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20화 (120/293)

<-- 120 회: 3-39 -->

시하원주는 마지막으로 단태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애지중지 키운 수박을 두 손으로 감싸는 농부처럼.

곧 시하원주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앉았다. 말없이 단태를 한참이나 쳐다보던 시하원주가 입을 열었다.

“다 먹었지?”

“네?”

“따라오너라.”

시하원주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단태는 허겁지겁 그녀를 쫓았다. 굽이도는 물살의 거친 소리가 들리는 공터에 도착한 시하원주는 단태가 그 공터로 들어서는 순간 다짜고짜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어찌나 빠른지 단태는 백룡이 다가오는지도 몰랐다.

용옥 안이라도 해도 고통이 느껴졌다. 이유를 몰라 당황한 단태는 천천히 일어섰다.

“넌 결론을 원하지? 그렇지? 네가 인간이라면 넌 여기서 죽어. 네가 용이라면 넌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고. 어때? 명료하지 않니?”

시하원주가 은색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다가왔다.

순식간에.

@

설고는 며칠째 깨어나지 않는 단태 주위를 맴돌았다. 새하얀 구슬을 손에 쥔 채 바닥에 쓰러진 단태의 얼굴은 시시각각 변했다. 눈꺼풀로 뒤덮인 눈이 이리저리 움직였고, 고통 때문인지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분명히 살아 있는데, 구슬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처럼 오랫동안 구슬 내부에서 시간을 보낸 적은 없었다.

마음을 굳힌 설고는 단태를 앞발로 들어 올리고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갔다. 용옥간을 빠져나와 복도를 달리는 설고는 신음까지 흘리는 단태를 내려다보았다. 단 며칠 만에 홀쭉하게 살이 빠져 있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죽을지도 몰랐다.

거대한 용의 모습으로 휴식을 취하는 공간인 대혈은 텅 비어 있었다. 설고는 주혈로 향했다. 주혈은 유천주가 인간의 몸으로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다. 몰려드는 두려움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규율은 엄격했다. 부르지 않았는데 멋대로 주혈로 들어갔다가는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을 수도 있다. 동족 중 기억력이 나쁜 거미 몇이 그런 식으로 목숨을 잃었다.

설고는 단태를 안은 채 주혈로 들어섰다. 유천주가 어디 있는지 살피는데, 너무도 쉽게 다리가 잘렸다. 왼쪽 다리 네 개가 반토막이 나자, 설고는 단태를 안은 채로 왼쪽으로 쓰러졌다. 잘린 다리에서 끈적끈적한 체액이 흘러나왔다. 끔찍한 고통에 울음이 터져나왔지만 설고는 끝까지 단태를 놓치지 않았다.

“감히 나의 공간에 침입하다니.”

유천주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료마주 님께서……”

설고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고통이 설고를 덮어 버린 것이다.

그제야 유천주는 다리 잘린 설고가 끝까지 안고 있던 단태를 발견했다. 피골이 상접한 단태를 보자마자 즉각 무엇이 문제인지 간파한 그는 마법으로 설고의 다리를 붙인 후, 단태가 쥐고 있는 백색의 용옥 안으로 들어섰다.

안개 깔린 음침한 숲에 선 유천주.

“취향은 여전하네. 하긴, 바꿀 수는 없겠지. 이미 만들어진 용옥이니까. 그래도 여긴 들어올 때마다 영 아니야.”

유천주는 늑대로 몸을 바꾸어 숲을 질주했다. 몇 번이나 와 본 곳이라서 길을 잃을 염려도 없었다. 시하원주의 거처 앞에서 사람의 몸으로, 멋진 남자로 변신한 유천주는 뒷짐을 지고 걸었다. 동굴을 통과하자 향기로운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돌다리 위에 선 유천주는 저 아래에서 연신 두들겨 맞는 료마주를 볼 수 있었다. 시하원주는 깔깔 웃으며 지쳐서 죽기 직전인 료마주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유천주는 발을 굴러 돌다리를 부수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무너지며 첨벙 물로 떨어지는 돌다리도, 시냇물도 작아졌는데, 유천주는 정확히 시하원주와 나가떨어져 숨만 몰아쉬는 료마주 사이에 착지했다. 뒷짐을 진 유천주는 시하원주를 노려보았다.

“오랜만입니다, 아주머니.”

“오랜만? 날 만난 적이 있나 봐?”

“그러다가 나의 잠룡을 죽이겠습니다그려.”

유천주는 료마주를 힐끔 쳐다봤다.

“위대한 종족의 일원이라면 여기서 죽을 일은 없지.”

“일원이라면?”

“자네도 알 텐데? 저 녀석에겐 용의 심장이 없다는 사실을.”

“용의 심장이 있든, 없든 저 녀석의 운명은 명룡인 제가 결정합니다. 그 누구도 아닌 명룡이 잠룡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점은 아무리 늙은 용이라고 해도 알고 있을 텐데요.”

“난 그저 반가움을 표현했을 뿐인데, 자네의 잠룡이 저리 약한 줄은 몰랐지.”

시하원주가 달려들었다. 빨라서 눈으로 쫓아가기 어려운 동작이었다. 그러나 유천주는 간단히 뒤로 물러나며 피했고, 이어서 시하원주보다 빠른 속도로 다가가서 은색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낚아챘다. 시하원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빙긋 웃은 유천주는 머리카락을 꽉 쥐고 힘껏 던졌다. 시하원주는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무너진 돌다리 위로 추락했다.

“용옥에 갇힌 기억 주제에 감히 진짜 용족에게 달려들어? 여기서 나가면 당장 구슬을 박살 내 주지.”

유천주는 숨을 몰아쉬는 료마주 앞으로 걸어갔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밖에서 맞고 들어온 아들의 멍든 얼굴을 보고 좋아하는 부모는 없다. 유천주는 료마주의 목덜미를 잡고 용옥 밖으로 나왔다.

유천주가 료마주를 던지자 설고가 재빨리 받았다. 잘린 다리를 마법으로 붙였지만 타는 듯한 고통은 여전히 설고를 괴롭히고 있었다. 유천주는 바닥에 떨어진 하얀 구슬을 손에 쥐고 단숨에 박살냈다. 어디선가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용옥간으로 데려가서 회복될 때까지 금룡어의 눈알을 먹여라.”

“네, 유천주 님.”

“…….”

유천주는 료마주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조심 움직이는 설고를 쳐다보았다. 저 거미가 료마주를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시하원주 그 늙은 용에게 시달리다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저 거미가 료마주를 살렸다. 왜 그랬을까? 료마주를 감시하라고 했을 뿐, 목숨을 걸고 지키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는데.

@

단태는 아기처럼 오랫동안 잠을 잤다.

몸이 잠을 필요로 했다. 깨어나면 설고가 입 안으로 넣어주는 눈알을 먹었다. 며칠 동안 두부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비리고, 물컹거리는 금룡어의 눈알을 씹어 먹었다. 당연히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먹었다. 눈도 뜰 수 없는 상태에서 설고가 약이라면서 주는 눈알을 먹었던 것이다.

겨우 몸을 일으킨 단태는 설고가 가져온 그릇에 가득 담긴 눈알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 저게 뭐야?”

“유천주 님께서 하루에 서른 개씩 꼭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뭔데?”

“금룡어의 눈알입니다.”

“……내가 저걸 계속 먹었어?”

“네, 료마주 님.”

“…….”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었지만 구역질을 하거나 토하지는 않았다. 저 금룡어의 눈알을 먹으면서 비몽사몽간에 특별한 날에만 맛보았던 사탕이라고 생각했었다. 알록달록 예쁜 색깔에 입에 넣고 혀로 굴리면서 빨면 모든 것을 잊어버릴 만큼 달콤한 맛이 일품인 그 사탕을 금룡어의 눈알로 착각하다니!

별 생각 없이 그릇에 수북이 담긴 눈알을 쳐다본 단태는 깜짝 놀랐다. 그릇은 물론 눈알마저 돋보기를 댄 것처럼 몇 배로 커졌다. 피가 스며든 눈알의 가장자리, 칼로 도려 내지 않고 단숨에 뜯어내느라 깔끔하지 못한 눈알의 뒤쪽, 눈알 곳곳에 붙어 있는 조그만 파리까지 다 보였다. 파리가 앞다리를 비비며 무엇을 하는지도 볼 수 있었다.

두통이 눈 안쪽에서 폭탄처럼 터졌다.

단태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몸부림을 쳤다.

놀라서 그릇을 놓친 설고가 단태 옆으로 다가갔는데, 몇 개의 눈알이 그릇 밖으로 나와 바닥에 떨어지며 퍽 터졌고, 거기로 파리들이 몰려들었다. 설고가 다시 한 번 단태를 데리고 유천주를 찾아가리라 결심한 순간, 그 두통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이 눈썹을 지나 눈꺼풀까지 덮고 있었다. 단태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아직 눈을 뜨지는 않았다. 눈꺼풀을 밀어 올리는 순간, 그 끔찍한 두통이 다시 찾아오지는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몸에서 흘러나온 땀 냄새를 맡으며 단태는 조금 전에 벌어진 일을 곰곰이 생각했다.

가만히 앉아서 쳐다보기만 했는데, 어떻게 그 눈알이 그토록 자세히 보였을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