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17화 (117/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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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용도 잠룡에게 노골적으로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 용옥에 자신의 기억을 집어넣지 않았다. 그 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부분으로 용옥을 채웠는데, 용옥마다 그 내용이 달랐다. 그럼에도 용옥에 담긴 기억을 체험할수록 단태는 용족 특유의 방식, 살아가는 방법에 익숙해졌다.

마치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떠들다가 마을의 방식에 익숙해졌던 것처럼.

보슬비에 서서히 옷이 젖어 가는 것처럼.

단태는 유천주와 대면함으로써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처절하게 깨달았다.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던 그가 웃으며 유천주를 바라볼 뿐 아니라 여유롭게 생각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딱 하나 세상을, 무엇보다 유천주를 바라보는 마음의 눈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내면이 바뀌면 외부도 변한다는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용옥은 이 마음을, 내면 깊숙한 곳을 흔들었다. 단태는 용옥을 쥐고 마력을 흘려 그 내부로 들어갈 때마다 마음이, 정신이 흔들림을 느꼈다. 마음을 떠받치는 기둥이 세차게 흔들렸다.

심지어 조금 전에는 엄마가 엄마로서의 책무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즉 엄마가 현실 사정에 어두웠기 때문에 엄마 자신은 물론 아들과 딸까지 노예로 만들었다는 사악한 생각이 머리에 잠시 머물렀다. 그 생각은 노예 신세로 전락하는 사람들에겐 그런 취급을 받아 마땅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전에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냉혹한 생각으로까지 발전했다.

여우가 토끼를 사냥하고, 매가 병아리를 낚아채는 자연처럼 인신매매와 노예제도까지 같은 방식으로 정당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던 단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노예로 그 고생을 했는데, 게다가 엄마와 여동생이 노예로 팔려 간 상태인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전혀 다른 의미의 두려움이 몰려왔다.

눈앞에서 포효하는 유천주라면 얼마든지 마음의 힘을 발휘하여 내면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 혼신의 힘을 끌어내면 웃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마음 자체가 이런 식으로 흔들린다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 터였다.

무능한 엄마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는 그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삶은 완전히 바뀌고 말 것이다. 아등바등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엄마를 구할 필요도 없고, 여동생도 스스로 알아서 살아야 할 테니까. 그러면 유천주의 뜻대로 용족의 일원으로서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하족으로 삼는 문제는 고민거리 축에 끼지 못할 것이다.

과연 그런 삶이 옳을까?

그러고도 진정으로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런 결정은…… 모두의 비난을 받을 만한, 악마나 택할 법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용의 관점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단태가 경험한 용옥 내부의 기억, 그 기억을 제공한 용족은 열이면 열 무기력한 가족을 버리는 건 지극히 논리적이며, 당연한 결정이라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용의 사고방식은 인간의 사고방식과 완전히 달랐다.

계속 이곳에 머물며 강요에 못 이겨 용옥을 들여다보았다가는 엄마와 여동생을 향한 마음까지 잃어버릴 것 같았다. 단태는 그 어느 때보다 이 지독한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순간, 길이 보였다.

유독 천장과 벽이 만나는 일부분만 먹구름에 덮인 하늘처럼 어두컴컴했다. 거미들이 드나드는 통로의 입구가 거기 있었다. 한참 그 어둠을 올려다보던 단태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빠져나갈 길이었다!

왜 저 통로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설고는 주기적으로 금룡어와 수초를 가져왔다. 속단할 수는 없으나 대략 하루에 한 번 같았다.

단태는 말없이 기다렸다. 용옥에 집중할 때는 자주 찾아오는 것 같았는데, 기다리고 있으니 설고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루해서 하품을 하던 단태는 어둠을 뚫고 내려오는 허연 거미를 발견했다. 그는 일부러 설고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설고는 조그만 돌 항아리에 수초와 금룡어를 넣고는 잠시 단태를 지켜보았다. 기지개를 켠 단태가 녹색의 용옥을 손에 쥐자 설고는 벽을 타고 올라가더니 천장의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잠시 기다렸다.

속으로 백까지, 아니 이백까지 세었다.

두려움을 몰아낸 단태는 그 구멍 난 천장 아래로 가서 벽을 만졌다. 표면이 거칠지만 발 디딜 곳은 없었다. 생각에 잠긴 그는 금룡어가 담긴 돌 항아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곧 돌 항아리에서 물이 솟구쳐 단태가 서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단태는 정신을 집중하여 물로 밧줄을 만들었다. 끝부분은 천장 위쪽 통로의 돌부리에 걸리도록 신경을 썼다. 땀을 뻘뻘 흘리며 만든 물의 밧줄을 위로 던졌는데, 천장에 닿자마자 밧줄은 형태를 잃어버리고 물이 되어 쏟아졌다.

그 물이 단태를 덮쳤다.

몇 번 반복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단태는 물로 칼과 망치를 만드는 일과는 질적으로 다른 작업에 몰두했다. 곧 실패의 원인을 찾아냈다. 몸에서 멀어질수록 물로 만든 밧줄의 강도가 약해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내에서는 형태를 유지하던 물의 밧줄이 천장에 닿으면 액체가 되어 흘러내린 이유였다.

단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아냈다. 설고가 두고 간 수초로 밧줄을 만들고, 금룡어의 뼈로 만든 갈고기를 그 밧줄로 묶어 던진 것이다.

세 번의 시도 만에 한때 금룡어의 몸 일부였으나 이제는 탈출의 도구로 재활용된 뼈 갈고리가 천장의 통로 바닥 돌부리에 걸렸다. 단태는 조심스레 수초를 잡고 올라갔다. 수초 밧줄이 끊어져서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불빛 하나 없는 통로의 바닥으로 단태는 기었다. 손바닥과 무릎이 까지도록 기어간 후에야 야광석 덕분에 빛이 있는 복도로 내려올 수 있었다. 숨을 헐떡이면서 단태는 주위를 살폈다.

‘어디로 가지?’

조급한 마음에 단태는 방향도 모르고 무작정 걸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복도는 왼쪽으로 꺾였고, 두 개의 갈림길이 보였다. 단태는 왼쪽을 택했다. 천장이 낮아졌으며 통로의 폭도 줄어들었지만 단태가 걸어가기엔 충분한 길이었다.

또다시 나타난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접어든 단태 앞에 유천주가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디 가는 게냐?”

“…….”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다가 주저앉아 버린 단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천주 뒤에서 명령을 기다리는 설고를 본 단태는 애초에 탈출은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용옥간 내에서의 심적 변화를 도무지 참을 수 없었을 뿐이다.

“용서는 한 번뿐이란다, 료마주. 한 번 더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널 죽이고, 물의 도시로 날아가서 그 도시까지 폐허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아니, 도시를 잿더미로 만든 후에 널 죽이겠다. 알겠느냐?”

“……네.”

대답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을 것 같았다.

“설고, 료마주를 용옥간으로 안내하거라.”

“네, 용주님.”

설고가 앞으로 나왔고, 단태는 설고를 따라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용옥간으로 돌아가서 용옥을 손에 쥐고 그 기억 속으로 풍덩 뛰어들기를 반복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불 보듯 뻔했다. 살아가는 이유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지금까지 버틴 이유는 오직 하나, 엄마와 여동생 때문이었다. 그게 삶의 목적이고, 살아가는 이유였다.

뒤뚱거리면서도 동작이 유연한 설고를 따라가면서 단태는 이미 용족 특유의 사고방식이 가진 달콤한 유혹을 느끼고 있었다.

용은 자신 외의 누구에게도 집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책임감 혹은 의무도 느끼지 않았다. 용옥에 기억을 남긴 모든 용의 공통점이었다. 어떠한 도움도 받을 필요가 없기에 도움을 줄 이유도 없는 게 용족의 사고방식이었다.

심지어 용족은 도움을 받는 것 자체를 수치로 여길 뿐 아니라, 도와주려는 시도 자체를 모욕으로 간주했다. 잠룡을 제외한 모든 단계의 용은 도움을 바라지 않을 뿐 아니라,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도와주어서도 안 된다는 관념을 고수했다.

‘벌써 엄마 때문이라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어……. 그러면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겠지. 지금 상태라면, 탈출은 틀렸어. 이곳에 대한 지식이 부족할 뿐 아니라, 벗어날 능력도 내겐 없어. 이제 어쩌지? 유천주의 의도대로 내가 변할까? 아니, 변화는 이미 시작됐어. 문제는 어떻게 나 자신을 지키느냐 바로 그 점이야.’

용옥간에 도착했다. 그 무거운 돌문은 열려 있었는데, 단태가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다시 혼자가 된 단태는 용옥이 놓인 선반 앞으로 걸어갔다. 탈출하려면 이 용옥에 담긴 지식이 필요했다. 이곳에 대해서 잘 알아야 벗어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용옥에 깃든 기억을 접할수록 빠른 속도로 용의 사고방식이 내면으로 스며들었다. 어떻게 해야 지식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경험에 녹아 있는 삶의 방식은 거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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