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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태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만족한 게 아니라, 만족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전 거미가 아니에요. 그러면서도 거미예요. 인간이 스스로 동물이 아니라고 믿지만, 인간이 동물인 것처럼 말이에요.”
설고는 자신을 인간에 비유하고 있었다.
단태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며 하얀 거미를 쳐다봤다. 처음으로 저 거미에게 기이한 동질감을 느꼈다. 무시무시한 거미가 아니라, 같은 고민으로 오랫동안 씨름한 동료랄까. 기분이 이상했다. 어떻게 저 커다란 거미에게서 친구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미쳐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런 곳이라면 미치지 않는 게 이상할지도 모른다.
설고가 말했다.
“그게 제 결론이에요. 용족으로부터 지혜를 받은 거미, 거미인 동시에 거미가 아닌 존재, 그게 바로 접니다.”
“……그게 최선일까?”
“한 가지 진실을 깨달았어요. 중요한 건, 제가 누군가가 아니라, 제가 무엇을 하는가였어요. 저는 거미가 아닌 상태를 참아 내는 이유는 어둠에 묻힌 동족에게 빛을 주기 위해서니까요. 일단, 그 일을 목표로 삼으니 제가 누군지에 대한 고민은 더 이상 저를 괴롭히지 않았어요. 그러니 료마주 님도 답 없는 질문에 골몰하기보다는 무엇을 할지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훨씬 편해지실 거예요.”
단태는 설고의 충고를 마음에 새겼다. 그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걷어차 버릴 마음도 없었다.
“이런 이야기, 왜 내게 하는 거지?”
“그건, 료마주 님이 저에게 고맙다고 하셨기 때문이에요.”
“내가 그랬었나?”
“료마주 님은 처음으로 제게 그 말씀을 해 주신 분이에요.”
단태는 설고의 기괴한 이목구비를 본 순간, 아름다운 미소를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여전히 두려움을 자아내는 잔혹한 거미의 이목구비지만 단태에게는 그 어떤 절망의 상태마저도 깡그리 날려 버릴 미소 같았다.
*두 번째 시험
단태는 더 이상 고민에 휘둘리지 않았다.
설고 덕분이었다.
용옥에 담긴 용족 특유의 기억을 경험한 후에는 반드시 설고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설고는 용이 아니었기에 설고와의 대화는 단태를 용족의 사고방식에 깊이 빠져들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또한 단태는 설고에게 저 위쪽의 삶, 시골의 고즈넉한 삶과 도시의 분주한 삶을 자세히 들려주면서 자기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설고는 단태가 위쪽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그 누구도 보여 주기 힘든 집중력으로 단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용혈에서 설고는 단태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였다. 설고도 동족 중에는 대화 상대가 없는 터라 틈만 나면 단태가 있는 용옥간에 들렀다.
단태는 새하얀 용옥을 집어 올렸다. 이 구슬에는 어떤 기억이 담겨 있을까? 설레면서도 불안했다.
“잘 다녀오세요, 료마주 님.”
설고가 말했다.
커다란 배를 바닥에 대고 여덟 개의 다리 중 여섯 개를 양쪽으로 벌려 나름대로 편한 자세를 취한 설고를 힐끔 쳐다본 단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손바닥에 올려놓은 구슬에 집중하자, 곧 새하얀 안개가 구슬에서 빠져나와 단태를 에워쌌다.
섬광과 함께 단태는 용옥 내부로 들어섰다.
축축한 안개 사이로 검은 고목이 서 있는 숲이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땅은 잿빛이었다. 저 멀리 까마귀 울음이 요란하게 들렸다. 미치광이 까마귀 같았다. 고인 웅덩이 속 물이 썩고 있는지 악취가 진동했고, 가끔 부는 바람에 안개가 이리저리 흔들려 고목 너머에 무언가 숨어서 이쪽을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단태는 용옥 내부로 들어설 때마다 현실이 아니라, 그저 기억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거듭했지만, 오감을 자극하는 이 생생한 세상을 접하는 순간 그런 다짐은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만큼 용옥에 담긴 기억은 현실만큼, 때로는 현실보다 더 실감나는 세상이었다.
단태는 주위를 살폈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구슬의 색깔은 곧 용의 몸 색깔과 유사했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몸이 하얀 용을 볼 수 있다는 뜻인데.
그 순간, 바로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목에 와 닿는 차가운 감촉.
“환영한다, 미래의 잠룡이여.”
천천히 몸을 돌린 단태는 은발의 여인을 발견했다. 삼십 대 초반의 여인은 꿈에나 나올 법한 미녀였다. 은색의 머리카락은 바람의 흔들려 뒤로 펼쳐진 안개와 잘 어울렸다.
단태는 저 여자가 희귀한 백룡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놀라서 몸이 굳어버렸다. 이제까지 용옥의 기억은…… 생생하지만 기본적으로 책처럼 고정된 내용이었다. 여러 번 용옥 속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바뀌는 부분은 없었다.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다가와 말을 거는 존재는 거기 없었다.
“……내가 보입니까?”
“당연히 보이지. 아, 능옥은 처음이구나? 대체 명룡이 누구기에 능옥에 대해서 안 알려 준 거지? 네 명룡은 누구니?”
“유천주인데요.”
“유천주? 처음 듣는 이름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따라와.”
“……네? 아, 네.”
단태는 족히 몇 시간은 걸어서 여인의 거처에 도착했다.
여전히 안개가 출렁거리는 숲이었는데, 동굴 같은 입구를 통과하니 뜨거운 햇볕에 말린 빨래에서 나는 기분 좋은 향기로 가득 찬 공간이 나타났다. 샛노란 꽃이 제법 물살이 거센 시냇가를 뒤덮었는데, 그 물줄기 위쪽에는 그리 크지 않은 물레방아가 쿵쿵 소리를 내며 돌고 있었다. 여인이 건넌 돌다리로 올라선 단태는 흘러가는 물 아래에서 무리지어 돌아다니는 큼지막한 물고기들을 볼 수 있었다.
여인은 아담하면서도 격식을 갖춘 방으로 단태를 데려갔다. 그 방 중앙에 자리 잡은 탁자에는 먹음직한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먹으렴. 일단 먹고 난 다음에 시작하자꾸나.”
“시작하다니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일단 식사부터 하자. 여기까지 오느라 배가 고팠을 테니까.”
여자는 자기가 먼저 구운 생선을 반으로 잘라 맛있게 먹었다. 허기를 느낀 단태도 음식에 달려들었다. 생각해 보니, 용옥에 들어와서 음식까지 먹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네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서 말해 봐.”
백룡은 기다란 손가락에 묻은 고기를 빨면서 말했다.
단태는 잠시 망설이다가 저주로 인해 고룡 암탄주가 죽었고, 유천주가 저주에 걸린 상태라는 내용을 간략하게 알려 주었다. 그런 다음, 식사를 멈추고 백룡을 쳐다보았다.
“……아직 해결이 안 된 모양이구나.”
한숨을 내쉬는 백룡.
단태가 묻기도 전에 백룡은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백룡, 아니 백화룡 시하원주는 탕무 신국이 위세를 떨쳤던 시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줄잡아 1,700여 년 전에 존재했던 용이었다. 저주가 그토록 오래 전부터 용족을 괴롭혀 왔다는 사실에 단태는 깜짝 놀랐다. 그 긴 시간 동안 용족은 저주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시도를 다 했으리라. 그런데도 저주가 용족을 집어삼켰다면, 과연 누가 저주로부터 용족을 구해 낼 수 있을까?
“놀랐니?”
“……네.”
“넌 좀 이상하구나. 뭐라고 지적하기는 어렵지만, 분위기가 달라. 용족이라고 하기에는.”
시하원주는 여전히 웃고 있지만 그 눈은 예리하게 단태를 훑고 있었다. 곧 시하원주의 눈이 커졌다. 벌어진 입을 하얀 손으로 막은 그녀는 벌떡 일어나 단태를 노려보았다.
“너, 인간이구나!”
“…….”
“아니, 인간은 아니야. 인간이라면 여기에 들어올 수 없으니까. 그러면 넌 대체 누구지? 용족이라면 마땅히 가지는 심장도 없고, 감각도 지극히 둔한데 말이야.”
“저도 그게 궁금해요. 운좋게 용의 유산을 이어받은 인간인지, 아니면 인간의 손에서 자란 용인지, 저도 모르니까요.”
“……그래?”
의심이 담긴 시선.
“그래도 미심쩍다면 절 여기서 나가게 해 주세요.”
“음, 내가 네 몸을 만져 봐도 될까?”
“얼마든지요.”
단태는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그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어깨와 가슴, 배, 다리 등을 쿡쿡 찔러 보는 시하원주의 행동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어쩌면 여기서 결론이 날지도 몰랐다. 어떤 결론이면 만족할까? 용? 아니면 인간? 단태는 깨달았다. 시하원주가 어떤 말을 한다고 해도 결국 선택은 자기 몫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