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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은 문제였다. 지식에는 그 지식을 창조한 존재의 사고방식이 스며들지 않을 수 없다.
벽으로 가서 등을 기대고 앉아 고민에 잠겼던 단태는 한참 만에 진실을 깨달았다.
용옥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부에 숨겨진 욕망,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이 용옥에 담긴 용족 특유의 삶과 반응하지 않았다면 엄마를 부정하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으리라. 태어난 순간부터 지배하기보다는 지배당하는 쪽이었던 단태는 그 지긋지긋한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심지어 엄마와 여동생을 버리면서까지도.
추악한 진실에 혼자 있는데도 마치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뜨거워졌다.
울컥 갑자기 치밀어 오른 분노에 이어서, 왜 엄마와 여동생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단태 자신이 힘겹게 살아가는 것처럼, 엄마와 여동생도 제각기 알아서 삶을 일구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책임을 각자 지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굳이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운명까지 책임져야 한다면, 그보다 어리석고 비합리적인 일도 없을 텐데.
의문은 곧 의심으로 자라났다.
왜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살아야 할까? 고생해서 낳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단태는 이 질문에서 자유로웠다. 사람 같지 않은 아버지는 물론 엄마 앞에서도 단태는 떳떳했다. 워낙 어릴 때부터 가장 역할을 맡았기에 단태는 보살핌을 받기보다는 보살피는 쪽이었다.
용족은 철저하게 스스로 결정한 방식대로 살았다. 몇 가지 규율만 제외한다면 용족의 삶은 제각기 달랐는데, 누구도 그런 방식의 삶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용족으로서의 규율만 지킨다면 모든 용은 스스로 선택한 방식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었다.
단태는 그런 삶이 부러웠다.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는 삶.
족쇄에서 풀려나 자유를 누리는 삶.
웃음이 삐져나왔다.
바다 밖으로 끌려나온 물고기 한 마리가 자신은 물고기가 아니라, 공기로 숨쉴 수 있는 동물, 커다란 날개를 가져서 하늘 꼭대기까지 힘차게 날아갈 수 있는 독수리라는 사실을 깨닫고도 답답한 바다로 돌아갈까, 아니면 바다 바깥세상에서 자유를 만끽할까 고민하는 상황이 아닌가. 그 미련한 독수리가 딱 지금의 단태였다.
“휴우…….”
단태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머릿속에서 두 명의 단태가 싸우고 있었다. 아들로서의 단태는 엄마와 여동생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고, 또한 걸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에 용족이 되고 싶은 단태는 번데기에서 빠져나온 나비가 애벌레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는다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세요? 고민 있으시죠?”
딱딱한 목소리에 고개를 든 단태는 하얀 거미를 쳐다봤다. 저 거미는……? 그래, 설고였다. 문득 이 덩치 큰 거미가 던진 질문의 의미를 깨달은 단태는 머리를 가득 채운 고민을 자신도 모르게 잠시 옆으로 밀어놓았다.
“고민? 그 말의 뜻을 알고 있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생각을 거듭하는 과정을 고민이라고 하지 않나요?”
거미의 발음에는 쉭쉭 바람 새는 소리가 섞여 있지만, 비교적 발음은 정확한 편이었다.
단태는 또 다른 의미로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거미가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앵무새도 말을 한다. 사람의 말을 흉내 내어서. 처음 말하는 거미를 봤을 때, 단태는 자연스럽게 언젠가 봤던 앵무새를 떠올리며 그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지, 이처럼 자유자재로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거미는…… 거미다!
거미는 보통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고, 거미줄을 쳐서 먹이가 걸려들기를 기다린다. 어떤 거미는 뛰어다니며 먹이를 사냥하기도 하지만, 단태가 어린 시절에 본 거미는 대부분 감탄할 만큼 정교하게 함정을 만들어 기다리는 쪽이었다.
몸집이 커졌다고 해도 거미는 거미가 아닌가. 거미가 말을 하다니. 그것도 유창하게.
단태는 또 한 번 익숙한 바다 밖으로 끌려나온 한 마리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이번에는 용족이 아니라, 말하는 거미가 있는 세상이었다. 잠시 거미를 쳐다봤다. 어디가 코인지, 어디가 입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거미는 무심하게 단태를 응시하고 있었다. 단태는 눈앞의 하얀 거미를 어떤 존재로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시 눈을 감았다.
거미가 아니라, 다른 존재…… 그러니까 처음 만난 사람으로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사람의 이목구비와는 전혀 다른 얼굴 같은 무언가를 쳐다보면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난 단태야. 넌 설고지?”
“네.”
“……혹시 몇 살인지 물어봐도 될까?”
“인간족의 기준을 따르면, 스물두 살이에요.”
“그래?”
단태는 깜짝 놀라며 눈을 떴는데,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하얀 거미를 보고 뒷걸음을 치다가 중심이 흔들렸다.
설고가 순식간에 다가와 단태가 넘어지지 않도록 붙잡았다. 두 개의 차갑고 견고한 앞발로.
단태는 코앞으로 다가와 있는 거미의 눈, 사나운 턱, 빳빳한 털을 보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조심하세요.”
설고는 뒤로 물러섰다. 탁탁, 소리를 내면서.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은 단태는 더 이상 눈을 감지 않았다. 겉모습은 거미일지 몰라도, 이제껏 자신이 알았던 거미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너도 고민 있어?”
“……당연히 있지요.”
설고는 망설였다.
거미가 망설였다! 단태는 또 한 번 설고를 야생의, 본능에 충실한 거미와 다른 존재로 봐야 한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설고는 말을 했고, 단태는 잠자코 들었다. 놀라면서. 확실히 평범한 사람들의 고민과는 다른 내용이지만, 그 진지함은 비슷했다. 설고는 알을 낳지 못하는 암컷 거미였다. 은연중 설고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이 드러났는데, 그와 동시에 설고는 약점 때문에 깊은 열등감에 빠져 있었다. 설고를 통해 단태는 유천주의 하족이 단순한 거미가 아님을 깨달았다. 유천주와의 계약으로 인해 생각할 능력을 갖게 된 거미는 더 이상 평범한 거미가 아니었다.
“뭘 하고 싶어?”
단태가 물었다.
“수금을 연주하고 싶어요.”
“수금? 수십 개의 줄이 달린 악기 말이야?”
“네.”
설고에게서 진지함이 묻어났다.
“수금을 어떻게 알았어? 혹시 글을 읽을 줄 알아?”
“네, 읽을 줄 알아요. 어릴 때 배웠어요. 그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싶고, 연주하고 싶은데 이런 손, 발로는 무리예요. 그걸 알기에 더 해 보고 싶어요.”
“여기 있는 거미들이 다 글을 읽을 줄 알아?”
단태는 엄마의 강요로 글을 배운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글을 읽는 거미는 얼마 없어요. 그리고 저처럼 책을 많이, 자주 읽는 거미는 없지요.”
“그래?”
단태는 이 새하얀 거미가 특별한 거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는 료마주 님을 이해해요.”
“……뭐?”
단태는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꿈속에서는 뭐든지 일어날 수 있는 법이다.
“료마주 님은 인간족 사이에서 살았지만 용족이에요. 유천주 님을 통하여 진실을 알았지만, 여전히 료마주 님의 마음은 인간의 마음이잖아요. 그 때문에 고민하고 있지 않으세요?”
“…….”
“저도 마찬가예요. 유천주 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아서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은 저는 글도 읽고, 수금을 타는 상상도 할 수 있지만, 용혈에 있는 동족의 대부분은 머릿속에 어둠이 깔려 있어 지혜를 담지 못해요. 저는 거미인 동시에 거미가 아니에요. 제가 거미라면 동족을 함부로 죽이고 착취하는 유천주 님에게 대항해야 마땅하지만, 또한 저는 거미가 아니기 때문에 유천주 님에게 복종하지요. 그러니 제가 료마주 님을 이해한다는 말은 절대 거짓이 아니에요.”
“……어느 쪽에 가깝지? 거미에? 아니면 거미가 아닌 쪽에?”
단태는 이 거미라면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일초라도 빨리 그 답을 듣고 싶었다.
“이미 말씀드렸어요.”
“거미인 동시에 거미가 아니다?”
“네, 료마주 님.”
“어떻게 그런 답에 만족할 수 있지? 난 이해할 수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