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22화 (122/293)

<-- 122 회: 3-41 -->

그러나 곧 설고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 존재인지 떠올렸고, 어리석은 생각을 한 자신에게 실망했다.

“제가 아는 용족, 위대한 존재는 절대 잊어버리는 법이 없어요. 빚을 지면 확실히 갚고, 누군가에게 받아낼 빚이 있다면 반드시 받아내지요. 료마주 님을 키워 준 그 인간들에게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건 용족으로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제가 보기에 료마주 님은 부자가 되고 싶은 동시에 가난까지도 가지고 싶은 인간 같아요. 배가 고파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동시에 여전히 배가 고픈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인데, 저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

단태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둘 다 가질 수는 없어요. 힘을 추구하면 관계가 깨지고, 관계를 중시하면 힘을 놓칠 수밖에 없으니까요.”

“너, 똑똑하다.”

단태는 진심이었다.

“어디선가 읽은 내용이에요.”

“그래?”

“료마주 님은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진짜 하고 싶은 것 말이에요? 가족은 료마주 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아니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단태는 설고가 무슨 말을 할지 기대하며 되물었다. 그에게 눈앞의 거미는 스승이나 다를 바 없었다. 적어도 이 문제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설고가 전문가일 테니까. 명국영과 륜사도 이 문제를 두고 단태에게 충고할 수 없으리라.

“그건 빚을 갚는 일이니까요.”

“빚?”

“마음의 빚을 갚으면 속이 후련해지겠지만, 평생 그 빚만 갚으면서 살 수는 없어요. 만약 누군가를 위해서 그렇게 산다면, 그는 빚의 노예가 될 뿐이에요. 진정한 일은 외부에 없어요.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해요. 누군가를 위해서 하는 일은 모두 가짜에요.”

“…….”

단태는 가족을 향한 사랑을 빚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설고의 방식이 거슬렸지만, 그 말이 담은 내용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짜’라는 단어에 마음이 깊이, 오랫동안 울렸다.

“혼자 있고 싶다.”

“네, 료마주 님.”

설고가 사라지자, 단태는 혼자 용옥간을 돌아다니며 생각에 잠겼다. 설고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 혼란이 일순간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 진실이었던 것이다. 양손에 쥔 보물 전부를 가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상황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게 혼란의 원인이었다.

용과 인간.

둘 다 될 수는 없다.

하나를 택해야 한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저 선택의 순간을 최대한 미루며 둘 다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뿐이다.

선택하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결정해야 한다. 설고의 충고는 옳았다.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을 하는지가 중요하다.

벽에 기대어 앉은 단태는 처음으로 머릿속에서 가족을 배제했다. 왠지 모를 홀가분한 느낌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내팽개친 이후로 어쩔 수 없이 가장이 된 단태에게 가족은 고통의 시간을 지탱하는 버팀목인 동시에, 자유를 갉아먹는 족쇄였다. 가족에 대한 걱정을 옆으로 밀어놓자, 무한한 가능성이 열렸다.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마법사?

매력적이나 평생 마법에 몰두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어렵고 복잡한 마법서를 붙잡고 씨름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골치가 아팠다.

학자?

스승인 명국영을 떠올리면 고려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무무비경≫처럼 난해한 책을 평생 읽고 싶지는 않았다.

단태는 당황했다. 금세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아내리라 생각했건만. 그만큼 가족이 그의 삶에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가족만을 위해서 살아온 터라, 가족 이외의 영역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던 것이다.

단태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언제 가장 행복했을까?’

몇 개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엄마, 설희와 함께 부푼 꿈을 안고 물의 도시에 도착했던 순간도 그 장면 중 하나였다. 단태는 마치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저무는 햇살을 느꼈고, 공기에 섞인 운하 특유의 악취를 맡았으며, 설렘과 두려움으로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단순한 기억이 아니었다.

또 다른 장면이 머릿속을 차지했다.

마을 어른들과 함께 양떼를 몰고 이틀이나 걸려 목초지로 갔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어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풀밭에 누워 쏟아질 듯한 별을 올려다보았다. ‘원목’이라 불리는 그 행사는 마을에서 자라는 소년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거쳐야 할 의식이어서 항상 엄마, 여동생을 생각하던 단태도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단태는 오랫동안 그 멋진 밤을 잊지 못했다.

단태는 그때 그 자리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다. 마치 용옥에 담긴 기억에 뛰어든 것처럼. 두런두런 오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탁탁 소리를 내며 부러진 장작이 내뱉은 불티가 시꺼먼 하늘로 올라가면서 사라졌고, 풀을 쓰다듬으며 불어오는 보이지 않는 손길 같은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단태는…… 이미 거기 있었다.

단태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근처에서 가끔 우는 양떼도.

모닥불에 장작을 던져 넣으며 술을 마시는 마을 어른들도.

고개를 세차게 흔들자 단태는 용옥간 바닥에 주저앉은 자신을 발견했다. 호흡을 가다듬은 그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곧 깨달았다. 오감이 변하자, 기억력도 달라졌다. 과거의 한 순간을 떠올려도 흐릿한 윤곽이나 인상적인 내용만 떠올리는 인간의 기억력과 달리 용의 기억력은 너무나 강력해서 마치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그 순간, 그 장소로 이동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점점 더 용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순간, 단태는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어딘지 모르게 무언가 달라졌다. 불안이 마음을 채웠고, 소름이 등에서 떠나지 않았다. 무언가 바뀌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 더 두려웠다.

심장이었다.

그 역동적인 운동으로 피를 온몸으로 퍼트리는 심장에 무언가 이질적인 흐름이 느껴졌다. 혈액과 달리, 그 흐름은 심장 안쪽에 고여 있었다. 꾸준히 짙은 안개 같은 것이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심장 안에 또 다른 심장이 생긴 것만 같았다. 튼튼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물리적 심장이 안으로 들어온 피를 거대한 힘으로 밀어낸다면, 또 다른 심장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 같은 흐름을 받아들이기만 했다.

머리를 스치는 깨달음.

마지막 문이 열리고 말았다.

그 흐름은 십중팔구 마력이리라. 마력이 흘러드는 그 심장은…… 바로 용의 심장일 터였다.

더없이 기뻤다.

또한 더없이 슬펐다.

단태는 두 손을 들여다보았다.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다. 체취를 맡았다. 손으로 얼굴을, 뺨을 어루만졌다. 충동적으로 손바닥을 핥기까지 했다. 익숙해서 의식할 필요조차 없었던 이 몸뚱아리가 갑자기 낯설게 다가왔다. 이런 느낌, 처음이었다. 굳이 표현한다면, 몸을 빼앗긴 느낌이었다. 아니, 조금씩 누군가가 몸을 바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알고 있던 세계에서 쫓겨난 느낌이었다.

‘아니야! 이 느낌, 경험한 적 있어. 언제인지는 몰라도.’

순간, 단태는 이끌리듯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포근함과 답답함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노랫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은 목소리는 부드럽고 잔잔한 선율을 담고 있었다. 사랑이 듬뿍 담겨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노래, 엄마의 노래였다.

갑자기 그 일이 시작되었다. 신음과 비명이 들렸고, 세상이 조여들었다. 좁지만 그 아담한 공간이 옥죄어 단태를 밀어냈다. 나가지 않으려고, 계속 머물려고 버텼지만 그 거력에 굴복하고 만 단태는 질식할 듯한 좁은 통로를 거쳐 밖으로 나왔다. 광활해서 두려운 세상, 온갖 자극으로 가득해서 호기심을 자아내는 세상, 그러나 추위와 공포로 몸이 딱딱해지는 두려운 진짜 세상이었다.

엄마와의 연결이 끊어졌다.

예리한 칼이 탯줄을 잘라버렸다.

영원히 단절되었다!

기억의 늪에서 빠져나온 단태는 울고 있었다. 슬펐다. 엄마는 그에게 세상 그 자체였다. 엄마의 배 속은 완전 그 자체였다. 거기서 강제로 끌려나와 맞닥뜨린 세상은…… 충격의 도가니였다. 선택할 권리가 있다면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0