 날아가기도 했다는데, 그래서인지 인간은 물론 조그만 동물도 짓밟거나 가볍게 죽이지 않았다.

무한주가 버릇처럼 내뱉는 말이 있었다.

“난 아무것도 모른다.”

그 누구보다 현명한 용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인데, 정작 당사자는 그냥 해 보는 말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런 태도에 매력을 느낀 단태는 무한주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현룡 무한주와 사악한 용 혈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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